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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88화 (89/201)

88화

이상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혈독화의 독이 빠르게 퍼지는 느낌과 함께 온몸에 뜨거운 열기가 확 퍼졌다.

‘갑자기 왜 혈독화가…….’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유리엘라 광장엔 수많은 여인들이 있었다. 만에 하나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다면……. 상상만으로 끔찍했다.

로엔은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숨을 고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다행스럽게도 들끓던 열기와 고통이 서서히 가시기 시작했다.

‘괜찮으세요?’

고갤 들자, 세실이 제 변화를 민감하게 알아차린 듯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괜찮아. 걱정 마.’

로엔이 입술을 움직여 아무 일 없다는 뜻을 전하고 나서야 세실은 안심한 표정을 짓는다.

때마침 네 번째 종소리가 울렸다.

여인들은 미리 준비해 온 바구니에서 꽃잎을 뿌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유리엘라 광장은 여인들이 뿌린 색색의 꽃잎으로 가득 찼다.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

로엔도 가슴 부근에서 손을 떼곤, 의식의 순서에 맞춰 꽃잎을 뿌렸다. 손가락 사이로 꽃잎이 빠져나가 일렁이는 바람에 비처럼 흐드러졌다.

‘아름답다.’

유리엘라 광장에 모인 여인들 역시 같은 생각을 하는지, 여인들의 입가에도 환한 미소가 어렸다. 잊지 못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댕―

여섯 번의 종소리 중 다섯 번째 종소리였다.

여인들은 바구니를 내려놓곤 하늘을 올려 보았다. 아직 아침이 되지 않은 아드리안의 하늘은 어둠뿐이었지만, 뭔가를 기다리듯 여인들의 얼굴엔 진득한 설렘으로 가득했다.

그 순간, ‘파방!’ 하는 소리와 함께 축포가 터졌다.

새벽의 하늘을 수놓는 화려하고 신비로운 불꽃이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광장의 하늘을 밝혔던 불꽃은 찰나의 순간에 생겨났다 사라지는 거대한 화폭 같았다.

또다시 축포가 터지는 소리가 들리자, 황홀한 눈빛으로 불꽃을 구경하던 여인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곤 축포와 함께 쏘아올린 붉은 실을 붙잡았다.

붉은 실은 값비싼 비단 실을 하나하나 꼬아 만든 것으로, 붉은 실의 끝엔 아드리안 제국의 대신전에서 축원을 담아 만든 독특한 문양의 장식이 달려 있었다.

일명 ‘타라의 연’이라 불리는 이 실은 끝과 끝을 연결하면 팔찌가 됐다.

로엔도 손을 뻗어 타라의 연을 잡았다. 성년 의식의 의례적인 절차 중의 하나였지만, 로엔이 타라의 연을 붙잡는 순간 묘하게 심장이 일렁거렸다.

‘뭐지, 이 낯선 감각은?’

로엔은 긴장된 표정으로 손을 펴 장식에 새겨진 문양을 확인했다. 순간 로엔의 눈동자가 놀란 듯 커졌다.

공작새였다.

타라 여신의 수호자이자, 은둔자의 숲을 지키는 신성한 파수꾼.

로엔은 섬세하게 세공된 공작새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공작새의 눈에 박힌 보석은 분명, 루비였다.

‘주인님도 잡으셨어요?’

세실이 로엔의 팔을 붙잡고는 입술을 벙싯거렸다. 그리곤 로엔을 향해 손을 내밀어 타라의 연을 보여 주었다. 세실의 붉은 실엔 꽃문양이 장식되어 있었다.

대신전에서 축원을 담아 만든 장식은 어느 것 하나 똑같은 게 없다고 했다.

따라서 오늘 받은 타라의 연은 각자 고유의 표식이 되었고, 결혼식을 올린 첫날밤에 그것을 남편과 교환하는 게 관례였다.

배우자에 대한 신성하고 고귀한 맹세의 의미였다.

‘주인님은 공작님께 드리면 되겠네요.’

세실이 입술만 움직여 말했지만, 로엔은 그 말이 마치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로엔은 본능적으로 손에 든 타라의 연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계속해서 욱신거리던 심장이 언제 그랬냐는 듯 아픔이 사라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로엔은 불안감을 감추며 외투의 주머니에 깊숙이 타라의 연을 밀어 넣었다.

그 순간, 의식의 끝을 알리는 여섯 번째 종소리가 울렸다.

“주인님, 이제 돌아가요.”

세실이 침묵을 깨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로엔 역시 고갤 끄덕이곤 저택으로 향했다.

유리엘라 광장을 나서며 로엔은 조심스럽게 심장 부근을 눌렀다. 그러자 혈독화가 짙은 꽃 향을 뿜어냈다.

다행히 조금 전 의식에서 꽃잎을 뿌려 놓아서인지, 짙은 꽃 향이 나는데도 그걸 이상하게 여기는 이는 없었다.

로엔은 의식 중간에 느꼈던 낯선 감각을 떠올렸다. 지금껏 한 번도 없었던 일이라 신경이 쓰였다.

무엇보다 혈독화를 품고 성년 때까지 살아남은 이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더 초조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들었으니까.

‘만에 하나, 오늘을 기점으로 예상치도 못한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다면…….’

로엔은 본능적으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지금껏 잊고 있던 두려움이 왈칵 치솟자, 등줄기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비밀 서고에 가서 혈독화에 관련된 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봐야겠어.’

그렇게 생각하고 걸음을 옮기는데, 옆에서 걷고 있던 세실이 잔뜩 들뜬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오늘 축제에 집시들과 서커스단이 온다는 소문 들으셨어요?”

