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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91화 (92/201)

91화

“티핏? 그게 뭔데?”

생경한 단어에 진이 그게 뭐냐고 묻자, 세이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 몰라서 묻느냐는 얼굴이다.

“진짜 몰라? 나도 알고 있는데, 대장이 모른다고?”

세이지의 반응에 진이 인상을 썼다.

“그걸 꼭 내가 알아야 되는 건가?”

“당연히 알아야지. 검술 시합에서 우승한 사람이 승자의 예를 취한 뒤에 그 티핏이란 걸 받아야 하는 거니까.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대장이 그 티핏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라고.”

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승자의 예라면 당연히 알고 있다. 세이지의 말처럼 시합에서 우승한 기사가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레이디에게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는 의식이었으니까.

처음엔 우승한 기사들이 황후에게 승자의 예를 취하는 게 관례였지만, 언제부터인지 기사가 레이디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으로 변질돼 유흥거리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걸 제가 해야 한다니.

“그런 것이라면 상관없어. 어차피 승리해도 승자의 예를 갖출 여인도 없으니까.”

“그거야 대장 생각이지.”

세이지가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며, 혀를 끌끌 찼다.

“그럼 나더러 사람들 앞에서 그런 광대 짓을 하란 거야?”

“당연히 해야지. 록스버그 공작님이 티핏을 준비해 왔다잖아.”

“그게 지금 나와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군.”

진이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세이지를 봤다. 그러자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며 세이지가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장이 며칠 전에 있었던 캠벨 후작가의 가든파티에도 갔다며.”

“갔었지.”

진이 순순히 인정했다.

“가서 발목을 다친 공작을 번쩍 안아 들고 내 것이라고 광고까지 한 것도 기억나지? 아니다. 그것도 모자라 사람들 눈은 신경도 쓰지 않고 애지중지하며 집까지 바래다줬다며. 그런데도 상관없다는 거야? 그런 민망한 짓까지 해 놓고?”

세이지의 지적에 진의 표정이 굳어졌다. 사교계의 소문에 어두운 세이지까지 그날을 일을 알 정도면, 사교계의 모든 인사들이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제길!

사교계란 곳은 정말 상상 이상인 것 같았다.

“그건…….”

뭔가 말하려던 진이 입을 다물었다. 가든파티에서야 몇 명밖에 없어서 그런 낯 뜨겁고 한심한 짓을 할 수 있었지만, 오늘은 제국민들이 모두 모이는 검술 시합장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그런 광대 짓 하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아무리 로엔의 장단에 맞춰 놀아나 주겠다고 약속하긴 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파티나 무도회에 참석해 적당히 어울려 주는 것이라면 모를까.

“그럼 미리 가서 달라고 해. 대장은 지금 사람들 앞에서 광대 짓하기 싫어서 그러는 거잖아. 먼저 만나서 티핏을 받고, 그걸 검에 달고 결승전에 출전하면 되는 거잖아.”

평소와 달리 적극적으로 설득하는 세이지를 보며 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너, 다른 속셈이 있는 거면…….”

“속셈은 무슨. 어차피 록스버그 공작과 결혼할 생각인 거잖아. 내 말이 틀려?”

세이지가 확신에 찬 얼굴로 진을 보았다. 록스버그 공작과 결혼한다는 사실은 알렉에게 밖에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세이지는 벌써 제 계획을 눈치챈 것 같았다.

“내 생각이 맞네.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는 걸 보니.”

진의 침묵을 긍정이라고 생각한 세이지가 믿기지 않는 듯 웃고 있었다. 그리곤 질책하듯 잔뜩 인상을 쓰며 충고하기 시작했다.

“그럼 더 해야지. 대장의 신부가 될 사람인데, 사람들 앞에서 웃음거리가 되는 걸 지켜보기만 할 거야? 그리고 그 사람인 거잖아. 대장이 지금껏 정절을 지켜 온 그 사람.”

그 사람?

처음엔 세이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 과거에 전쟁터에서의 장면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그날은 전쟁터에서 죽다 살아난, 여느 날과 다를 것도 없는 그런 날이었다. 전쟁은 시간이 갈수록 최악의 순간을 향해 치닫고 있었고, 죽음은 항상 그들 목을 겨누고 있었다.

그날따라 세이지는 밀려드는 적국의 기사들과 싸우느라 지쳐 있었다. 그리고 아차, 하는 순간 적국의 기사가 들고 있던 검이 세이지를 향해 날아들었다.

평소라면 아무리 지쳐 있어도 기사의 검날을 피했을 테지만, 세이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치 심판이라도 받는 듯 아무런 반격도 하지 않은 채 죽음을 맞이하려 했었다.

