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어떡하죠? 저희가 모두 배에 타는 바람에 고용인이 우리가 뱃놀이를 하려는 것으로 오해한 모양이에요. 괜찮으시다면 간단히 차를 마신 후에 돌아가시는 건 어떨까요? 이 배는 한 번 띄우면 1시간 동안은 멈출 수가 없거든요.”
그리젤라가 난처한 얼굴로 로엔을 보았다.
‘뱃멀미 때문에 안 되는데.’
벌써부터 특유의 배의 흔들림에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제 사정과는 상관없이 1시간 후에나 배가 멈춘다는데, 선택의 여지가 없는 듯했다.
“배가 멈추면 돌아갈 수밖에 없겠네요.”
로엔의 대답에 그리젤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차를 내오라고 해야겠네요. 로이슈덴 공작님, 저희와 함께 선상 쪽으로 가시면 된답니다. 그곳에 쉴 만한 곳이 마련되어 있어요.”
그리젤라의 제안에 진의 시선은 로엔에게 향했다.
“그대는 어쩔 생각이지? 함께 갈 텐가?”
“아니요. 움직이는 것도 번거롭고, 바람도 시원한 것 같으니 전 여기에 있을게요. 공작님은 함께 가셔서 편하게 차를 드시는 게 좋겠어요.”
로엔의 대답에 그리젤라와 레이디들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진 로이슈덴과 함께 차를 마실 수 있다는 사실에 들뜬 얼굴이었다.
“배려는 고맙지만, 나도 여기에 있겠습니다.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라.”
진이 귀찮으니 당장 꺼지라는 듯 차갑게 쏘아보았다. 그리곤 로엔 옆에 떡하니 자릴 잡고 앉았다.
그 모습에 뒤에 서 있던 레이디들이 실망한 표정을 숨긴 채 서로 시선을 교환하는 게 보였다.
“그럼 저희만 자릴 옮겨야겠네요. 두 분을 위해 차를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혹시 냉차가 있을까요?”
“그럼요. 냉차로 가져다 드리라고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레이디 그리젤라.”
그리젤라와 레이디들이 아쉬워하며 자릴 옮기자, 로엔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참아 보려고 했지만 자꾸만 속이 울렁거렸다.
“참을 필요 없어. 남 눈치 볼 것도 없고. 내리고 싶으면 말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배를 멈추게 할 테니까.”
어떻게 안 건지 모르겠지만 로엔이 멀미 때문에 불편해하고 있다는 걸 아는 모양이다.
무심한 듯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차가운 성격을 알기에 로엔은 그가 얼마나 저를 배려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진상이라도 부리시게요?”
편하게 느껴졌는지 저도 모르는 사이 장난스러운 말투가 튀어나왔다.
“필요하다면 그렇게라도 해야지. 내 원래 계획은 호수로 뛰어들어 수영해서 나가는 것이었지만.”
로엔은 순간,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로엔이 그러겠다고만 하면 정말 진상을 부릴 태세였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불쾌하게 울렁거리던 감정이 누그러졌다.
“고맙지만 두 가지 방법 모두 사양할게요. 더 이상 소문의 주인공이 되고 싶진 않으니까. 그리고 공작님의 평판도 생각해야 하고.”
“내 평판을 신경 쓰기엔 이미 늦은 감이 있는 것 같지 않나? 내가 돈에 팔렸다는 소문이 벌써 폐하의 귀까지 들어갔으니 말이야.”
“폐하께서도 그 소문을 들었다는 건가요?”
“며칠 전 폐하와 검술 대련을 했는데, 그때 말하더군.”
“그래서 공작님은 뭐라고 하셨는데요? 아니라고 부정하신 건가요?”
“내가 왜 그랬을 것이라 생각하지?”
진이 눈을 가늘게 뜨곤 로엔을 보았다.
“그거야 폐하께서 제게 남자를 소개시켜 줬으니까요. 그것도 약혼녀인 레이디 그리젤라까지 동원해서 본격적으로 중매를 서셨죠.”
로엔은 오늘 일이 다 진의 탓이라도 되는 양 그를 한껏 노려보았다.