축제라는 말에 로엔은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매년 오던 것 아니었어?”

“아니요. 올해는 규모가 훨씬 클 거래요. 거기다 정복전쟁도 끝났으니, 각국의 사절단을 비롯해 여행객들도 축제를 즐기기 위해 대거 칼라일로 모여드는 모양이에요.”

그러고 보니 라이칸이 그런 비슷한 말을 했던 것도 같다. 말레 상단에서 저녁에 있을 대대적인 행사에 사용될 물건들을 준비 중이라고 하면서.

“지금까지와는 달리 대규모 축제가 되겠네.”

세실이 열심히 고갤 끄덕였다. 그러다 뭔가 생각난 듯 눈을 반짝이더니 신이 나서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사실 그것보다 밤이 더 근사할 거래요. 이건 톰에게 전해 들은 건데, 연인들을 위한 가면 축제가 있을 거래요.”

“가면 축제? 그건 불순한 목적으로…….”

“아니요. 기존의 음험한 형태의 가면무도회와는 결이 다른 모양이에요. 가면 축제에 참가할 수 있는 사람도 오늘 성년식을 치른 여인들뿐이라고 하고요.”

연인들을 위한 축제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여인들만 참석하는 이상한 축제라니. 별로 재미있을 것 같진…….

“재미없을 것 같은 얼굴이시네요.”

로엔의 생각을 읽은 듯 세실이 쿡쿡대며 웃는다.

“뭐, 그렇지.”

“사실 지금부터가 더 흥미로운 이야긴데, 가면 축제에 참석한 여인들이 마음에 드는 파트너를 선택하는 모양이에요. 함께 축제를 즐길 연인을 직접 고르는 거죠. 생각만 해도 너무 낭만적이지 않나요?”

“축제에 함께 갈 파트너는 어떻게 정하는 건데?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오늘 받은 타라의 연을 주기라도 하는 건가?”

“아마 그러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받은 타라의 연이 일종의 초대장인 거죠.”

“그래, 그런 방법이라면 재미있겠네.”

기존의 축제와는 다른 형태라, 굉장히 흥미로웠다.

“가면 축제는 언제 시작하는데?”

“정확히 자정에요. 주인님도 건국기념일 파티가 끝나면 같이 참석해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로엔은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자정이면 일반적으로 귀족가의 파티가 한창 무르익을 시간이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얼굴만 비치고 파티장을 바로 빠져나올 테지만, 오늘은 로이슈덴 공작과 약혼 발표를 할 예정이었다. 그러니 상황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로엔은 머릿속으로 진과 함께 가면 축제에 참가한 모습을 그려 보았다. 황제와 귀족들이 참석하는 건국기념일 파티보단 훨씬 재미있을 것 같았다.

“나도 참석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로엔은 그 사실을 깨닫지도 못한 채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세실과 축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두 사람은 저택에 도착했다.

“이제 오십니까, 주인님.”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던 스미스와 엠마가 두 사람을 맞았다.

“성년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주인님.”

축하 인사와 함께 스미스가 로엔의 머리 위에 히아신스로 만든 화관을 씌워 주었다. 향긋한 꽃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고마워, 스미스.”

“세실, 축하해. 이제 성년이네.”

엠마 역시 세실의 머리에 똑같은 화관을 씌웠다.

“축하해 주셔서 감사해요.”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세실을 보며, 엠마가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성년이 된 게 그렇게 좋아?”

“너무 좋아요. 이제 톰이랑 마음껏 데이트도 할 수 있잖아요.”

결혼할 때까지 순결을 지켜야 하는 귀족가의 레이디들과는 달리 평민의 여인들은 성년 의식을 기점으로 자유롭게 연애를 즐길 수 있었다.

불륜과 같은 부도덕적인 관계만 아니라면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진다는 뜻이었다.

아마 오늘 성년 의식을 치른 여인들 중 연인이 있는 이들이라면, 축제에서 사랑하는 연인과 첫 밤을 보낼 확률이 컸다.

세실 역시 예외가 아닐 테고.

그때, 정원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걸어오는 톰이 보였다. 세실도 톰을 발견하곤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로엔은 서로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두 사람을 보며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서로를 향한 노골적인 감정이 눈에 보여서다.

“가 봐. 톰이 기다리잖아.”

로엔이 세실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그러자 세실이 기다렸다는 듯 톰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로엔은 멀어져 가는 세실을 뒤로한 채 저택으로 들어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아참, 주인님. 여기.”

스미스가 갑자기 생각 난 듯 로엔을 부르더니 검정색 편지 봉투를 건넸다. 봉투엔 로이슈덴 공작가의 문장이 새겨진 붉은 인장이 찍혀 있었다.

“주인님께서 저택을 나가신 직후에 도착했습니다.”

“그랬어?”

성년 의식에서 돌아오자마자 로이슈덴 공작의 편지를 받자 기분이 묘했다.

로엔은 무의식적으로 외투의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러자 타라의 연의 끝에 달린 공작새가 손에 잡혔다.

윽, 또다시 심장부근이 욱신댔다. 로엔은 손으로 혈독화가 있는 부근을 꾹 눌렀다.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고 있으십니까?”

스미스의 시선이 어김없이 제 심장 부근에 닿아 있다. 로엔은 재빨리 손을 떼곤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아니야. 조금 불편해서. 이제 괜찮아.”

“식사는 어떻게 할까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세실이 알아서 준비할 테니까. 그럼 일 봐.”

로엔은 스미스를 남겨 둔 채 서둘러 자릴 떴다. 방으로 들어가 혈독화를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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