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어, 그게…….”
머뭇거림은 분위기를 더욱 험악하게 만드는 꼴이었다. 하지만 그리젤라는 지은 죄가 있어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진의 은청색의 눈동자가 찌를 듯 그리젤라를 향했다.
그의 차가운 서슬에 그리젤라는 본능적으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공작님, 진정하세요. 별일 없을 겁니다. 함께 계시는 캐슬리우스 백작님이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그리고 록스버그 공작님은 백작님에게 관심도 없…….”
입을 열 때마다 할 필요도 없는 말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그리젤라는 낭패감에 입을 다물었다.
“캐슬리우스라면, 에드워드 캐슬리우스 백작을 말하는 겁니까?”
“아, 네. 혹시 백작님을 아시나요? 그럼 더 잘됐네요.”
진이 에드워드와 아는 사이라는 말을 듣곤, 그리젤라는 그나마 안도했다.
“공작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캐슬리우스 백작님이 워낙 점잖고 신사적인 분이라 저희도 걱정은 하지 않았답니다. 무엇보다 록스버그 공작님이 감기 기운이 있어 식사를 하지 못하고 티룸으로 옮겨 차를 드셨거든요.”
그리젤라가 열심히 변명을 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옆에 앉아 있던 샬럿이 끼어들며 함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맞아요. 그런데 캐슬리우스 백작님이 식사도 마다하시고 티룸으로 가셔서 공작님과 함께 차를 드셨잖아요. 얼마나 배려심이…….”
“어, 공작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이 불쾌한 표정으로 자릴 박차고 일어섰다.
그 서슬에 놀라 그리젤라는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다 균형을 잃고 살짝 휘청거리기까지 했다.
옆에 있던 샬럿이 붙잡아 주지 않았다면 엉덩방아를 찧었을 터였다.
“공작님, 잠깐 기다려…….”
그리젤라가 다급히 진을 불렀다. 그를 붙잡아 진정시키지 않는다면, 조금 전 레이디 베스가 농담처럼 말했던 치정 싸움의 정점인 결투를 보게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진은 멈출 생각이 없는 듯 그리젤라의 말을 무시한 채 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모두가 숨을 죽이며 입술을 깨무는 사이, 닫혀 있던 티룸 문이 열렸다. 밖에서 기다리던 하녀장이 참지 못하고 문을 연 모양이었다.
초조하게 서로를 바라보던 레이디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으로 향했다.
‘어, 이건 또 무슨 상황인 건지.’
그리젤라는 입을 떡하니 벌린 채 입구에 서 있는 에드워드 캐슬리우스 백작을 바라보았다. 아직 티룸 안에 감도는 서늘한 공기를 감지하지 못한 듯 에드워드의 표정은 해맑기까지 했다.
“다들 여기에 계셨군요. 그런데 호수에서 뱃놀이를 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공작님과 함께 시간 맞춰서 돌아왔더니 호수에 아무도 계시지 않아 놀랐습니다. 어, 로이슈덴 공작님?”
뒤늦게 진을 발견한 에드워드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졌다. 순식간에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그리젤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일이 무섭게 꼬이고 있었다.
“캐슬리우스 백작님, 오셨군요. 로이슈덴 공작님이 오셨다고 하셔서 티룸에서 뵙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저희도 곧 호수로 나갈 생각이었고요.”
그리젤라는 어색함을 감추며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에드워드가 진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아, 그러셨군요.”
“록스버그 공작은 어디에 있지?”
날카롭게 날이 선 진의 목소리가 에드워드를 추궁했다. 시선을 피했던 에드워드의 시선이 다시 진에게 향했다.
“공작님은 승마 도중에 발목이 다치셔서 호수에…….”
“이런 미친. 다친 사람을 혼자 두고 오다니.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널 용서하지 않겠다, 캐슬리우스 백작.”
에드워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이 욕설을 뱉어 내며 밖으로 나갔다.
티룸 안에 남겨진 사람들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 * *
“무슨 일 있나? 왜 이렇게 늦지?”
로엔은 저택 쪽으로 시선을 주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 앉아 있는 자리가 불편해 몸을 뒤척였다. 에드워드가 저택으로 가기 전에 모포 대신 잔디에 깔아 준 외투였다.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
로엔은 마땅찮은 시선으로 외투를 보았다.
발목을 다친 척을 해야 했기 때문에 앉아 있긴 해야 하는데, 하필 깔고 앉아 있는 게 에드워드 캐슬리우스 백작의 외투란 게 마음에 걸렸다.
고민 끝에 로엔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괜한 소문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다.
바닥에 깔린 외투를 집어 들고는 옷에 묻은 풀을 털어 내는데, 인기척이 들려왔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저택으로 갔던 에드워드가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백작님, 무슨 일이던가요?”
별생각 없이 고갤 돌리던 로엔은 서늘한 기세로 저를 쏘아보고 있는 진을 발견하곤 멈칫하며 숨을 삼켰다.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외투를 떨어뜨린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공작님이 여긴 어떻게…….”
“그대야말로 어떻게 된 거지? 다릴 다쳤다고 하던데.”
진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로엔을 두 팔로 안아 들었다.
“허헙!”
너무 놀라면 입에서 바람 빠지는 이상한 소리도 나는 모양이었다. 말릴 새도 없이 로엔은 그의 품에 안겨 호수에 띄워져 있는 배로 향했다.
“잠깐만. 공작님, 내려 주세요. 이러지 않으셔도 돼요.”
그가 향하는 곳이 배라는 사실을 깨달은 로엔은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렸다.
“얌전히 있어. 떨어지고 싶지 않다면.”
