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같은 시각, 로엔은 관람석 중 지정된 좌석에 앉아 라이칸과 함께 검술 시합의 대진표를 살펴보는 중이었다.
“로이슈덴 공작님이 예선전에 출전하시는 모양입니다.”
검술 시합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대진표를 공개하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모양이다.
로엔은 본선 진출자 명단을 훑다가 눈에 띄는 이름을 발견하곤 눈살을 찌푸렸다. 본선 진출자 명단에 에드워드 캐슬리우스 백작이 있어서다.
똑같이 검술 시합엔 처음 출전하는 건데, 대놓고 차별을 하고 있었다.
이것 하나만으로 에드워드 캐슬리우스 백작은 황제 쪽 사람이란 방증이기도 했다. 또한 에드워드의 동의 여부는 더는 중요하지도 않다는 뜻이기도 하고.
“폐하께서도 동의한 일이라고?”
베일 안에서 로엔의 입매가 냉소로 비틀렸다.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로이슈덴 공작가 쪽에선 아무런 말도 없고?”
“집사가 대진표를 받아 갔지만 별 불만은 없는 것 같습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로엔은 들고 있던 대진표를 내려놓았다.
진 로이슈덴 역시도 대진표를 받았을 때, 이번 시합이 그에게 불공평하다는 사실을 알았을 터다. 그런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건 에드윈이 어떤 술수를 쓰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아니면, 출전하기 전부터 이렇게 될 줄 이미 알고 있었거나.
‘황제씩이나 되어서는 정말 치사하다니까.’
로엔이 혀를 끌끌 차자, 라이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로엔을 보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야. 문제가 있는 줄 알았더니, 대진표상으론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아서. 좀 치사하긴 하지만.”
오히려 길게 봤을 때, 진에겐 이 대진표가 이득인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우승은 진 로이슈덴이 할 테고, 예선전까지 정당하게 치르고 올라간 그를 두고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진 못할 테니까.
“그럼 다행인 것 아닙니까? 목숨이 위험한 것보단 치사한 쪽이 감내하기 쉬울 테니까요.”
라이칸 역시 대진표가 진에게 불리하게 짜여졌다는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다.
“그렇지.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굴었나 봐.”
누구보다 건국제를 성황리에 끝마치고 싶은 사람이 에드윈일 테니, 건국제 기간 동안엔 불미스러운 일을 일으키진 않을 터였다.
“걱정이 되신다면 제가 가서 잠시 살피고 올까요?”
라이칸의 말에 잠깐 솔깃했다. 보는 눈이 있어서 직접 로이슈덴 공작가의 막사로 가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나 라이칸이 가서 동태를 살피고 온다면…….
“아니야. 굳이 그럴 필욘 없을 것 같아.”
로엔이 고갤 가로저었다. 그리곤 시합이 열리는 경기장으로 고갤 돌렸다.
“이제 곧 예선전이 시작될 테니까.”
예선전에 출전한 진을 직접 보고 눈으로 확인하면 될 일이었다. 로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른 관중석 쪽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예선전이 바로 치러지려는지 목검을 든 참가자들 역시 하나둘 경기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저기, 로이슈덴 공작님이세요.”
흥분에 찬 목소리가 들린 순간, 관람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향했다.
로엔 역시 고갤 돌려 진을 보았다. 그러다 그가 입고 있는 검무복을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하필 검정색이라니.’
화려하게 입은 백여 명의 기사들 사이에서 검은색 검무복 차림의 진은 단연 눈에 띄는 모습이었다.
“토너먼트 방식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남은 다섯 명만 본선에 진출하게 된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라이칸의 대답에 로엔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히 진이 이길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다. 하지만 만에 하나 예선전에 출전한 이들이 에드윈이 사주해 참가한 자들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말 그대로 99대 1로 싸워야 할 판이었다.
“미친. 다시 생각해도 정말 치사하네.”
꾹꾹 삼키려 해도 욕설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라이칸이 놀라 로엔 쪽으로 고갤 돌린 순간, 예선전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로엔의 예상대로 경기장 안에 있던 참가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진을 향해 목검을 치켜들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예선전이라지만 마치 검술 시합이 아니라 무작정 달려드는 무뢰배들의 막장 싸움판 같았다.
그때 퍽, 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저만치 날아가 바닥에 쓰러졌다. 진이 휘두른 목검에 맞고 넘어진 것이다.
그것을 시작으로 한꺼번에 달려들던 자들이 차례차례 쓰러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고통에 겨운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보고도 믿을 수가 없잖아. 원체 대단한 줄은 알았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
순식간에 벌어진 믿기 힘든 광경에 로엔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제국민들 역시 로엔과 같은 생각인 듯 입을 벌린 채 다물 줄을 몰랐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이 추세로 보면 10분도 안 돼 예선전이 끝날 것 같으니까.”
하지만 말과는 달리 로엔의 시선은 진의 움직임을 따라 집요하게 움직였다. 필사적으로 공격하는 참가자들에 비해 진의 움직임은 가벼웠다. 어른과 어린아이의 싸움처럼 싱겁기까지 했다.
“역시 로이슈덴 공작님이시네요.”
“제 말이요. 처음엔 중구난방으로 공작님께 달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지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별것도 아니었어요. 괜히 쫄았네.”
