94화
순식간에 관람석이 찬물을 끼얹은 듯 정적이 흘렀다.
“그래, 잘 생각해 보니 그랬던 것 같군.”
에드윈이 어쩔 수 없이 인정했다.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떨떠름했다.
“결승전에서 하드윅 백작가의 기사와 겨뤘었죠. 그리고 우승했고요.”
로엔이 그날의 일을 말하자 귀족들이 미간을 접었다. 하드윅 백작가의 기사가 누군지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맙소사, 어떻게 그걸 잊고 있었는지 모르겠군요.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하드윅의 용병을 단 박에 물리쳤었는데.”
너무 충격이 크면 기억에서도 사라지는 모양이었다. 귀족들은 그날의 기억을 되새기듯 창백해진 얼굴로 로엔을 보았다.
항상 검은 베일에 가려져 연약한 여인이라고 생각했던 괴물 공작이 얼마나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가졌는지 이제야 생각난 것이다.
“흠, 흐음.”
귀족들이 헛기침을 하며 재빨리 시선을 피하기 시작했다. 로엔과 눈이라도 마주쳤다간 그녀가 휘두른 검에 목이라도 달아날까 불안한 표정이었다.
“그렇지. 록스버그 공작가야말로 아드리안 제국에서 가장 훌륭한 가문이지. 그런 의미에서 충고 하나 하자면…….”
에드윈이 일부러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위해 말을 멈췄다. 제 뜻대로 귀족들의 시선이 다시 저와 로엔에게 향하자 느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록스버그 공작, 앞으로도 그런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홀로 아름답게 서 있길 바란다. 누구의 옆이 아니라 고고하게 혼자서 말이다.”
그 말을 끝으로 특별관람석 쪽으로 걸어가는 에드윈을 보며 로엔은 기막힘에 할 말마저 잃었다.
다시 생각해도 그는 황제감은 아니었다. 제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아이들도 하지 않을 법한 심술을 부리다니.
“어, 록스버그 공작님? 그럼 관람 잘하세요.”
그리젤라가 슬쩍 로엔의 눈치를 보더니 에드윈의 뒤를 따라가는 게 보였다.
‘누구의 옆이 아니라, 고고하게 혼자서 서 있으라니.’
이건 대놓고 로이슈덴 공작가와의 결혼에 재를 뿌리겠다는 말이었다.
‘역시 에드워드 캐슬리우스 백작을 거절한 게 컸나?’
로엔은 괘씸죄가 얼마나 무서운 건지 새삼 깨달았다.
“휴우, 쉽지 않겠어.”
“걱정되십니까?”
“아니. 전혀. 오히려 승부욕이 발동해서 싸울 맛이 나는 것 같아.”
로엔이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라이칸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를 한 방 먹이다니.
이건 대놓고 황제와 척을 지겠다는 선언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런 얼굴 할 것 없어. 따지고 보면 언제 내게 쉬운 적이 있었어? 없었잖아. 그러니 이번에도 괜찮을 거야.”
로엔은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제자리에 앉았다. 말 그대로, 이보다 더 어려운 난관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헤쳐 나온 저였다.
황제가 아무리 반대한다고 해도, 귀족들의 결혼에 결정권을 쥐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입김을 불어넣을 순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그게 다였다.
“본선 대진표는 나왔겠지?”
“가서 보고 올까요?”
잠시 고민하던 로엔이 고갤 가로저었다.
“아니야. 여기서 더 사람들의 이목을 끌 필욘 없을 것 같아.”
지금도 저를 향해 쏟아지는 귀족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운데, 더는 귀족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싶지 않았다.
“록스버그 공작님!”
하지만 로엔의 계획은 뒤에서 들려온 낯익은 목소리에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아주 잠깐 불안한 눈빛으로 로엔과 라이칸의 시선이 맞닿았다.
귀족들의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아 대진표를 보는 것도 포기했는데, 소문의 당사자인 진 로이슈덴의 최측근이 로엔을 찾아온 것이다.
정말 난감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어, 알렉. 왔어?”
