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배가 멈췄네요. 이제 돌아가야겠어요.”
로엔은 배가 멈췄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진의 등 뒤로 손을 뻗었다. 그러다 또다시 흔들리던 배의 움직임에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어엇!”
“조심해.”
순식간에 진의 팔이 로엔의 허릴 감쌌다. 로엔은 한 치의 틈도 없이 가까워진 거리에 숨을 삼켰다.
어느새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고, 시간이 멈춘 듯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콘티아나 숲에서 불어온 미풍이 두 사람을 부드럽게 감쌌고, 청량하고 달콤한 체향이 서로를 향해 얽혀 들었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심장 뛰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로엔은 입안이 바짝 타들어 가는 날 선 긴장감에 그를 붙잡은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어, 갑자기 배가 흔들려서…….”
변명처럼 말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진은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을 감싼 공기가 농밀해지며 나른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어쩌지? 밀어내야 하는데…….’
왜인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발소리와 함께 놀라 숨을 삼키는 레이디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나! 죄송해요. 제가 방해를 했나 보군요.”
그리젤라의 목소리에 로엔이 재빨리 진을 밀어냈다. 그리곤 손을 뻗어 그의 뒤에 놓여 있던 베일을 들어 머리에 썼다. 이번엔 진도 그녀를 막지 않았다.
로엔은 익숙한 검은 베일이 얼굴을 덮고 나서야 안도감에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래서인지 에드워드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지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정말 죄송해요. 배가 멈추면 돌아가신다는 말이 생각나서 와 본 건데. 저희가 너무 일찍 온 모양이네요.”
그리젤라가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리젤라의 얼굴엔 놀람과 경악스러운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뒤따라오던 레이디들 역시 충격을 받은 얼굴로 서로 눈짓을 교환하는 게 보였다.
“아, 네. 그렇지 않아도 배가 멈춰 돌아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 모습은 갑자기 배가 멈추는 바람에 넘어질 뻔해서…….”
“그래서 로이슈덴 공작님께서 붙잡아주신 모양이네요.”
“네, 그렇게 된 거죠.”
로엔이 오해를 풀어 다행이라는 듯 고갤 끄덕였다. 하지만 로엔의 바람과는 달리 그리젤라를 비롯한 레이디들은 그 변명을 믿지 않았다.
그 사실을 모르는 로엔은 떠날 채비를 하며 갑판에서 내려오려 했다.
“기다려. 도와줄 테니까. 발목이 불편하잖아.”
“아니, 괜찮…… 허읍!”
로엔은 순식간에 제 몸이 들려지자, 놀라 숨을 삼켰다. 갑판을 내려오려던 참이라 진의 도와준다는 말을 당연히 부축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진이 로엔을 두 팔로 안아 든 것이다.
“공작님, 이러지 않으셔도 된다니까요!”
로엔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베일 안에서 진만 들을 수 있도록 낮게 속삭였다. 하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돌아가는 길에 의원을 찾아가야 해서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진이 인사를 건네는데도 그리젤라는 진의 품에 안긴 로엔을 보며 충격을 받았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 네. 조심히 가세요, 로이슈덴 공작님. 그리고 록스버그 공작님.”
뒤늦게 감정을 수습한 그리젤라가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레이디 그리젤라.”
로엔은 재빨리 인사를 건넸다. 진과 실랑이하는 대신 이 자리를 빨리 벗어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였다.
로엔이 버둥거림을 멈추고 순순히 그의 품에 안겨 있자, 진이 기다렸다는 듯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로엔은 베일 너머로 레이디들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다.
“목에 팔을 감아. 떨어지면 위험하니까.”
로엔은 레이디들의 경악에 가까운 시선 때문에 차마 그의 목에 팔을 감지 못했다. 대신 그의 팔을 붙잡으며 몸을 그에게 기댔다.
그러자 진이 지지리 말도 안 듣는다는 듯 혀를 차더니 그녀를 고쳐 안았다. 순식간에 그의 품에 폭 안겨진 로엔은 당혹감을 감추려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에드워드를 발견하곤 말을 건넸다.
“어, 캐슬리우스 백작님, 숲에서 도와주신 것 감사했습니다.”
“별것 아니었는데요. 혹시라도 제가 공작님에게 무례를 범했다면 너그럽게 용서해 주셨으면 합니다.”
에드워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충분히 이해한 로엔은 괜찮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그러자 에드워드의 시선이 진에게 향했다.
“로이슈덴 공작님,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다시 뵐 수 있어서 반가웠습니다.”
에드워드는 진을 향해 예를 갖췄지만, 진은 무례할 정도로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무시했다.
배에서 내려온 진은 로엔을 품에 앉은 채 정원을 가로질렀다. 마차까지 가려면 더 걸어야 했다.
“전쟁터에 있을 때, 캐슬리우스 백작과 사이가 좋지 않았나 보네요.”
“특별히 나쁘진 않았지. 하지만 앞으로 좋아질 것 같지도 않군.”
진이 서늘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더는 에드워드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그렇죠. 캐슬리우스 백작님은 폐하의 사람이니까요. 그래도 나쁜 사람 같진 않더군요. 순진한 구석이 있어 이용당하기 딱 좋은 성격인 것 같기도 하고. 이번 일도 폐하께서 억지로…….”
“그만. 내가 계속해서 딴 사람 얘길 들어야 하나?”
“네?”
“그를 칭찬할 정도로 마음에 들면 지금이라도 계획을 바꾸든가. 난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로엔을 내려다보는 진의 시선이 삐딱했다. 품에 안겨 있는 탓에 불쾌감에 그의 입매가 굳어 있는 것까지 보였다.