하지만 검이 그의 심장을 관통하기 직전, 진이 그를 지옥 앞에서 끄집어 냈다.

「왜 살렸어? 일부러 죽으려한 건데, 왜 그랬어. 하나도 고맙지 않은데.」

저를 살려 준 사람에게 할 말은 전혀 아니었다. 거기다 고맙지 않다고, 원망을 듣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결국 진 역시도 말이 곱지 않게 나갔다.

「죽고 싶으면 내 옆에서 청승 떨지 말고 멀리 떨어져. 네 피가 내 얼굴에 튀는 건 딱 질색이니까.」

사실 따지고 보면 딱히 고맙다는 말을 듣기 위해 세이지를 살린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심술궂게 뱉어 낸 말처럼 피가 튀는 게 귀찮아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세이지의 표정이, 죽음 앞에서 모든 걸 놓고 편안해 보이는 그 얼굴이 진을 움직이게 했다. 그 순간 세이지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저와 너무도 닮아 있었던 것이다.

세이지는 제 대답에 즐거운 듯 웃음을 터뜨렸다. 전쟁터 한복판에서 웃는 그는 광기에 사로잡힌 듯 괴이했다. 미친놈 같았다.

그날부터였던 것 같다. 세이지가 진의 구박에도 줄기차게 그를 따르기 시작한 것은.

그러던 어느 날, 세이지가 물었었다.

사랑하는 여인이 있느냐고. 자신은 있었다고.

그리고 진이 세이지를 살린 그날 아침, 그 여인이 모시던 귀족에게 맞아 죽었다는 편지를 받았다는 말을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혹시 자신처럼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는 이유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정절을 지키는 거냐고 물었다.

그런 황당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다니. 진짜 미친놈이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 대답하지 않은 것뿐이었다. 자신은 세이지처럼 사랑하는 여인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거창하게 정절을 지키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후손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드래건의 심장을 삼킨 제 거지 같은 운명을 제 혈족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다.

그런데 그날 이후 진이 파렐 수도원의 수도사보다 더 금욕적으로 정절을 지키는 건 사랑하는 여인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설마 그 소문을 아직까지 믿고 있었다는 건가? 그리고 그 소문의 여인이 록스버그 공작이라고?’

대체 어떤 뇌를 가졌으면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되는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날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하지 않는 자신의 입을 꿰매 버리고 싶었다.

“지금 무슨, 그때 일은…….”

“알아. 대장이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지 충분히 이해해. 대장이 마음에 품고 있는 여인이 괴물 공작이었으니 그럴 만하지. 사실 라우렐이 그랬거든. 귀족이 사랑 때문에 가문의 명예와 평판을 버리는 건 목숨을 내던지는 것과 같다고.”

이건 또 무슨 참신한 개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세이지는 진의 표정 변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제 감정에 사로잡혀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 없잖아. 그리고 록스버그 공작은 대장보다 훨씬 용기 있는 사람이고. 그래서 먼저 공개 구혼도 한 것 아냐? 그러니 이제 대장도 용기를 내야지.”

갈수록 가관이었다. 진은 세이지가 뱉어 내는 헛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머리를 갈라서 그의 뇌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확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장, 제발!”

진은 세이지에게 그런 게 아니라고, 그런 여인 따윈 애초부터 없었다고 말하려다 그만뒀다. 지금 여기서 그와 실랑이를 시작했다간, 검술 시합이 시작도 되기 전에 기가 다 빨릴 것 같아서였다.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고 수십 명과 전투를 치른 것처럼 피곤했다.

“할 일 다 했으면 이제 꺼져.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진이 축객령을 내렸다.

“그래, 잘 생각했어. 꼭 가서 티핏을 받아 와. 사랑은 가문의 명예보다 더 위대한 거니까.”

‘이런, 미친! 끝까지…….’ 진은 굳은 표정으로 욕설을 삼켰다.

“꺼져. 죽고 싶지 않으면.”

맹수가 으르렁거리듯 낮게 을러대자, 세이지가 재빨리 막사를 나갔다.

“나는 밖에서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 천천히 와.”

막사 밖에서 들려온 세이지의 목소리에 ‘제길!’ 하고 욕설이 흘러나왔다. 세이지에게 느끼는 분노를 예선전에서 뿜어내면, 단숨에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아.”

진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예선 시합에 참가하려면 지금 움직여야 하는 게 맞았지만, 그의 머릿속은 세이지가 말한 승자의 예로 가득 차 있었다.

“진짜 미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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