“베일이라도 벗고 노려보지 그래? 그 상태로 아무리 노려봐도 겁날 것도 없으니까.”
진의 비아냥거림에 로엔이 주먹을 꽉 쥐었다.
‘누가 하라면 못할 줄 알고?’
로엔은 그의 유치한 도발에 넘어가 스스로 베일을 걷어 올렸다. 그리곤 한껏 노려봤다.
순간 진의 입가에 미소 비슷한 게 걸렸다 사라졌다.
뭐야? 지금 웃은 거지?
“생각보다 귀엽군.”
“귀…….”
당황한 로엔이 재빨리 고갤 돌렸다. 그녀는 위로 걷어 올린 베일을 다시 내리려 했다.
“그대로 있어. 이미 가릴 건 다 가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안심하고.”
진이 손을 뻗어 로엔의 머리에 씌워진 검은 베일을 천천히 벗겨 냈다. 베일에 가려졌던 황금빛 머리카락이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진은 한동안 로엔의 머리카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 제 행동을 깨닫곤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답답하잖아. 벗고 있어.”
다소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로엔이 뭔가 말하려던 그 순간 호수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시원한 바람이 얼굴에 닿자, 제 몸의 열기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누구 마음대로 베일을 벗기는지 모르겠네요. 주세요.”
당혹감을 감추며 로엔이 손을 뻗었다. 평소와 달리 손에 힘이 들어가, 거친 모습이었다. 하지만 진은 제 뒤쪽으로 베일을 던져 놓고는 가져가지 못하게 했다.
“지금 멀미하고 있잖아. 그렇게 꽁꽁 싸매고 있는 것보다 시원한 바람이 도움이 될 거야.”
로엔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표현이 서툴러서 그렇지, 분명 저를 걱정하는 거라는 걸 알고 있기에.
“공작님, 차가운 냉차를 가져왔습니다.”
때마침 얼음이 들어 있는 냉차를 들고 고용인이 갑판 위에 트레이를 내려놓았다. 그리곤 진과 로엔을 흘끗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더 필요한 게 있는지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필요한 것 없으니 그만 가 봐.”
진이 축객령에 고용은 도망치듯 그곳을 떠났다.
또다시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진은 당연하다는 듯 로엔에게 냉차가 든 잔을 건넸다.
“얼른 마셔.”
“먼저 드세요. 저는 제가 알아서…….”
“얼른 먹기나 해. 뱃멀미로 날 귀찮게 하지 말고. 나는 내가 알아서 먹을 테니까.”
귀찮다는 듯 툭툭 뱉어 내는 말속에서 걱정이 읽혔다. 믿기지 않지만 그랬다.
잔을 받아 든 로엔은 천천히 냉차를 마셨다. 시원한 음료가 몸에 들어가자, 긴장이 풀리며 갈증이 사라졌다.
“그런데 진짜 왜 오신 거예요? 초대해서 왔다는 뻔한 거짓말은 하지 마시고요. 이젠 통하지 않으니까.”
로엔이 속일 생각 말라는 듯 쐐기를 박았다. 딱히 말한 건 아니었지만,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가 이곳에 온 이유가 따로 있다고.
“무슨 대답을 바라는지 모르겠지만 아니야.”
느긋하게 차를 마시던 진의 표정이 찌푸려지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대체 내가 원하는 대답이 뭔 줄 알고 아니라고……. 잠깐만.’
“아니에요. 절대 저 때문에 가든파티에 참석했다고 생각한 적 없다고요.”
로엔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사래까지 치며 부정했다. 그러자 차를 마시던 진이 무심한 눈빛으로 물끄러미 로엔을 응시했다.
그의 차가운 시선에 로엔은 재빨리 흥분을 가라앉혔다. 저만 발끈한 것 같아서 민망했다.
“흠흠, 다시 한 번 말씀드리자면 그런 오해는 하지 않았어요. 공작님이 저 때문에 파티에 참석하다니. 말도 안 되죠.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오해는 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
“정말 믿으셔도 된다니까요.”
그의 침묵에 로엔은 다시 한 번 쐐기를 박듯 단호하게 말했다.