로엔이 뒤를 돌아보자 로이슈덴 공작가의 집사인 알렉이 붉은 리본이 묶인 양피지를 들고 서 있었다. 확인하지 않아도 양피지가 검술 시합의 본선 대진표임을 알 수 있었다.
기가 찰 만큼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궁금해하실 것 같아 가져왔습니다.”
바로 전 상황을 알지 못하는 알렉은 기쁜 듯 로엔에게 양피지를 건넸다.
“고마워. 그렇지 않아도 가지러 가야 하나 고민하던 참이었어.”
알렉은 발 빠르게 행동한 스스로의 행동에 자부심을 느낀 듯 뿌듯해했다. 그래서 차마 양피지를 옆에 내려놓지 못하고 묶여 있는 리본을 풀어 내용을 확인했다.
“무난히 결승전까지 올라가신다면 최종적으로 만나게 될 분은 에드워드 캐슬리우스 백작이 될 것 같습니다.”
대진표를 살피던 로엔이 고갤 들었다.
“세이지 님께서 그러시는데, 캐슬리우스 백작님도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으신 분이라 무난히 결승전까지 진출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세이지 님이 그런 말을 했다는 거지?”
생각에 잠긴 듯 되묻자, 그것을 염려로 받아들인 알렉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아무리 세이지 님이 인정할 정도로 검술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우리 주인님을 당할 순 없을 테니까요. 당연히 우승은 주인님이 하실 겁니다.”
“알아. 당연히 우승은 공작님께서 하실 테지. 타란 대륙에서 최고시니까.”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안심입니다. 그럼 전 대진표도 전했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혹시 주인님께 전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제가 전해 드리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로엔이 잠시 머뭇거렸다.
“딱히 전할 말은…….”
없었다. 하지만 기대에 가득 찬 표정으로 저를 보고 있는 알렉을 보자, 뭐라도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공작님이 다치지 않고 시합을 끝냈으면 좋겠다고 전해 주겠어?”
로엔의 대답에 알렉은 기다렸던 말이었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평소보다 더 열정적으로 말했다.
“공작님께서 주인님을 걱정하더라고, 그렇게 꼭 전해 드리겠습니다.”
알렉이 공순한 태도로 예를 갖춘 뒤 자릴 떴다. 로엔은 조금 전까지 알렉이 서 있던 곳을 응시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결승전에 로이슈덴 공작과 캐슬리우스 백작이 붙게 될 거라니.
‘설마 황제가 일부러 이런 대진표를 짠 건가?’
지나친 억측일 수도 있었지만, 만약 캠벨 후작가의 가든파티에서 있었던 에드윈의 계획이 귀족들에게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치정 싸움이라고 이상한 소문이 나는 건 아니겠지?’
지나친 기우일 수도 있었지만, 사교계란 곳은 아니 땐 굴뚝에서도 연기가 나는 곳이었다.
특히 괴물 공작인 저를 두고 치정 싸움이라니.
저는 둘째 치더라도 진 로이슈덴과 에드워드 캐슬리우스 두 사람이 웃음거리가 될 수 있었다.
“미치겠네.”
“괜찮으십니까?”
라이칸의 목소리에 로엔이 고갤 들었다. 그제야 제가 속으로 생각했던 것을 입 밖으로 말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 괜찮아. 그냥 생각 좀 하느라.”
로엔은 에드윈이 앉아 있는 특별관람석 쪽으로 고갤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저를 보고 있던 에드윈과 시선이 마주쳤다. 알렉이 대진표를 건네고 간 걸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부우우웅―
검술 시합의 본선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날카롭게 쏘아보던 에드윈이 고갤 돌렸다. 그의 시선에서 벗어나 다행이긴 했지만, 그의 행동이 자꾸만 신경이 거슬렸다.
“라이칸, 공작새의 눈물을 가져왔었나?”
“아니요. 세실 말이 요즘 상태가 좋아지셔서 특별히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기에. 죄송합니다. 혹시 몸이 좋지 않으시면…….”
“내가 아니라 어쩌면 다른 사람이 필요할 것 같아서.”
알렉이 공작새의 눈물을 챙겼길 바라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사람을 시켜 가져오게 할까요?”
