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그리젤라가 귀족가의 영애들과 함께 1시간의 짧은 승마를 끝마치고 돌아왔을 때, 응당 저택에 있어야 할 집사 젠이 마구간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젤라 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평소와 달리 바짝 긴장한 얼굴로 서 있는 젠을 보자, 그리젤라는 덩달아 불안감이 엄습해 옴을 느꼈다.
하지만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고삐를 마구간지기에게 건넸다. 그리곤 레이디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의식하며 낮게 속삭였다.
“젠, 무슨 일인데 그래?”
그리젤라의 물음에 젠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맞았다. 그러다 손님을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게 했다는 게 떠올라, 재빨리 말문을 열었다.
“지금 로이슈덴 공작님이 티룸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조급하게 울리는 젠의 목소리에 순간 마구간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분명히 로이슈덴 공작이라고 듣긴 했지만, ‘그가 왜 여길?’ 하는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라 누구 하나 바로 반응할 수가 없어서다.
“로이슈덴 공작님이라면, 우리가 아는 그분이 맞는 거지?”
정신을 재빨리 수습하긴 했지만 그리젤라는 너무 놀란 나머지 평소와 달리 바보 같은 질문을 하고 말았다.
슬쩍 돌아보니 귀족가의 레이디들 역시 젠의 대답을 기다리며 잔뜩 긴장해 있었다.
“그렇습니다.”
젠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숨죽이며 서 있던 레이디들이 한꺼번에 말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요. 로이슈덴 공작님이 가든파티에 오시다니.”
“대체 무슨,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제 말이요. 설마 우리 중에 마음에 둔 레이디라도 있어서 온 건 아니겠죠?”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요.”
다소 황당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유야 뭐가 됐든 로이슈덴 공작의 등장만으로도 레이디들을 들뜨게 하기엔 충분했다.
그때 샬럿이 그리젤라 쪽을 흘끗댔다. 뭔가 잔뜩 기대한 표정이었다.
“혹시 레이디 그리젤라께서 로이슈덴 공작님을 초대하신 건가요?”
“어, 그러니까, 폐하의 명령으로 초대를 한 건 맞지만…….”
로이슈덴 공작이 초대를 받아들여 가든파티에 나타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세상에! 이제 로이슈덴 공작님도 파티며 무도회에 참석하실 모양이네요. 레이디 그리젤라의 초대에 응한 걸 보면요.”
샬럿을 비롯한 귀족가의 레이디들은 벌써부터 파티며 무도회에서 진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잔뜩 흥분한 눈치였다. 그리젤라는 철없는 레이디들의 반응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사태의 심각성을 아는 건 그나마 젠뿐인 것 같았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벌써 30분째 기다리고 계십니다.”
젠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그리젤라는 선뜻 마구간을 나설 수 없었다.
철부지 레이디들이야 아드리안 제국에서 가장 잘생긴 귀족이 나타났으니, 호들갑을 떨며 기뻐할 수 있었지만 그리젤라는 아니었다.
만에 하나 로이슈덴 공작이 가든파티에 온 이유가 록스버그 공작 때문이라면…….
‘말도 안 돼. 분명 폐하께선 소문이 거짓이라고 했어.’
그리젤라는 며칠 전 에드윈과의 만남을 떠올렸다.
황궁으로 부른 에드윈은 그리젤라에게 가든파티를 제안했다. 제 사촌인 로이슈덴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면서 사교계에 떠도는 소문은 거짓이라고 말했다.
거기다 추문에 시달리는 록스버그 공작이 안타깝다는 말과 함께 좋은 남편감을 소개해 주고 싶다고 했다.
그 말에 솔깃했다. 지난번 캠벨 후작가의 파티에서 로엔에게 도움을 받은 터라, 그녀 역시 어떤 방법으로든 갚고 싶었다.
그래서 저답지 않게 오지랖을 부려 에드윈의 중매 계획에 동참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조금 이상하긴 하네요. 로이슈덴 공작님은 원래 황실 파티 외엔 참석하지 않는 분이시잖아요. 레이디 그리젤라께선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레이디 베스가 그리젤라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모처럼 날카로운 질문을 했다.
“네, 그러니 이제 가서 알아봐야죠.”
그리젤라는 긴장감을 감추며 젠을 따라 티룸으로 향했다.
티룸에 도착한 그리젤라는 잠시 숨을 골랐다. 집사인 젠이 그녀의 긴장을 눈치챘는지, 먼저 들어가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아니야. 내가 들어갈게. 너는 제인에게 가서 차를 준비하라고 전해 줘.”
“알겠습니다.”
젠이 복도를 따라 사라지자, 그리젤라는 뒤에 서 있는 레이디들을 향해 시선을 줬다.
레이디들은 설렌 표정으로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데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리젤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곤, 티룸 안으로 들어갔다.
“로이슈덴 공작님, 오래 기다리셨다고 들었습니다.”
다급히 안으로 들어가던 그리젤라는 처음의 기세와는 달리 홀린 듯 걸음을 멈췄다. 인기척에 햇살을 받으며 창문 앞에 서 있던 로이슈덴 공작이 비스듬히 몸을 돌렸기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완벽한 외모를 가진 또 사람이 있을까?’
역광을 받아 조각처럼 완벽한 이목구비가 햇살 아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젤라는 놀라 숨을 삼켰다. 사람이 아니라, 예술 작품 같아 현실감이 없어서였다.
특히 서늘한 분위기와 함께 뿜어져 나오는 범접할 수 없는 힘은 그리젤라로 하여금 경외감마저 들게 했다.
