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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90화 (91/201)

90화

“창문을 닫을까요?”

로엔의 변화를 눈치챈 라이칸이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괜찮아. 경기장까지 얼마 남지 않았잖아. 답답하기도 하고.”

로엔은 창문을 닫는 대신 지나가는 인파를 구경했다. 대부분의 제국민들은 록스버그 공작가의 마차가 지나가자 옆으로 비켜섰다. 그리고 어김없이 호기심 어린 눈빛이 따라붙었다.

“저들도 내게 내기를 걸었을까?”

“그게 무슨…….”

“제국민들 중에서 내가 로이슈덴 공작에게 공개 구혼 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 같아? 아마 없을걸? 그러니 당연히 내기에 돈을 걸지 않았겠어? 검술 시합의 우승자에게 돈을 걸듯이 말이야.”

로엔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고 있었지만, 라이칸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가 아드리안 제국을 떠나 있는 사이 제 주인이 제국민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다는 사실이 마음이 들지 않아서였다.

그것이 아무리 제 주인의 선택에서 비롯된 일일지라도 불쾌한 건 마찬가지였다. 당장에라도 제 주인에게 불경한 눈빛과 말을 뱉어 내는 자들의 목을 치고 싶을 정도였다.

라이칸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엔은 검은 베일 속에서 미소를 지었다.

“그러지 말고, 나도 돈을 좀 걸어 볼까? 나는 이미 결과를 알고 있으니 어마어마한 돈을 벌게 될 거잖아. 돈을 벌 기회를 놓치는 건 아쉽기도 하고.”

“그러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창밖을 보던 로엔이 라이칸 쪽으로 고갤 돌렸다. 그제야 심각한 얼굴로 맞은편에 앉아 있는 라이칸이 눈이 들어왔다.

“왜 또 그렇게 심각한데? 웃으라고 농담한 건데.”

“저는 농담이라도 공작님께서 스스로를 낮추는 건 싫습니다. 제게 공작님은 그 어떤 분보다 가장 특별하고 뛰어난 존재시니까요.”

“폐하보다 더?”

로엔의 입가가 장난스러운 듯 호를 그렸다. 하지만 눈엔 웃음기가 전혀 없이 냉정했다.

“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라이칸을 보며 로엔이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위험하잖아, 라이칸. 그건 반역이라고.”

“상관없습니다. 제 주인은 오직 공작님뿐이니까요. 그것이 반역이라면 달게 죄를 받을 생각입니다.”

라이칸의 진지한 태도에 로엔은 미소를 지웠다.

“알아. 네가 날 위해 뭐든 할 수 있다는 것쯤은. 하지만 라이칸.”

로엔이 라이칸을 불렀다. 그러자 그가 고갤 들어 로엔을 응시했다.

“위험한 행동은 하지 마. 특히 날 위해 죽지 마. 이건 명령이야.”

여기서 더 이상 제 사람을 잃는다면 가문의 저주를 푸는 것 따위, 더는 의미가 없을 듯했다. 소중한 제 사람도 지키지 못한다면 더는 저주를 풀 이유가 없었으니까.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네, 알고 있습니다.”

“나를 생각한다면 너를 소중히 해. 그것이 내가 원하는 거야.”

라이칸이 대답 대신 고갤 숙였다. 어깨까지 내려온 은발이 비좁은 마차 안에서 등불처럼 반짝였다.

“오늘이 처음으로 공식석상에서 로이슈덴 공작을 만나는 자리가 될 거야. 분명 귀족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기대하고 있을 거고.”

떠도는 소문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귀족들은 제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진 로이슈덴 공작이 괴물 공작에게 공개구혼을 거절함으로써 모욕을 주길 바랄 터였다.

“아무 일 없을 겁니다. 제가 곁에 있을 테니까요.”

“걱정 안 해. 네 말처럼 나에겐 네게 있으니까.”

