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공작님, 말을 선택하시는 게 어려우시면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캐슬리우스 백작의 제안에 로엔은 눈을 가늘게 떴다. 티룸에서 나온 후로 제 눈치를 살피는 캐슬리우스 백작의 태도가 굉장히 정중하고 조심스러워서다.
‘내가 말도 타지 못할 정도로 약하게 보이나?’
그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로엔은 그의 관심이 귀찮기만 했다.
“아니요. 제가 갖고 있는 말들과는 좀 다르긴 한데, 다루기엔 무리가 없을 것 같군요.”
로엔이 선을 긋듯 차갑게 말했다. 더는 여지를 주면 안 될 것 같아서다.
“말을 잘 타시는 모양이네요.”
“떨어지지 않고 타는 정도죠. 그럼 저는 이 말로 할게요.”
로엔은 순하고 얌전한 말을 선택하는 대신 힘이 넘치는 아라비아산 말을 선택했다. 마구간지기가 로엔이 선택한 검은 말에 안장을 올려놓았다.
준비가 끝나자, 흰 암말 앞에 서 있는 그리젤라에게 고갤 끄덕여 보였다.
“록스버그 공작님, 1시간 뒤에 마구간으로 돌아오시면 됩니다. 캐슬리우스 백작님도요.”
“그럼 1시간 후에 뵐게요.”
로엔은 도움 없이 훌쩍 말에 올랐다. 얼굴에 쓴 검은 베일이 바람에 흔들렸다.
로엔은 말고삐를 움켜쥐곤 캐슬리우스 백작을 기다리지 않고 박차를 가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레이디 그리젤라. 늦지 않게 돌아오겠습니다.”
캐슬리우스 백작 역시 말에 오르곤, 로엔을 뒤따랐다.
로엔은 빠르게 말을 달렸다. 하지만 따돌리기 힘들 정도로 캐슬리우스 백작의 승마 실력은 뛰어났다.
거리가 좀처럼 멀어지지 않자, 로엔은 힘껏 달리는 대신 느긋하게 승마를 즐기는 쪽을 선택했다.
얼마나 갔을까?
거릴 유지하며 달리던 캐슬리우스 백작이 로엔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죠?”
“약속한 시간까지 마구간에 도착하려면 지금 돌아가야 합니다.”
로엔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 캐슬리우스 백작을 한 번 흘끗 쳐다보고는 차갑게 말했다.
“먼저 돌아가세요. 저는 답답해서 좀 더 달려야겠어요. 이럇!”
평원을 달리던 로엔이 방향을 틀어 숲으로 향했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캐슬리우스 백작은 말을 멈추곤 결정을 내리지 못한 듯 고민하는 게 보였다.
‘그래, 그냥 돌아가. 돌아가서…….’
하지만 로엔의 바람과는 달리 잠시 고민하던 캐슬리우스 백작이 제 뒤를 따라오는 게 보였다.
“생각보다 끈질기네.”
도무지 그를 따돌릴 수 없으니, 조용한 곳으로 가서 그의 목에 단검이라도 들이대며 협박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황제와의 관계도 떠볼 겸.
숲으로 들어온 로엔은 속도를 조금 늦췄다. 캐슬리우스 백작이 가까워지자 쉴 만한 장소를 찾아 주위를 살폈다.
숲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작은 폭포가 보였다.
“저기 폭포가 있네요. 잠시 쉴까요?”
“그게 좋겠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캐슬리우스 백작이 재빨리 말에서 내렸다. 그리곤 로엔의 고삐를 붙잡더니 손을 내민다.
로엔은 제게 내밀어진 손을 무시하곤 말에서 내렸다.
“도움은 필요 없어서.”
캐슬리우스는 빈손을 내리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백작의 목덜미가 붉어져 있었다.
로엔은 그를 외면한 채 폭포 쪽으로 걸어갔다.
평평한 바위 위에 걸터앉은 뒤 캐슬리우스 백작이 말고삐를 붙들고 물가로 다가오는 걸 지켜봤다.
‘이름이 에드워드라고 했나?’
