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공작님, 여기서 뵙는군요. 발목은 좀 괜찮으세요?”
당연히 에드윈이 먼저 말을 걸 것이라 여겼는데, 그리젤라가 로엔을 발견하곤 기쁜 듯 말을 건네 왔다.
“걱정해 주신 덕분에 괜찮아졌답니다, 레이디 그리젤라. 폐하를 뵙습니다.”
그리젤라의 물음에 대답하곤, 옆에 서 있는 에드윈에게 예를 갖췄다.
“발목을 다쳤다고?”
에드윈이 관심을 내비쳤다. 그의 시선이 검은 드레스 아래 감춰진 로엔의 발목에 닿는가 싶더니, 이내 입가가 비릿하게 비틀렸다. 마치 거짓말이란 걸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거짓말이라도 어쩌겠어? 직접 확인하지도 못할 텐데.
로엔은 뻔뻔하게 나가는 쪽을 택했다.
“다행이군. 두 팔에 안겨서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걷지도 못하는 건 아닌지 걱정했었는데.”
진에게 안긴 채 여름 별장을 떠난 것을 두고 비꼬고 있었다.
“걱정해 주신 덕분에 회복이 빨랐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보내 주신 선물도 잘 받았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감사합니다, 폐하.”
로엔이 의례적인 태도로 에드윈을 향해 감사 인사를 했다.
“그대와 나 사이에 새삼스럽게 감사 인사는. 그건 겉치레는 필요 없고, 성년 의식은 어땠지? 타라 여신의 축복은 받았나?”
에드윈 역시 가식을 떨어 가며 사람 좋은 얼굴을 했다.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기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라이칸 제외하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듯했다.
에드윈이 로엔에게 성년을 축하하는 선물을 보냈다고 하자, 그리젤라를 비롯한 귀족들이 황제가 록스버그 공작을 굉장히 신뢰하고 있다고 오해하는 것 같았으니까.
“덕분에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타라의 연도 받았겠군. 혹시 볼 수 있을까?”
타라의 연을 보여 달라는 말에 귀족들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일반적으로 타라의 연은 결혼을 상징하는 표식이었기 때문에 반려가 아니면 보여 달라 요청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걸 다 알면서도, 에드윈이 뻔뻔하게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폐하, 타라의 연은 함부로 보여 줄 수 없는 걸로 압니다. 그게 폐하라 해도 예외가 아닌 줄 알고요.”
다행히 옆에 서 있던 그리젤라가 로엔을 대신해 대답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긴 했지만 그리젤라를 바라보는 에드윈이 눈빛이 불쾌한 듯 찌푸려지는 게 보였다.
“아, 그랬었나? 내가 잠시 잊고 있었군, 그리젤라.”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그리젤라는 에드윈의 말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록스버그 공작, 내가 무례를 범했다면 사과하지.”
삐딱하게 비틀린 입매며 서늘한 말투가, 사과가 아니라 오히려 불쾌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약혼녀인 그리젤라가 중간에 끼어들어서 망정이지, 만약 로엔이 똑같은 말을 했더라면 불복종으로 감옥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아닙니다, 폐하. 아드리안 제국의 관습법상 반려가 아닌 사람에게 보여 줄 수 없어 죄송할 따름입니다.”
로엔은 그의 도발에 넘어가는 대신 누구나 수긍할 법한 정석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에드윈 역시 트집을 잡을 수 없어서인지 미간만 찌푸릴 뿐이었다.
그러다 뭔가 생각난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새로운 시비거릴 들이밀었다.
“그래. 그럼 그대가 가져왔다는 티핏은 볼 수 있겠지?”
“……”
“왜? 그것도 관습법에 저촉되는 위법 행위인가?”
에드윈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어디 해볼 테면 해보란 뜻이었다.
로엔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터무니없는 헛소문에 어이가 없어서였다.
로엔은 티핏을 요구하는 에드윈을 향해 평소의 냉정함을 감추고는 유감을 가득 담은 연극조로 대응했다.
“아닙니다, 폐하. 다만 어떤 소문을 들으셨는지 알지 못하지만 티핏은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보여 드릴 수도 없습니다.”
난감한 듯 어깨까지 떠는 모습은 거짓에서 나온 행동 같지는 않았다. 그녀의 대답에 순식간에 주변이 찬물을 끼얹은 듯 정적이 흘렀다. 그들의 침묵에서 로엔이 티핏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가정은 전혀 없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준비하지 않길 잘했어.’
로엔은 할 말을 잃은 귀족들을 보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 하하. 정말 흥미롭군. 소문이 틀릴 수도 있다니.”
당연히 사교계의 소문 중 80%이상이 거짓이란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데 황제인 에드윈이 그런 말을 하다니. 아주 웃기는 일이었다.
“록스버그 공작님, 혹시 모르시고 계신 건 아니시죠? 오늘 검술 시합에 로이슈덴 공작님이 출전한다는 사실을요.”
아니라고 말했는데도 그리젤라는 여전히 믿기 힘든 모양이었다. 그래서 재차 확인까지 하는 그리젤라를 보며 로엔이 고갤 끄덕였다.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 예선전을 치르던 로이슈덴 공작님의 모습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고요.”