언제 어느 때건 제 편인 라이칸, 그가 곁에 있었다. 로엔의 목소리는 당연한 소릴 한다는 듯 가벼웠다. 그 기분 좋은 울림에 굳어 있던 라이칸의 얼굴이 풀어지며 귓불에 붉은기가 감돌았다.

그때, 덜컹 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춰 섰다.

“공작님, 경기장에 도착했습니다.”

도착을 알리는 마부의 목소리에 로엔은 몸을 바로하곤 얼굴을 가린 베일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문을 열겠습니다.”

로엔이 허릴 세우고 나갈 채비를 마치자, 마부가 마차 문을 열었다. 서둘러 내린 라이칸이 로엔이 마차에서 내릴 수 있도록 도왔다.

“조심하십시오.”

라이칸이 휘청거리는 로엔의 팔을 붙잡았다.

“고마워, 라이칸.”

라이칸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려선 로엔은 저에게 쏟아지는 귀족들의 시선과 마주했다.

귀족들의 얼굴엔 노골적인 호기심이 드러나 있었다. 그들보다 신분이 높은 로엔에게 취해선 안 될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그들은 감출 생각도 없는 듯했다.

“비켜 주겠나? 공작님의 통행에 방해가 되는군.”

라이칸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귀족들을 향해 서늘한 경고를 날렸다. 그제야 귀족들이 떨떠름한 얼굴로 옆으로 물러서는 게 보였다.

역시 라이칸 러셀이었다. 로엔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라이칸과 함께 검술 시합장 안으로 들어섰다.

* * *

“이게 대장이 치러야 할 대진표 맞아? 이건 뭐, 어중이떠중이들하고 다 붙고 올라가야 할 판이잖아. 초장부터 힘을 빼 놓겠다는 불순한 의도가 아니면 이게 다 뭐냐고.”

예선전 대진표를 살펴보던 세이지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사실 세이지가 이 말도 안 되는 대진표를 본 순간 더 화가 났던 이유는 다른 귀족들은 예선전도 치르지 않고 본선에 진출했다는 사실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에드워드 캐슬리우스 백작이었다. 똑같이 5년 동안 전쟁터에서 뭐 빠지게 싸웠는데, 누구는 본선 진출이고 또 누구는 예선전에서 뺑이를 치라니.

전부터 귀족들이야 거들먹거리는 것밖엔 잘하는 게 없는 작자들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불공평하게 굴 줄은 몰랐다.

그것도 검술 실력으론 타란 대륙에서 당할 자가 없는 진 로이슈덴 공작을 상대로 말이다.

“상관없다. 누가와 대결하든, 또 몇 명과 싸우든 나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까.”

진의 무심한 말투에 세이지가 눈살을 찌푸렸다.

“당연히 상관은 없지. 대장 실력이야 천하무적이니까.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기분이 나쁘다는 거잖아. 감히 타란 대륙을 꿀꺽한 대장한테, 검술 시합에 참가한 적이 없어서 대장 실력을 검증할 수 없다는 게 말이 되냐고. 만약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미친 거지.”

진의 반응이 태연하면 할수록, 반대로 세이지는 제 일이라도 된 듯 더 흥분해서 날뛰었다.

“틀린 말도 아니데 흥분할 것 없다, 세이지. 그리고 폐하의 명이라고 하잖아.”

폐하라는 말에 세이지의 표정이 불퉁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다는 투였다.

“진짜 폐하와 사이가 안 좋은 거야? 라우렐이 그런 비슷한 말을 한 것 같긴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서. 두 사람 사촌이라며? 형제는 아니어도 유일한 혈육인데 척을 질 필욘 없잖아. 게다가 대장이 폐하께 해 준 게 얼만데. 정말 이러면 안 되지.”

그때까지 여유롭게 앉아 있던 진이 허릴 세웠다. 그리곤 표정까지 굳히곤 날 선 목소리로 경고했다.