6척이 넘는 키에 전장에서 잔뼈가 굵어서인지 몸 역시 근육으로 이뤄져 탄탄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짧게 자른 금발이 말을 타느라 흐트러져 이마를 덮자 이전보다 더 어려 보였다.
‘나이가 몇 살이었지?’
얼마 전 캐슬리우스 백작이 죽고 장남이 작위를 물려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도 그 장남이 에드워드였던 모양이다.
“폐하께서 저와 혼인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하던가요?”
말에게 물을 먹이고 있던 에드워드의 어깨가 흠칫 놀라 굳어지는 게 보였다.
“어, 그게. 그러니까…….”
“그냥 던져 본 말인데, 사실인가 보군요.”
로엔이 옆에 놓인 돌을 들어 던졌다. 퐁당 소리와 함께 잔잔하던 물 위에 파문이 일었다.
“공작님! 사실은 그런 게 아니라…….”
에드워드가 난처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의도를 간파당했다는 사실에 무척 놀란 듯 보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신 모양이네요.”
“네.”
순순히 대답하는 에드워드를 보곤 로엔이 헛웃음을 삼켰다. 아니라고 잡아떼야 할 상황에 ‘네.’라니. 에드윈은 염탐꾼을 잘못 선택한 게 분명했다.
“걱정하실 필욘 없어요. 폐하나 레이디 그리젤라에게 말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로엔의 말에도 에드워드의 얼굴은 충격이 가시지 않은 듯 여전히 어두웠다.
“제 말을 믿지 못하는 모양이네요.”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게 아니라, 공작님께서 조금 오해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요.”
“오해라니. 제가 오해할 게 뭐 있었나요?”
로엔이 의아한 듯 에드워드를 보았다. 기가 죽은 표정이 정말 덩치는 큰 곰 같았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폐하께서 록스버그 공작님과의 혼약을 제안하신 건 맞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작위를 물려받은 터라 자리를 잡지 못한 것 역시 사실이고요. 하지만 거절했습니다.”
에드워드가 슬쩍 로엔의 눈치를 살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괴물 공작과 결혼하겠다고 나설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죄송합니다, 공작님.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하지만 오늘 티룸에서 공작님을 뵙곤 제가 잘못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뭘 잘못 생각했다는 건지 모르겠네요. 폐하의 명령으로 가든파티에 참석한 게 아니란 뜻인가요?”
“그건 맞습니다. 하지만 나머진 제 선택이었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그 외엔 제 선택이었다니.
그러니까 가든파티에 참석한 것 외엔 저와 함께 티룸에서 차를 마시고, 저를 따라 여기까지 온 게 에드윈의 명령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지금 저에게 반했다는 말을 하는 건가요, 캐슬리우스 백작님?”
로엔은 모호하게 돌려 말하는 대신, 직접적으로 물었다. 하지만 그런 질문을 하는 동안에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체 어떤 모습에?
티룸에서 베일을 잠깐 벗은 게 다였다. 잠깐 얘길 나눈 게 다였고.
그런데 과연 제 어떤 모습에 반한 건지 로엔의 상식으론 납득이 되지 않았다.
“믿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믿기지 않거든요. 하지만 티룸에 앉아 계시는 공작님을 본 순간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체 어떤 심미안을 갖고 있는 걸까?
그러고 보니 전쟁터에서 흉측한 상처를 입은 기사들을 많이 봐 온 터라 흉터엔 무감하다고 했었다.
그런데 그것이 제게 반한 포인트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로엔이 끼고 있던 장갑을 벗었다. 그리곤 흉터로 일그러진 손을 에드워드 앞으로 내밀었다.
“읍…….”
에드워드가 놀라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상처가 얼굴과 목 그리고 등과 팔에 걸쳐 퍼져 있어요. 저와 결혼한다는 건 이런 흉측한 모습을 매일 봐야 한다는 뜻이죠. 그리고 그것보다 더 지독한 건 괴물 공작의 남편이라고 평생 손가락질당할 거라는 거예요.”
이렇게까지 하는데 저를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었을 터다.
그리고 가문의 명예와 평판을 중시하는 아드리안 제국에서 귀족들의 멸시를 견딜 만큼 강심장은 없을 테고.