불경죄에 해당하겠지만, 막말로 황제인 에드윈보다 더 황제 같았다.
진의 은청색의 눈동자가 무심히 그리젤라를 지나쳐 뒤에 서 있는 레이디에게 닿았다. 하지만 이내 미간이 찌푸려지더니, 다시 그리젤라에게 향했다. 기대했던 뭔가를 찾지 못해 짜증이 난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곧 알 수 있었다.
“록스버그 공작님이 안 보이시는군요. 그사이 집으로 돌아가신 겁니까?”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진의 목소리가 티룸을 울렸다.
로엔의 행방에 대해 묻고 있었지만, 지은 죄가 있던 터라 그리젤라를 비롯해 티룸에 있는 레이디들은 질책이라도 당한 듯 얼어붙고 말았다.
“아니요. 함께 승마를 했는데, 록스버그 공작님은 조금 늦으시는 모양입니다.”
다행히 그리젤라가 침착함을 잃지 않고 선선히 대답했다. 그러자 날카롭던 진의 눈빛이 조금 누그러지더니 알겠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그럼 좀 더 기다려야겠군요.”
더는 볼일이 없다는 듯 진은 그리젤라를 비롯해 레이디들을 향해 등을 돌렸다. 그리곤 티룸 안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창밖을 응시한 채 서 있었다.
“어, 저기…….”
그리젤라는 냉정하게 선을 긋는 진의 태도에 섣불리 말을 붙일 수도 없었다. 대신 레이디들은 진과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 앉아 그의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사람을 보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숲 쪽으로 가신 것 같던데.”
진이 뿜어내는 냉기에 몸을 떨던 샬럿이 그리젤라에게 몸을 바짝 붙인 채 낮게 속삭였다. 진이 들을세라 바짝 긴장한 눈치였다.
“쉿, 공작님께 들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러세요, 레이디 샬럿.”
“하지만 걱정이 되는걸요.”
마구간에서 로이슈덴 공작이 가든파티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느꼈던 흥분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오히려 레이디들의 머릿속은 최근 사교계에 떠돌던 소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당연히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괴물 공작이 아드리안 제국 최고의 남편감을 돈으로 손에 넣다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아니 있어선 안 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티룸으로 들어서자마자 록스버그 공작의 행방을 묻던 로이슈덴 공작의 태도는 그들의 생각이 틀렸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어쩌죠? 지금 록스버그 공작님은 캐슬리우스 백작님과 있잖아요.”
“제 말이 그 말이에요. 이러다 록스버그 공작님을 두고 결투를 하는 건 아닌지…….”
“말도 안 되는 소리. 레이디 캐서린이라면 몰라도, 괴물 공작을 두고 싸움이라니.”
옆에 앉아 있던 베스가 코웃음을 쳤다. 질투심과 시기심 때문인지 이 모임에서 금기어인 캐서린 캔싱턴을 입에 올렸단 사실도 깨닫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돌아가는 분위기론 딱 그렇잖아요. 여기에 오신 목적도 록스버그 공작님 때문인 것 같고.”
“그럼 우린 어떻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록스버그 공작님과 캐슬리우스 백작님을…….”
샬럿이 뒷말은 차마 뱉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레이디들의 시선이 일제히 진에게 향했다. 불안으로 몸이 떨렸지만 창밖을 보며 서 있는 진을 보자 홀린 듯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특히 검은 제복을 입은 그에게선 금욕적인 분위기와 함께 나른한 퇴폐미마저 느껴졌다. 레이디들은 복잡한 심정으로 그런 그를 보며 한숨만 내쉬었다.
똑똑.
그때 티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하녀장 제인이 차를 준비해 온 모양이었다.
그리젤라가 레이디들을 향해 눈빛으로 입단속을 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다.
“로이슈덴 공작님, 시간이 길어질 것 같으니 자리에 앉아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마침 하녀장이 차를 가져온 모양이거든요.”
그리젤라의 제안에 진이 마땅찮은 표정으로 고갤 돌렸다. 은청색의 눈동자와 마주친 그리젤라는 저도 몰래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로이슈덴 공작과 눈이 마주치면, 왜 이렇게 맹수 앞에 선 초식동물처럼 겁이 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멀리 간 겁니까?”
“숲으로 들어가시는 걸 마지막으로 보긴 했지만, 정확히 어디로 가신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어서 앉으세요.”
그리젤라가 자릴 권하자, 진이 마지못해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레이디 그리젤라께선 손님이 돌아오지 않는 상황인데도 속편 하게 차를 마실 여유가 있으신 모양이군요. 사고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사람을 보내야 하는 건 아닙니까?”
진의 비난에 그리젤라는 조금 억울해졌다. 한두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아니고, 숲으로 승마를 간 게 다였다. 그런데 마치 큰일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구는 그의 태도가 조금 거슬렸다.
“그건 아닐 거예요. 혼자 계시는 것도 아니고. 만약 사고가 났다면 벌써 연락이 왔을 테죠.”
“혼자가 아니라니. 같이 있는 사람이 있단 뜻입니까?”
진의 질문에 그리젤라가 아차 싶었는지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그의 비난에 기분이 나빠져 할 필요도 없는 말을 입에 올린 것이다.
“아니요, 그러니까 제 말은…….”
뒤늦게 수습하기 위해 말을 덧붙였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진이 위험한 공기를 내뿜으며 눈을 가늘게 뜨곤 그녀를 쏘아보며 물었다.
“누굽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