“내기 돈을 잃을까 봐요?”
“당연한 것 아닌가요? 내가 공작님에게 돈을 얼마나 걸었는데.”
남자가 진심으로 안도하는 소리에 옆에 앉아 있는 남자가 쿡쿡대며 웃었다.
“지금 상태라면 우승은 당연히 로이슈덴 공작님이 차지하겠군요. 돈을 잃진 않겠어요.”
“그래도 본선 진출자들의 실력도 만만치 않다니까 끝까지 지켜봐야죠.”
“그러고 보니 작년 우승자가 어느 가문이었죠?”
“그러게요. 어느 가문이었지? 이상하게 기억이 잘 나지 않는군요.”
남자가 고갤 갸웃거리며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기억이 안 날 정도면 신경을 쓸 만큼 중요한 가문은 아니었던 거겠죠. 그나저나 올해 록스버그 공작가는 출전하지 않는 모양이네요.”
대화를 하던 귀족들 중 한 명이 로엔이 앉아 있는 쪽을 흘끗거렸다. 그러다 로엔의 뒤에 서 있던 라이칸과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며 고갤 돌리는 게 보였다. 몸을 숨기려는 듯 고갤 파묻는 꼴이 사냥꾼을 피해 눈밭에 머리만 처박은 꿩 같았다.
“그런데 그 소문 들으셨어요?”
호기심을 한껏 불러일으키는 의미심장한 질문에 예선전을 관람하던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귀족에게 향했다.
사람들 사이에 가려 보이지 않았었는데, 자세히 보니 캔싱턴 백작이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캐서린과 그 무리들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쳇, 또 어떤 말을 하려고 저렇게 의미심장하게 운을 띄우는 건지.’
로엔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갤 가로저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뻔히 보이는 일에도 미끼를 덥석 무는 게 귀족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 귀족이 호기심을 잔뜩 드러내며 캔싱턴 백작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무슨 소문이요?”
“누가 그러는데, 록스버그 공작님이 티핏을 준비해 온 걸 봤다더군요.”
캔싱턴 백작은 기다렸다는 듯 어처구니없는 말들을 쏟아 냈다.
“티핏이요? 설마 우리가 아는 그것 말인가요?”
“네. 우승자에게 줄 그것 말이에요.”
캔싱턴 백작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확인 사살까지 하자, 귀족들은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곁눈질로 뒤쪽에 앉아 있는 로엔을 흘끗거리기 시작했다.
로엔은 귀족들의 시선에 의연하게 대처했다.
이건 귓속말이 아니었다. 어쩜 그렇게 비밀스러워야 할 뒷담화를 대놓고 앞에서 시전하시는지. 정말 그것도 큰 능력인 듯했다.
그러다 로엔과 눈이 마주치자 귀족들이 헛기침을 하며 재빨리 고갤 돌리는 게 보였다. 특별할 것도 없는 풍경이었지만 오늘따라 그들의 행동이 유독 신경이 거슬렸다.
“설마 로이슈덴 공작님이 승자의 예를 취할까요? 그것도 저 괴물…….”
뒷말은 입속에서 뭉개져 자세히 들리지 않았지만, 괴물 공작이라고 했을 게 분명했다.
“지금은 지켜봐야죠. 뭐가 진실인지.”
“하지만 캠벨 후작가의 가든파티에서…….”
또다시 주위를 의식하듯 목소리가 작아졌다.
“폐하께선 인정하지 않으신 거잖아요. 그래서 캐슬리우스 백작님을…….”
예상대로 뒷말은 묵음 처리가 됐다. 로엔은 지금까지 들었던 말을 종합해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황제가 캐슬리우스 백작을 제게 소개한 것까지 소문으로 돌다니. 사교계의 소문은 빛보다 빠르다는 말이 맞는 듯했다.
부우웅!
그 순간 예선전의 끝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수군대던 귀족들의 시선이 경기장으로 향했다. 경기장 안엔 놀랍게도 진 로이슈덴을 제외한 참가자들이 전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로이슈덴 공작님이 예선전에서 승리하셨네요. 그런데 본선 진출자가 다섯 명 아니었나요?”
“그렇긴 한데, 한 명만 본선에 올라갈 것 같군요. 저 상태론 올라갈 수도 없을 테니 말입니다.”
뒤따르는 웃음소리에 쓰러져 있는 참가자들에 대한 명백한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진 로이슈덴 공작을 바라보는 눈빛엔 경외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본선은 언제 시작할까요?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군요.”
“그야 폐하께서 오셔야……. 어, 저기 오시네요.”
에드윈을 발견한 귀족들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기 시작했다. 로엔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에드윈을 향해 고갤 숙였다.
“폐하께서 이쪽으로 오고 계십니다.”
라이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로엔은 놀라지 않았다. 에드윈이 특별관람석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저에게 다가올 것을 미리 알고 있어서였다.
캠벨 후작가에서 있었던 일이 사교계에 퍼진 이상, 에드윈 역시 그 소문에 대해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제 계획이 어그러진 것에 대해 대놓고 불쾌감을 드러낼 게 뻔했다.
‘모욕을 주려나? 아니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벌을 내릴까?’
뭐가 되었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한 번은 겪고 넘어가야 할 장애물일 뿐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