“저는…….”
“괜찮습니다, 백작님. 현실을 보면 다 그런 거니까요. 만약 돈이 필요하시다면 제가 도울 방법이 있을 겁니다. 그러니 폐하의 제안은 완벽하게 거절하시는 쪽이 좋을 것 같군요.”
로엔이 재고의 여지도 없다는 듯 싹을 잘랐다. 그리곤 벗어 놓은 가죽 장갑을 끼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생각에 잠긴 듯 어두운 표정으로 멍하니 떨어지는 폭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에드워드를 보자, 어느 정도 일단락된 것 같았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었다.
“이제 돌아갈까요? 1시간이 훌쩍 넘어간 것 같은데.”
로엔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다 뭔가 떠오른 듯 에드워드를 향해 말했다.
“백작님, 혹시 손수건을 빌릴 수 있을까요?”
“죄송합니다. 손수건을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괜찮아요. 대용으로 쓸 게 없는 게 아니니.”
로엔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입고 있던 외투의 밑단을 찢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에드워드가 로엔의 팔을 붙잡았다.
“공작님, 지금 뭘 하시는…….”
“별것 아니에요. 쓸데없는 소문을 없애려는 것뿐이니까.”
로엔은 에드워드의 손을 밀어내곤 밑단을 마저 찢어 냈다. 그리곤 멀쩡한 발목에 천을 칭칭 감았다.
“발은 왜…….”
“누군가 물어보면 말에서 내리다 발목을 삐었다고 말해 주세요. 그렇게 하면 저희가 늦은 이유에 대해 이상한 소문은 나지 않을 거예요.”
“꼭 그래야 합니까?”
에드워드의 순진한 물음에 로엔이 눈살을 찌푸렸다. 완곡한 거절을 알아채지 못하는 에드워드를 보며 로엔은 더는 돌려 말하지 않기로 했다.
“이건 부탁이 아니라 요구하는 겁니다, 캐슬리우스 백작님. 폐하를 비롯해 백작님도 믿지 않으시는 것 같지만, 저는 결혼할 상대가 있거든요.”
로엔의 단호한 태도에 에드워드의 얼굴이 처음으로 당혹감으로 창백해졌다. 이제야 제 거절을 완벽하게 이해한 모양이다.
“결혼할 상대가 있다니. 그러면 정말…….”
“네. 그 상대 역시 백작님께서 생각하시는 그분이고요. 그러니 이제 아셨겠네요. 백작님과 폐하께서 하신 행동이 저에게 얼마나 무례한 일이었지.”
숲에서 불어온 바람에 검은 베일이 흔들렸다.
에드워드는 창백해진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눈앞에 있는 여인이 제가 생각했던 만큼 연약하지 않은 존재란 걸 깨달았다.
콘티아나 숲의 폭포수를 배경 삼아 앉아 있는 로엔 록스버그에게선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녀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절대 그럴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주위에서 말하길 로이슈덴 공작님은 절대로…….”
“괴물 공작과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겠죠.”
에드워드는 난처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제 짐작이 맞는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사실 참고는 있지만 굉장히 불쾌합니다. 그리고 제 뜻과는 상관없이 벌어진 오늘 일은, 오랫동안 상처가 될 것 같군요.”
“…….”
에드워드의 얼굴이 죄책감으로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제 생각대로 에드워드 캐슬리우스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운 나쁘게도 에드윈의 체스 판에서 버려질 말이었을 뿐.
“만약 제게 미안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제 장단에 맞춰 주세요. 더는 제 이름 앞에 추문을 덧붙이고 싶지 않으니까요.”
로엔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멍하니 서 있는 에드워드를 지나쳐 말 위에 올랐다.
“백작님, 충고 하나 하자면 폐하 곁에서 멀어지세요. 도움이 필요하면 차라리 절 찾아오시고요. 이럇!”
로엔은 서둘러 숲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에드윈의 얄팍한 계획을 무너뜨렸다고 생각하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 별장으로 돌아가 그리젤라와 저를 비웃던 레이디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줄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