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방으로 들어온 로엔은 코트를 벗은 후, 바로 욕실로 향했다. 입고 있던 드레스 앞섶의 단추를 풀어 가슴 부근을 확인했다.
새하얀 가슴 위에 붉은 피를 머금은 꽃이 피어 있었다.
당장에라도 누군가를 유혹할 듯 치명적인 향을 뿜어내며 고혹적인 빛을 발하는 모양새가 퍽 요사스러웠다.
혈독화를 바라보던 로엔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단추를 잠갔다. 다행히 걱정하던 일은 없는 듯했다.
욕실을 나온 로엔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조금 전 코트를 벗으면서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던 검은색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웬일로 편지를 다 보낸 거지?”
로엔은 테이블로 다가가 서랍 안에서 종이용 나이프를 꺼냈다. 그리곤 봉투의 끝을 잘라 내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종이가 잘려 나가는 소리가 평소보다 유난히 크게 들린다. 묘한 기대감에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봉투에서 편지를 꺼낸 로엔은 재빨리 내용을 확인했다.
【오늘 밤 자정, 은둔자의 숲.
-진 로이슈덴-】
로엔은 눈을 가늘게 뜨고 편지지에 쓰인 내용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대체 이게 무슨 뜻인지…….”
단순하게 보자면, 건국기념일 파티가 끝난 뒤 자정에 은둔자의 숲에서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축제가 열리는 유리엘라 광장도 아니고, 굳이 은둔자의 숲에서 만나자고 하는 그의 의도가 짐작되지 않았다.
설마 하는 생각에 봉투와 편지지를 다시 한 번 살폈다. 은둔자의 숲에서 시모네타로 진을 만났던 게 떠올라서다.
‘만에 하나 이 편지가 록스버그 공작이 아니라, 시모네타에게 보내진 것이라면…….’
초조함에 심장이 무섭게 뛰었다.
“아니, 그가 알 리 없어.”
로엔은 이내 고갤 가로저었다. 어렴풋이 그가 저를 은둔자의 숲으로 부른 이유를 알 것 같아서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어떻게 그의 비밀을 알게 되었는지를 물으려는 걸 거야.’
무엇보다 이 편지가 시모네타에게 보낸 것이라면, 편지는 록스버그 저택이 아니라 만물상점으로 보내져야 했다.
자정이라.
은둔자의 숲으로 그를 만나러 가지전까지 그럴싸한 이유를 생각해 둬야 할 것 같았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스미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스미스입니다.”
“들어와.”
로엔이 편지를 봉투 안에 넣는 사이 문이 열리고 스미스가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폐하께서 성년을 축하하는 카드와 선물을 보내신 듯합니다.”
“폐하께서?”
생각할수록 의외였다. 캠벨 후작가의 가든파티에서도 약혼녀인 그리젤라를 시켜 에드워드 캐슬리우스 백작을 남편감으로 소개하려 했었다.
처음엔 에드윈이 진과의 결혼을 믿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리젤라와 캐슬리우스 백작이 보인 태도가 너무도 호의적이었다. 한마디로 다른 의도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성년 의식을 축하는 편지와 선물이라니.’
분명 로열 에스콧에서의 사건을 기점으로 에드윈이 저를 배신자로 간주할 것이라 여겼는데, 그의 행보가 예상과는 너무 달랐다.
다른 속셈이 있지 않고는 이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대체 이번엔 무슨 일을 꾸미려는 건지 걱정부터 앞섰다.
스미스에게 편지와 상자를 받아 든 로엔은 의심스러운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마치 절대 열어서는 안 될 판도라의 상자를 받아 든 느낌이었다.
“다른 말은 없었고?”
“전령사가 오늘 열리는 검술 시합에 주인님께서 참석하시는지 알려 달라고 했습니다. 폐하께서 알아오라 명하셨다고 합니다.”
“검술 시합?”
“네.”
로엔은 영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봉투를 열었다. 그리곤 화려하게 늘여 쓴 에드윈의 글씨체를 확인하곤 눈살을 찌푸렸다. 군더더기 없이 단정하던 진의 글씨체와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뭐라고 하십니까?”
“네 말대로 성년을 축하한단 내용이야. 타라의 연을 잘 간직하라는군.”
로엔의 말에 스미스의 표정 역시 굳어졌다. 아드리안 제국에서 성년식을 치른 여인에게 타라의 연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알고 있어서였다.
“폐하께서 로이슈덴 공작님과의 결혼을 승낙하신다는 내용일까요?”
“글쎄. 내용만으로 확신할 수가 없네. 워낙 의심이 많은 데다 능구렁이 같은 분이라.”
캠벨 후작가의 가든파티에서 진은 에드윈이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한 것처럼 말했었다.
하지만 로엔이 아는 에드윈은 그렇게 단순한 자가 아니었다. 앞에선 웃고 있었지만, 등 뒤엔 독이 묻은 검을 숨기고 있는 자였다. 그러니 그가 호의를 보인다고 해서 절대 안심할 순 없었다.
“전령사에게 검술 시합에 참석하겠다고 전해.”
“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런데 로이슈덴 공작님은 검술 시합에 출전하실까요?”
“당연히 출전하겠지. 로이슈덴 공작가는 아드리안 제국의 ‘부러지지 않는 검’이잖아. 아마 폐하께서 직접 친서를 보내 참가를 요구했을 거야.”
로열 에스콧에서처럼 절대 거절할 수 없도록.
“그럼 주인님도 티핏(장식용 천에 연인의 이니셜을 수놓은 선물. 일종의 정표)을 준비하셔야 하는 것 아닐까요?”
“티핏? 그걸 왜?”
“그러니까 제 말은 로이슈덴 공작님이 검술 시합에서 우승하시면, 승자의 예를 취하실 테고…….”