화가 난 듯 서늘한 목소리에 로엔은 베일 너머로 그를 응시했다. 여기로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의 심기가 굉장히 불편해 보였다.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정말 이러지 않으셔도 된다고요. 진짜로 다릴 다친 게 아니라고요.”
로엔이 비밀을 얘기하듯 낮게 속삭였다. 그러자 성큼성큼 걷던 진이 걸음을 멈추곤 로엔을 내려다보았다.
“그것 좀 치워 봐. 얼굴 좀 보게.”
진이 당장에라도 베일을 벗길 태세로 채근하자, 당황한 로엔은 두 손으로 베일을 꼭 움켜쥐었다.
“안 돼요.”
“왜 안 된다는 거지? 혹시 얼굴을 꼭꼭 숨겨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겠지?”
그의 질문에 로엔의 어깨가 살짝 굳어졌다. 아드리안 제국 사람들이라면 로엔이 검은 베일을 쓰고 다니는 이유를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진 로이슈덴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묻고 있었다.
설마, ‘그가 알고 있나?’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그가 시모네타와 제가 동일인물이란 사실을 알고 있지 않다면 이런 질문을 할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 저를 쏘아보는 은청색의 눈동자가 예리한 빛을 띠며 반짝이고 있었다.
‘아니야. 알 리 없어. 지금껏 알고 있다는 눈치조차 없었잖아.’
불안이 엄습해 왔다. 그러나 침착해야 한다. 만에 하나 그가 알고 있다고 해도, 저는 무조건 잡아떼야 할 판이었으니까.
로엔은 초조함을 숨긴 채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여상하게 말했다.
“당연히 이유가 있죠. 설마 잊은 건 아니실 테죠? 10년 전 마차 사고로 제 얼굴과 몸에 흉측한 상처가 있는걸요. 혹시 제게 모멸감을 주려는 것이라면…….”
“제길!”
진이 고갤 돌리며 욕설을 짓씹는 소리가 들려왔다. 찌푸려진 미간과 마땅찮은 표정까지. 잊고 있었던 뭔가를 그제야 깨달은 듯 낭패가 섞인 얼굴이었다.
로엔은 그의 미세한 감정 변화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썼다.
고갤 돌렸던 진이 한숨을 내쉬며 로엔을 내려다보았다.
“잊은 건 아니야. 하지만 의식하지 않은 건 맞아. 네 흉터 따위 내겐 아무렇지 않으니까. 네게 모욕을 주려는 건 더더욱 아니고.”
불친절한 설명이었지만 결과적으론 진 로이슈덴은 로엔이 괴물이든 아니든 상관없으며, 그에게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란 걸 말하고 있는 듯했다.
기분이 아주 묘했다. 그리고 조금 전 느꼈던 불안감과 그의 표정에 드러났던 위화감 역시 사라졌다.
그래, 그가 제 비밀을 알 리 없었다.
무엇보다 진 로이슈덴은 타인에겐 냉정하다고 할 만큼 관심조차 없는 사람이었다. 그 정도로 무심한 성격이니 충분히 제 얼굴에 흉터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었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고맙네요. 그리고 설명하자면 아주 긴데, 진짜로 다릴 다친 건 아니에요. 그러니 그만 내려 주세요.”
한껏 누그러진 목소리에 진의 시선이 다시 로엔에게 느른하게 들러붙었다.
“다친 건 아니지만 다친 척은 해야 한다는 소리처럼 들리는데,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네 장단에 맞춰 놀아나 줄 테니까 그만 버둥거려.”
이유를 캐묻지 않은 건 고마웠지만, 로엔은 그의 품에 안겨 배에 타야만 하는 이 상황은 그리 달갑지 않았다.
‘뱃멀미가 있다고 솔직하게 말을 할까?’
잠시 고민하는 사이 로엔은 진의 품에 안겨 어느새 배 위에 있었다. 늦은 모양이었다.
배에 오른 진은 로엔을 갑판 위에 앉히곤 발목을 살피기 시작했다. 분명 괜찮다고 말했는데도 다친 것처럼 발목을 살피는 그를 보자, 로엔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서둘러 그의 팔을 잡아 일으키며 낮게 속삭였다.
“진짜예요. 안 다쳤어요. 사정이 있어서 천만 감아 놓은 거예요.”
“대체 무슨…….”
무슨 사정이냐고 물으려다 그만뒀다. 이미 그녀의 장단에 놀아나 주겠다는 말까지 한 마당에 더 추궁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배에 오른 순간부터 고용인들이 두 사람을 흘끗거리는 게 보였다. 아마 그들 눈엔 두 사람의 모습이 애틋한 연인처럼 보일 터였다.
“좋아, 설명은 나중에 듣기로 하지.”
로엔이 안도하며 고갤 끄덕였다. 충격이 좀 가시자, 그제야 로엔은 그가 왜 이곳에 왔는지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런데 가든파티엔 왜 오신 거예요? 파티에 참석하시는 걸 귀찮아하지 않으셨나요?”
“초대를 받았으니까.”
다른 이유가 뭐 있겠냐는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평소보다 더 날이 선 진의 반응에 로엔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의 태도가 더는 질문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사실 로엔 역시 딱히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곤 생각지도 않았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이었는데, 화들짝 놀라며 생각 이상으로 화를 내는 그를 보자 의구심이 생겼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어서 온 건 분명해 보였다. 그게 무엇인진 짐작도 되지 않았지만.
“저도 딱히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냥 예의상 물어본 거지.”
로엔이 기분이 상한 듯 삐딱하게 반응했다. 그러자 진이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럼 나도 예의상 물어봐야겠군. 캐슬리우스 백작과 단둘만 승마를 했다던데, 내가 꼭 알아야 할 다른 이유가 있나?”
응? 이건 또 무슨 소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