“왜 오해하면 안 되지?”
“네?”
“왜 안 되는지 모르겠군. 어차피 결혼할 사이인데, 너를 위해 가든파티에 참석하는 게 그렇게 이상한 건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라는 의문과 함께 그가 들고 있던 냉차 잔에 시선이 갔다.
‘저 안에 약이라도 든 건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 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상할 것 없죠. 하지만 우린 특수한 상황이잖아요.”
서로의 약점을 잡고 1년간의 계약 결혼을 하기로 한 사이였다. 후계자를 원하는 관계도 아니라, 일반적인 귀족들의 정략결혼과도 조금 달랐다.
“하지만 결혼한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지. 그리고 앞으로 난 그 역할에 충실할 생각이고.”
믿기지 않지만 진 로이슈덴은 제 약혼자로, 그리고 결혼 후엔 남편으로 그 역할에 충실할 것이고 말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하지만 질문은 곧 목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 건지. 로엔은 갑자기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그가 못내 의심스러웠다.
“그러니까…… 저 때문이란 거죠?”
로엔이 의구심을 가득 품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진이 마땅찮은 표정으로 로엔을 쏘아보다, 슬쩍 시선을 피한다.
“정확히는 알렉 때문이지. 알렉이 가 보라고 해서 온 거니까. 로열 에스콧에서 도움을 받았으니 갚는 게 도리라고 하더군.”
이제야 대충 상황이 짐작이 됐다. 불안하게 들끓던 의구심 역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럼 그렇지. 알렉 때문이었어.’
제게 어미 새처럼 굴던 알렉이 무심하고 냉정한 주인을 채근했을 모습이 떠오르자,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알렉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대체 무슨 방법을 쓴 건진 모르겠지만 완전히 구워삶아 놓았더군. 제 주인인 내게 간 크게 잔소리를 할 만큼.”
진의 표정이 불만스러운 듯 찌푸려진 반면 로엔의 눈가는 예쁘게 접혔다.
눈을 제외하곤 다 가리고 있었지만 그녀가 기쁘게 웃고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다음에 만나면 고맙다고 해야겠네요.”
들뜬 목소리가 갑판 위를 울렸다.
진은 홀린 듯 로엔을 바라보다 제가 너무 오래 로엔을 바라보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곤 재빨리 고갤 돌렸다. 그리곤 평소보다 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알아서 해. 그리고 결혼은 한 달 후가 좋겠어. 싫으면 지금 말해.”
“아니요. 저도 좋아요.”
“폐하껜 내가 다시 한 번 말할게. 오늘 같은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거야.”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한두 번 겪은 일도 아니고. 사실 괴물 공작인 제가 공작님 같은 분과 결혼한다면 누구라도 믿지 않을 테니까요.”
로엔이 상관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러자 진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전엔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부턴 안 돼. 널 무시하는 건, 날 무시하는 것과 같으니까. 그러니 앞으로 참석할 파티가 있으면 미리 연락해. 최대한 참석해 볼 테니까.”
“아니요, 그럴 것까진…….”
“왜? 또 다릴 삔 척 거짓말이라도 하게?”
진의 시선이 천이 묶여 있는 발로 향하자, 로엔은 드레스 자락을 끌어 내려 발목을 감췄다.
로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껏 남의 도움을 받아 본 적도, 받을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 일을 반추해 봤을 때 그리 나쁘진 않았다. 무엇보다 제 앞에서 입도 뻥긋 못하는 레이디들을 보며 통쾌함을 느꼈다.
거기다 멸시와 경멸이 아니라, 부러움과 질투가 섞인 시선이라니. 색다른 기분이었다.
“그럼 사양하지 않을게요. 대신 공작님도 제가 필요하면 미리 연락 주세요.”
진이 자발적으로 참석하는 파티라면 건국기념일 파티와 황제의 탄신연이 전부였다. 한마디로 그가 먼저 로엔에게 연락을 취할 일은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런 말은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하지.”
그때 유유자적 움직이던 배가 덜컹 소리와 함께 멈췄다. 그리젤라가 말했던 시간이 벌써 다 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