‘승자의 예’라는 말에 로엔이 눈을 가늘게 떴다.
건국기념일에 열린 검술 시합에서 우승한 기사에겐 최고의 레이디에게 경의를 표하는 게 관례였다. 그리고 기사의 예를 받은 레이디는 준비해 온 티핏을 기사의 검에 묶어 선물하는 형태였다.
작년 검술 시합에선 특수한 상황이라 승자의 예를 건너뛰었지만, 올해는 그 전통이 다시 지켜질 터였다.
또한 스미스의 말처럼 진이 우승을 하게 된다면…….
‘티핏을 준비해야 하는 걸까?’
잠시 고민하던 로엔은 이내 고갤 가로저었다. 진 로이슈덴이 검술 시합에서 우승은 하겠지만, 그의 성격상 제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레이디에게 승자의 예를 표할 것 같진 않았다.
그것이 황제의 명이라 할지라도 무시하거나, 거부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준비해 갔다가 귀족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보단, 처음부터 가져가지 않는 편이 나았다.
“스미스, 그럴 필욘 없을 것 같아. 로이슈덴 공작님이 그런 장면을 연출할 사람 같진 않거든.”
“그렇긴 하지만 검술 시합에서 주인님이 선물한 티핏을 받는 것만으로 주인님을 대하는 사교계의 태도가 바뀔 테니까요.”
스미스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지난번 캠벨 후작가의 가든파티에 진이 나타났을 때 레이디들이 보인 반응만 봐도 그를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했다.
하지만 내키지 않았다. 그는 약혼자로, 남편으로 제 역할에 충실할 것이라 약속했다. 그러니 로엔 역시도 계약 결혼을 유지하는 1년 동안 완벽한 파트너로 제 역할을 하고 싶었다.
그에게 기대 일방적인 도움을 받는 건 두 사람의 관계의 형평성을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그래, 그런 사소한 일로 모든 걸 다 망치는 일은 없어야 했다.
“아니, 하지 않는 게 좋겠어. 어차피 결혼을 발표하면 귀족들도 어쩔 수 없을 테니까.”
무엇보다 결혼 발표를 하기도 전에 에드윈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야 할 때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 내려가서 전령사에게 주인님의 뜻을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스미스가 방을 나가자, 로엔은 심각한 얼굴로 에드윈이 보낸 편지를 쏘아보았다.
“정말 의뭉스러운 황제라니까. 이렇게 방심하게 만들어 놓고 또 일을 꾸미는 건 아닐 테지? 지난번 로열 에스콧에서처럼 말이야.”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갤 가로저었다.
오늘은 아드리안 제국의 건국기념일이었다. 아무리 에드윈이 저와 진에게 화가 나 있다고 해도, 오늘 같은 날에 피를 보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을 터였다.
“그래, 그 정도로 무모하진 않을 거야.”
로엔은 애써 안심하며 테이블 위에 놓인 상자에 시선을 줬다. 황제가 성년을 축하하며 보낸 선물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불길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는다.
“조심하라고 공작가에 미리 편지라도 보내야 하나?”
잠시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로엔은 마음을 바꿨다. 아무런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불안하다는 것만으로 그런 편지를 보내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것보단 검술 시합 대진표라도 미리 알아 놓는 쪽이 더 좋을 것 같았다. 대진표를 보면 대충 진이 어떤 가문의 기사와 시합을 하게 될지 알 수 있을 테니까.
그중 황제의 편에 선 가문들을 파악할 수도 있었다.
“우선 라이칸이 어디 있는지부터 찾아야겠어.”
로엔은 라이칸을 찾기 위해 방을 나와 빠르게 계단을 내려왔다.
* * *
유리엘라 광장은 오전부터 축제를 즐기기 위해 나온 제국민들로 가득했다. 아직 검술 시합이 시작되지 않았지만, 시합장으로 가는 길목엔 흥분과 기대감이 가득 담긴 사람들의 행렬로 길게 줄이 이어졌다.
그 사이에, 귀족들을 태운 화려한 마차 행렬이 끼어들면서 시합장으로 가는 길은 한 발짝 내딛는 게 힘겨울 만큼 혼잡해졌다.
“오늘 시합에 로이슈덴 공작님이 참가한다던데, 사실일까요?”
“그걸 말이라고 해? 당연히 참가해 우승하실 테지. 나는 돈까지 걸었잖아.”
남자가 주머니에서 로이슈덴 공작가의 문장이 그려진 금빛 줄을 꺼내, 옆에 서 있던 친구에게 내보였다. 그걸 본 친구가 혀를 끌끌 차며 속았다는 듯 말했다.
“그걸 돈 주고 사다니. 미쳤군.”
“뭐야. 그 말은 설마 로이슈덴 공작님이 진다는 뜻이야?”
남자가 눈썹까지 치켜올리곤 친구에게 버럭 소릴 질렀다.
“그게 아니라, 내 말은 내기가 되겠냐는 거지. 제국민이라면 다 로이슈덴 공작님에게 돈을 걸 텐데 말이야.”
그제야 남자가 표정을 풀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 역시 그 말에 수긍하듯 고갤 끄덕이며 왁자지껄한 웃음을 터뜨렸다.
“어, 저거 록스버그 공작가의 마차 아냐?”
로엔이 타고 있는 마차를 발견한 남자가 친구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고갤 휙 돌렸다. 마차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속엔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록스버그의 괴물 공작에 대한 소문은 제국민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거기다 최근 진 로이슈덴 공작에게 공개 구혼까지 한 마당이니, 호기심을 보이는 건 당연했다.
열린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던 로엔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경기장 밖인데도 이 정도니, 검술 시합장 안으로 들어서면 어떤 시선을 받을지 짐작이 됐다. 벌써부터 신경이 예민해지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