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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85화 (86/201)

85화

갑작스러운 진의 물음에 로엔은 어리둥절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이유라니. 그런 게 꼭 있어야 하나요?”

로엔의 반응에도 진의 표정은 여전히 불쾌한 듯 굳어 있었다. 그리곤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뱉어 내기 시작했다.

“생각이 바뀌었으면 빨리 말해. 건국기념일 파티에서 뒤통수를 맞고 싶지 않으니까.”

뒤통수를 맞는다니?

아무런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불쾌감을 드러내는 진을 보자, 로엔은 뭔가 제가 모르는 일이 있었음을 짐작했다.

“저는 공작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는지…….”

그러다 문득 짚이는 게 있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검은 베일 너머 진의 표정을 살폈다.

‘설마 에드윈이 에드워드 캐슬리우스를 내게 소개하려 했다는 걸 안 건가?’

어떻게 알게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사실대로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이유가 있었어요.”

“이유? 그게 뭔지 들어나 보지.”

진이 가슴에 팔짱을 끼곤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 삐딱한 눈빛으로 로엔을 바라보았다.

로엔은 마른침을 삼키며 입술을 축였다. 별일도 아닌 일에 진이 이렇게까지 뾰족하게 구는 이유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지적하는 대신 상황을 설명하는 게 먼저였다.

“폐하께서 무슨 의도로 그러신 건진 모르겠지만 저에게 캐슬리우스 백작님을 소개하려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자와 단둘이 차도 마시고, 승마까지 한 건가?”

추궁하듯 들리는 그의 태도에 조금 놀랐다. 하지만 로엔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

“차를 마신 건 우연이었어요. 같이 승마를 한 건, 제가 백작님에게 할 말이 있어서였고요.”

진의 입매가 굳어지는 게 보였다. 은청색의 눈동자 역시 눈에 띄게 날카로웠다.

“오늘 처음 만난 자인데 다정하게 나눌 말이 있다니, 이해할 수가 없군. 다른 목적이 있다면 모를까.”

냉소와 함께 비꼬기까지 하는 진을 보며 로엔 역시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왜 이렇게 삐딱하게 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보아 온 진 로이슈덴 공작은 냉정할 만큼 무심하긴 했지만, 이렇게 냉소적이진 않았다.

“결혼할 상대가 있다고 분명하게 말했어요. 다릴 다친 척하는 것도 캐슬리우스 백작님과 얽힐 일을 막기 위한 것이고요. 소문 하나 추가된다고 해서 더 나빠질 평판도 없지만, 남자랑 얽히는 건 다른 문제라.”

로엔의 설명에 진이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로엔을 보았다.

“그러니까 네 말은 단둘이 승마를 한 건 그를 거절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군.”

다행히 불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상황을 빠르게 이해한 것 같았다.

“네. 동시에 폐하의 귀에도 전해지길 바랐고요. 사실 처음엔 그를 따돌릴 생각이었어요. 제가 마구간에서 가장 빠른 말을 선택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고요.”

하지만 문제는 제 예상을 뛰어넘을 만큼, 에드워드 캐슬리우스가 실력 있는 기수였다는 점이었다.

“그를 따돌리고 싶었는데 오히려 따라잡힌 모양이군.”

전쟁터에 5년을 함께 있었기 때문에 진 역시 에드워드의 승마 실력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맞아요. 전쟁터에서 싸움은 않고 말만 탄 모양이에요. 완전히 제 판단 착오였어요. 실수죠.”

로엔이 어깨까지 으쓱하며 한숨을 내쉬자, 차갑게 굳어 있던 진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목소리 역시 평소의 무감한 목소리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럼 우리의 결혼은 유효한 것이군.”

“설마 제가 계약을 깰까 봐 걱정하신 건가요?”

“내가 왜? 오히려 족쇄를 풀어 박수라도 치려고 했지. 하지만 화는 나더군. 그대가 내 비밀을 빌미로 어떤 요구를 해 올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

“아, 그래서 제가 뒤통수를 친다는 말도 하신 모양이네요.”

로엔이 불쾌한 표정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베일에 얼굴이 가려져 있어 그가 제 감정을 읽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이번 기회에 확실히 해야겠네요. 공작님이야말로 제 뒤통수 칠 생각은 아예 버리시는 게 좋을 거예요. 제가 한 번 문 것은 절대 놓지 않을 정도로 아주, 아주 집요한 성격이라.”

로엔의 경고에 진이 코웃음을 쳤다. 입꼬리가 냉소로 비틀려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기분 좋아 보였다.

‘갑자기 기분이 왜 좋아진 거지?’

협박을 당했는데도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고 있었다.

로엔이 고갤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진이 갑자기 손을 뻗어 왔다.

“어, 무슨?”

놀란 나머지 피해야 하는 것도 잊은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사이 진이 그녀의 얼굴을 덮고 있던 검은 베일을 천천히 걷어 올렸다.

순식간에 얼굴을 가렸던 검은 베일이 사라지자, 진의 은청색 눈동자가 여과 없이 제 눈에 담겼다.

두근.

심장이 눈치도 없이 뛴다.