“아니야. 다른 사람을 보내는 것보단 네가 가서 가져오는 게 좋겠어.”
“제가 가면 공작님은 혼자 계셔야 합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라이칸은 로엔이 걱정이 된다는 듯 다시 한 번 되물었다.
“잠깐이잖아. 그리고 오늘은 건국기념일이야. 암살자들도 폐하의 신경을 거슬리려 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믿고 맡길 사람이 너밖에 없어서 그래.”
마지막 말에 가파르게 치켜 올라갔던 라이칸의 눈썹이 제자리를 찾았다.
“알겠습니다. 가능한 한 이곳을 벗어나지 마십시오.”
“걱정 마. 여기서 한 발작도 벗어나지 않을 테니까.”
로엔의 약속을 듣고서야 라이칸은 자릴 떴다. 혼자 남겨진 로엔은 경계하듯 주위를 살폈다. 위험이 감지되진 않았지만, 조금 전 제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다.
‘진 로이슈덴 때문에 라이칸을 보내다니.’
로엔은 납득이 되지 않는 제 행동을 애써 무시한 채, 검술 시합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 *
본선 순서를 기다리며 검을 손질하던 진이 눈을 가늘게 뜨곤 알렉을 응시했다.
“지금 뭐라고 했지? 록스버그 공작이 내게 뭘 전하라고 했다고?”
본선 대진표를 보고 오겠다며 막사를 나갔던 알렉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돌아와 한다는 말이 뜻밖에도 록스버그 공작에 대한 얘기였다.
“공작님께서 주인님을 걱정하고 계시다고 말했습니다. 시합이 끝날 때까지 다치지 말았으면 한다고 하셨거든요.”
“정말 공작이 그런 말을 했다고? 다치지 말라고?”
“네.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알렉의 단호한 말투에 치켜 올라갔던 진의 눈썹이 제자릴 찾았다. 삐딱하게 올라갔던 입꼬리도 나른하게 풀리며 슬쩍 호를 그리는 것처럼 보였다.
“걱정할 게 뭐 있다고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군. 내 실력이면 타란 대륙에서 대적할 자가 하나도 없는데 말이야.”
관심 없는 척 말하고 있었지만 평소 날카롭던 진의 눈매 역시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막말로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공작님께서도 똑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주인님이 타란 대륙에서 최고라고요.”
“허음, 흠, 흠. 정말 그런 말을 했다고?”
진의 입술 새로 바람 빠지는 이상한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감정을 추스르듯 목을 가다듬었다.
“네,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뭐, 사실이긴 하지. 내가 좀 검을 잘 다루는 건 사실이니까.”
알렉이 평소와 다른 진의 반응에 눈을 가늘게 떴다. 평소 잘 웃지도 않지만 칭찬을 받았다고 아이처럼 들뜬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그런데 록스버그 공작에 대해 얘기하면 할수록 무표정하던 얼굴에 균열이 일며, 자꾸만 입매가 허물어졌다. 머리카락 사이로 삐죽 나와 있는 귀도 붉었다.
‘설마 주인님이 부끄러워하시는 건가?’
믿기지가 않았다. 지금까지 그가 부끄럽다든가 쑥스러워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생각해 보면, 제 주인은 어렸을 때부터 감정 표현에 굉장히 인색했다. 특히 드래건의 심장을 삼킨 후론 심장이 얼어붙은 것처럼 냉정했다.
그런데 서늘하던 얼굴이 허물어지는 모습을 보자, 울컥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우리 주인님께서도 드디어…….’
알렉이 혼자 감상에 빠져 있는 사이, 진이 불쑥 물어 왔다.
“혹시 난처한 일을 당하진 않았고?”
남들이 들으면 뜬금없어 할 질문이었다. 하지만 알렉은 진이 무얼 묻고 있는지 바로 이해했다.
“제가 공작님께 대진표를 드리기 전에 잠깐 불편한 상황이 있긴 했습니다.”
진이 고갤 들었다. 조금 전까지 부드럽게 풀려 있던 그의 얼굴에 어느새 서늘한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