다 알고도 티핏은 준비하지 않았으니, 더는 귀찮게 묻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왜지? 나는 듣고도 사실 이해가 되지 않는군. 그대가 ‘최고의 레이디’가 될 수 있는 기회인데, 그걸 마다하다니. 혹시 그대는 진이 우승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가벼운 말투로 농담을 던지듯 말하고 있었지만, 에드윈의 눈빛은 차갑기 짝이 없었다.
속내가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그 순간 이것이야말로 에드윈이 자신을 모욕하기 위해 던진 질문이란 걸 알아차렸다.
모순, 한마디로 창과 방패와 같은 상황이었다.
만약 이 자리에서 그렇다고 인정하면 로이슈덴 공작을 모욕하는 일이었고,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면 스스로가 가치 없는 존재라는 걸 인정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로엔은 고민할 것도 없이 통상적인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로이슈덴 공작님께서 실력이 있으시다면 당연히 우승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로엔의 대답에 에드윈이 잔혹하게 웃었다.
“그럼 자신이 없는 모양이군. 진 로이슈덴이 우승을 해도, 그대에게 승자의 예를 표할 것이란 보장이 없을 테니까. 혹시 스스로 최고의 레이디가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건가?”
명백하게 모욕을 주기 위한 말이었다. 사교계에 떠도는 소문처럼 진 로이슈덴이 록스버그의 돈에 팔려 결혼을 할지언정, 절대 괴물 공작에게 진심일 리 없으니 정신 차리라는 경고이기도 했다.
‘이젠 나를 대놓고 적으로 간주하려는 건가?’
로엔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가 한 모욕보다 더 문제가 되는 건, 귀족들 앞에서 에드윈이 록스버그 공작을 내치려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귀족들 중 에드윈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는 없었다. 황제가 록스버그 공작에게 등을 돌리자, 기다렸다는 듯 귀족들의 입가에 비웃음이 서렸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그가 가진 패를 보일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아마 제가 한 말이 그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다. 이성을 잃고 감정적으로 부딪쳐 오는 걸 보면.
로엔은 귀족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허릴 곧게 폈다.
에드윈과 저를 둘러싼 침묵이란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여기서 로엔이 말 한 마디라도 잘못 뱉어 낸다면, 꼬일 대로 꼬인 성격인 에드윈이 어떻게 나올지 장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젠 존더부르크 황실도 그 명맥이 다한 건가? 더는 황제에게 존더부르크의 피가 갖는 존엄성과 위엄이 느껴지지 않는데.’
그 순간 로엔의 머릿속에 진 로이슈덴이 떠올랐다.
황제보다 더 황제 같은 존재. 그리고 라딘의 서에서 언급되었던, 드래건의 심장을 삼키고도 살아남은 예언의 존재이기도 했다.
‘정말 진 로이슈덴이…….’
로엔은 등줄기에 솟아난 오싹한 전율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곤 서둘러 감정을 갈무리하곤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로엔 역시도 순순히 인정했다. 그제야 에드윈도 로엔의 대답이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아직 그대가 선택을 번복할 이성이 남아 있다니 다행이군.”
“하지만 폐하. 전 최고의 레이디가 되는 것보단 아드리안 제국의 ‘꺾이지 않는 펜’으로 불리길 원합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에드윈이 눈을 가늘게 뜨고 로엔을 노려보았다.
“제가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계시는 분들 모두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잊고 계시는 모양이네요. 작년에 검술 시합에서 승리한 사람이 누군지 말입니다.”
로엔의 말이 갖는 파문은 컸다. 순식간에 귀족들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오르더니, 작년 우승자를 기억해 내려 애쓰는 게 보였다.
“당연히 작년에 우승한 자는…….”
순간 에드윈이 뭔가를 깨달은 듯 표정을 굳혔다. 그리곤 불쾌한 듯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그리젤라가 그의 반응을 이상했는지 고갤 갸웃거렸다.
그리젤라는 작년에 황후 후보로 거론돼 건국기념일 파티 준비를 하느라 검술 시합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래서 우승자가 누군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폐하, 작년에 우승하신 기사가 누군데 그러세요? 제가 모르는 분인가요?”
그리젤라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에드윈은 입을 열지 않았다. 화가 난 듯 로엔을 노려보고 있는 에드윈을 보며, 귀족들 역시 고갤 갸웃거렸다.
“누구였죠?”
“그러게요. 기억이 나지 않네요. 검은 옷을 입……. 잠깐, 말도 안 돼.”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귀족 하나가 뭔가 생각이 난 듯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경악에 가까운 표정으로 로엔 쪽을 흘끗거렸다.
“왜요? 대체 누구였기에 생각해 내자마자 그런 표정인데요?”
귀족의 태도에 호기심이 발동한 귀족들이 대체 누구냐며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다. 로엔은 귀족들의 수군거림에 비웃음을 삼켰다.
그렇게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힐 만큼 존재감이 없었던가?
“그게, 그러니까…….”
“여기 계시는 록스버그 공작님이십니다.”
귀족이 머뭇거리자 라이칸이 황제를 비롯해 그곳에 있는 귀족들이 다 들을 수 있도록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