“놓아주세요.”

로엔이 진의 손을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진은 물러나는 대신 로엔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바라볼 뿐이었다.

집요하게 따라붙는 그의 시선에 로엔은 입술을 깨물었다.

다행히 세실이 챙겨 준 얼굴 가리개 덕분에 그가 로엔을 알아볼 일은 없었다. 하지만 적나라할 정도로 날카로운 눈빛에 초조감이 일었다.

로엔이 의식적으로 고갤 돌리려 하자, 진이 그녀의 턱을 붙잡곤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또다시 두 사람의 시선이 날것 그대로 허공에서 맞닿았다. 복잡한 감정을 담고 얽힌 시선은 떨어질 줄 몰랐다.

사로잡힌다는 말이 이런 뜻인 듯했다. 로엔은 새삼 진의 외모에 감탄하며 숨을 삼켰다.

“다시 한 번 말할 테니 잘 들어. 네가 원하는 만큼 네 장단에 얼마든지 놀아나 줄 테니, 마지막엔 나에게…….”

“록스버그 공작님, 여기 계셨군요. 다릴 다치셨다고 하던데 괜찮으신가요?”

갑자기 들려온 그리젤라의 목소리에 로엔이 재빨리 그의 손을 밀어냈다. 타인의 등장으로 두 사람을 감싸고 있던 팽팽한 긴장감 역시 순식간에 사라졌다.

로엔은 안도하며 떨리는 손으로 검은 베일을 내렸다. 그리곤 바짝 다가서 있는 진을 슬쩍 밀어내며 낮게 속삭였다.

“좀 비켜 봐요.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겠어요.”

제 경고에도 불구하고 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떨어질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로엔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의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하지만 베일을 쓰고 있는데도 그의 시선이 집요하게 느껴져 얼굴이 붉어질 정도였다. 무엇보다 그가 마지막에 하려 했던 말이 뭔지 신경이 쓰였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당장에라도 묻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대신 로엔은 그리젤라 쪽으로 고갤 돌렸다.

“레이디 그리젤라.”

로엔은 침착함을 가장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허둥지둥 배에 오르던 그리젤라가 거의 붙다시피 서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하곤 걸음을 멈췄다.

진의 눈치를 살피며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그리젤라를 보며, 로엔은 진이 에드윈의 계획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깨달았다.

눈치 없이 재잘거렸을 레이디들의 모습이 눈에 그려졌다.

“괜찮으신가요?”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리젤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는다. 그 뒤론 레이디들과 에드워드가 서 있었다.

“제가 여러분들을 놀라게 한 모양이네요. 보시다시피 많이 다친 것 아니고, 말에서 내리다 발목이 조금 삐끗한 정도예요. 걱정할 정도는…….”

“걱정할 정도인지 아닌지는 의원에게 보이고 난 다음에 판단하는 게 좋겠군.”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진이 서늘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가든파티의 호스트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그리젤라를 책망하는 듯 보였다.

로엔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진을 보았다. 분명 조금 전에 제 장단에 놀아나 주겠다고는 했지만 이렇게 바로 실행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헙, 믿을 수가 없네요. 로이슈덴 공작님이 록스버그 공작님의 편을 들다니.”

딴엔 눈치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 듯 했지만, 좁은 배 위에서 샬럿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게 더 불가능했다.

레이디들의 표정 역시도 당혹감과 경악으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리젤라가 샬럿에게 제발 그 입 좀 다물라는 경고를 보낸 후, 재빨리 진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곤 서둘러 로엔에게 사과했다.

“어, 네. 저도 제 불찰이었다고 생각해요. 이곳이 처음인 록스버그 공작님께 숲은 위험하다고 미리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록스버그 공작님.”

내가 원했던 건 이게 아닌데…….

로엔은 이 상황이 조금 난처했다. 귀족들 앞에서 대놓고 제 편을 드는 진이 고맙긴 했지만, 발목을 다친 게 거짓말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러다 저를 바라보고 있던 에드워드 캐슬리우스 백작과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흠칫 놀라며 시선을 피했다.

‘맞다. 내 말이 거짓말이란 걸 알고 있는 공범자도 있었지.’

시선을 피하는 에드워드를 보자 이 상황이 더 불편하게 느껴졌다. 최대한 빨리 일을 마무리하고 벗어나고 싶었다.

“저기…… 공작님의 발목을 의원에게 보이는 게 맞긴 한데, 이곳이 칼라일과 떨어진 곳이라…….”

이곳의 위치상 쉽게 의원을 부를 수 없는 모양이다. 난처해하는 그리젤라에겐 미안했지만, 꾀병을 부리고 있는 로엔에겐 거짓말이 탄로 날 일이 없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 정도는 아니니 너무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레이디 그리젤라. 돌아가서 치료하면 될 일이고요.”

로엔이 정말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정말 그래도 되시겠어요?”

“네, 그러니 걱정 마세요.”

로엔의 대답에 그리젤라의 얼굴에 안도감이 떠올랐다. 이곳으로 오는 내내 조마조마했던 모양이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야…… 어?”

그때 배가 바람을 타고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놀란 로엔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말 배가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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