“아니, 저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노선을 분명하게 해. 나인지, 아니면 다른 놈인지.”
그의 차가운 목소리에 로엔이 검을 베일 사이로 진과 눈을 마주쳤다.
‘뭐지? 이건 마치 질투를…….’
로엔은 비어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짓씹었다. 생각해 보면 그는 유독 에드워드에게 날을 세웠었다. 조금 전에도 인사조차 받지 않았고.
믿기지 않지만 그의 행동을 질투라는 말로밖에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아니면, 계약 결혼이라도 제 신부가 될 사람이니 소유욕을 느끼는 걸지도 모르고.
‘맞다, 소유욕.’
그가 말했었다. 앞으로 약혼자, 아니 남편으로서 제 역할을 충실히 하겠다고.
‘하지만…… 과연 그게 진짜 이유일까?’
로엔은 그가 이렇게 이상하게 구는 이유를 한 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
* * *
아드리안 제국력 200년.
어스름한 새벽빛과 함께 건국기념일이 밝았다.
이른 새벽부터 외출 준비를 끝마친 로엔은 스미스가 건네는 외투를 어깨에 걸치며, 여명이 짙은 어둠을 밀어내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로엔은 천천히 긴장된 숨을 내쉬며 유리엘라 광장의 종탑의 첫 종소리가 울리기를 기다렸다.
올해로 스무 살이 된 로엔 역시 제국의 성년 의식에 참석해야 했다.
존더부르크 1세에 의해 매년 치러지는 성년 의식은 대신전에 내려진 ‘황후의 예’에 대한 신탁으로부터 시작됐다.
존더부르크 1세가 아드리안의 다섯 가문과 함께 제국을 세운 직후, 대신관에게 신탁이 내려졌다.
그 내용은 그 해 성년을 맞은 레이디들 중 고귀한 운명을 타고난 여인이 나타나 황후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 여인이 바로, 존더부르크 1세와 결혼한 황후 산티아나였다.
신탁에 회의적이었던 존더부르크 1세는 그 일을 계기로 대신전의 신탁을 믿게 되었다.
그 이후 황후 산티아나를 기념하기 위해 매해 건국기념일 새벽에 스무 살이 된 제국의 여인들을 유리엘라 광장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곤 타라 여신의 축복을 내리는 의식을 치르게 한 것이다.
그렇게 지켜 온 게 벌써 200년이었다.
“주…….”
외투를 입고 나오던 세실이 현관 앞에 서 있는 로엔을 발견하곤 부르려 했다. 로엔이 재빨리 고갤 가로저으며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자, 그제야 제 행동을 깨닫곤 입을 다물었다.
성년 의식을 치르는 동안 타라 여신의 축원을 받기 위해서는 침묵의 규칙을 지켜야 했다. 스미스 역시 세실에게 제발 침착하라는 듯 눈으로 경고를 했다. 세실 역시 로엔과 마찬가지로 스무 살, 성년이었다.
세실이 두 사람을 향해 고갤 끄덕였다. 그리곤 로엔의 옆에 얌전히 서선 성년 의식을 알리는 첫 종소리가 울리길 기다렸다.
성년 의식은 200년 전 그랬던 것처럼 새벽 6시에 시작되었고, 여섯 번의 종소리에 맞춰 식이 진행되었다.
그때, 댕― 하고 의식을 알리는 첫 번째 종소리가 들려왔다.
종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 있던 문이 하나둘 열리기 시작하더니, 손에 등불과 커다란 바구니를 든 여인들이 밖으로 나왔다.
로엔과 세실 역시 집사인 스미스가 건네는 등불과 바구니를 받아 든 다음, 천천히 문을 나섰다.
이어, 두 번째 종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의식의 순서에 맞게 문 앞에 서 있던 여인들이 등불을 들고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어둡던 도시가 순식간에 줄지어 늘어선 등불로 가득 찼고, 등불의 행렬은 이내 유리엘라 광장으로 이어졌다.
‘주인님, 같이 가요.’
세실이 입술만 움직여 말하이며 로엔을 팔을 붙잡았다. 로엔은 깊숙이 쓰고 있는 후드 너머로 세실을 돌아보았다.
‘바짝 붙어. 떨어지지 않게.’
로엔 역시 입술만 움직여 말했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검은 외투를 입은 무리 속에 섞여 유리엘라 광장으로 향했다.
세 번째 종소리가 들린 순간, 로엔과 세실은 유리엘라 광장으로 들어섰다.
광장에 도착한 여인들은 경건한 표정으로 깊게 눌러쓰고 있던 후드를 천천히 벗었다. 그러자 여인들의 머리를 장식한 붉은 루비가 손에 들려 있는 등불의 불빛을 받아 피처럼 붉은빛을 뿜어냈다.
붉은 루비는 아드리안 제국의 황실을 상징하는 보석으로, 황제가 그의 반려인 황후에게 주는 결혼 선물이었다.
그런 루비를 성년 의식에 참석한 여인들의 머리에 장식하는 것 역시 제국에 내려진 ‘황후의 예’에 대한 신탁에서 기인된 것이었다.
그리젤라 캠벨 역시 1년 전 건국기념일의 성년 의식에 참석한 해, 타라 여신의 축복을 받은 후 황제의 반려로 결정되었다.
로엔도 깊이 눌러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그러자 그녀의 머리와 이마를 장식한 섬세한 루비가 불빛을 받아 투명한 빛을 뿜어냈다.
그 순간…….
‘윽!’
심장 부근에 느껴지는 날카로운 고통에 흠칫, 몸을 떨었다. 순식간에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로엔은 고통을 삼키며 심장 부근을 꾹 눌렀다.
태어난 순간부터 심장에 각인된 혈독화가 새겨진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