“세이지, 입조심해. 여긴 전쟁터가 아니니, 입을 함부로 놀렸다간 반역죄로 목이 날아갈 수 있다는 것도 기억하고.”

“쳇, 이럴 줄 알았다면 칼라일에 돌아오는 게 아니었어. 그냥 난 전쟁터에 있는 편이 더 좋았다고.”

다행히 로이슈덴 공작가에 배정된 막사는 다른 귀족들의 막사와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거기다 세이지가 종자 역할을 하고 있어,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자가 아니라면 누구 하나 로이슈덴 공작가의 막사가 있는 쪽으로 눈길조차 주지 못할 터다다.

하지만 이곳은 수도 칼라일이었다. 전쟁터와는 달리 에드윈의 눈과 귀는 많았고, 언제든 두 사람의 대화가 그의 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알았어. 앞으론 조심할게.”

평소와 다른 진의 분위기에 세이지 역시 본능적으로 주위를 경계하듯 살폈다. 그리곤 재빨리 고갤 끄덕였다. 그제야 날이 서 있던 진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라우렐은 뭐 하고 네가 온 거지?”

사실 진이 종자를 부탁했던 사람은 세이지가 아니라, 라우렐이었다.

이미 기사 서임을 받아 황실 근위대의 대장을 맡고 있는 라우렐이 종자 역할을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로이슈덴 공작가엔 종자 역할을 맡길 만한 고용인이 없었다.

임시 종자라도 구하려 했지만 누구 하나 지원하는 자도 없었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라우렐에게 부탁했더니, 세이지를 보내온 것이다.

“폐하 옆에 있겠지. 어떻게 알았는지, 오늘은 폐하께서 황실 근위대에게 호위를 맡기셨든.”

세이지 역시 종자 따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왔다는 걸 강조했다. 그러다 진의 시선이 막사의 입구로 향하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누구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어?”

막사의 입구를 바라보던 진이 인상을 쓰며 세이지를 보았다. 지금까지 제 행동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대체 내가 누굴 기다린다는 건지 모르겠군.”

서늘한 목소리로 선을 긋자, 이내 당황한 세이지가 변명조로 말했다.

“아니,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했는데 대장이 자꾸 입구 쪽을 흘끗거렸잖아. 그래서 난 누가 오기로 약속이라도 한 줄 알았지.”

세이지의 지적에 그제야 진이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곤 제 행동을 깨달았는지 쓰게 웃었다. 뭔가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곧 예선전이 시작될 텐데, 알렉이 늦어지는 것 같아 쳐다본 것뿐이야.”

진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세이지는 여전히 의구심을 떨쳐 낼 수 없었다.

초조하게 막사의 입구를 바라보던 진의 태도는 집사인 알렉을 기다리는 사무적인 게 아니었다. 막말로 연인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잔뜩 들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거기다 아직 예선전이 시작되려면 30분이나 더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은 언급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평소와 달리 거짓말까지 하는 것을 보니, 그 말까지 했다간 종자고 뭐고 막사에서 당장 쫓겨날 것 같아서였다.

“정말 그게 다야? 사실 여기 오기 전에 록스버그 공작가의 마차를 봤거든. 그리고 아주 흥미로운 소문도 들었고.”

하지만 그런 결심에도 불구하고 진을 놀릴 기회를 놓칠 세이지가 아니었다. 짐짓 모르는 척하며, 진의 속내를 떠보는 건 괜찮을 듯싶었다.

‘대답할 가치도 없는 소리니 무시하자.’

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경험상 세이지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면 무시하는 게 상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빌어먹게도 록스버그란 말에 다물어야 할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무슨 말을 들었는데?”

제가 던진 낚시 바늘에 진이 순순히 걸려들자, 세이지의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반짝였다.

“그러니까 록스버그 공작이 티핏을 가져왔다더라고. 검술 시합에 참가하는 기사에게 주려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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