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맞은편에 앉은 캐슬리우스 백작은 긴장한 듯 차를 마시는 동안에도 연신 로엔을 흘끗거렸다.
찻잔을 내려놓은 로엔이 고갤 들어 캐슬리우스 백작을 응시했다.
“제게 할 말이라도 있으신가요?”
“어, 그러니까 되게 무례한 질문인 줄 알지만 꼭 알고 싶은 게 있습니다. 혹시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공작님?”
무례한 줄 알면 질문을 하지 말든가.
삐딱한 생각이 머릿속에 스쳤지만, 로엔은 태연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사실 몇 번이나 망설이는 태도에서 그가 뭘 묻고 싶은지 짐작할 수 있어서였다.
“제가 로이슈덴 공작님에게 공개 구혼을 했던 건 아시는 것 같고. 혹시 로열 에스콧에서의 일이 궁금하신 건가요?”
여상하게 묻는 로엔과는 달리 당황한 건 캐슬리우스 백작이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을 줄은 몰랐나 보다.
“콜록, 콜록.”
차를 입으로 가져가던 캐슬리우스 백작이 사레가 들린 듯 기침을 하자, 로엔이 옆에 있던 냅킨을 건넸다.
“여기. 그리고 당황할 것 없어요. 더한 질문도 받아 본 적 있으니까. 그러니 편하게 물어보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캐슬리우스 백작이 입가를 닦으며 연신 로엔의 눈치를 살핀다.
조금 의외긴 했다. 황제인 에드윈이 보낸 염탐꾼치곤 굉장히 순진한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궁금한 게 뭐죠?”
로엔은 느긋하게 차를 마시기 시작했지만, 캐슬리우스 백작은 여전히 난처한 표정으로 입가를 수습 중이었다.
“질문하는 게 어렵다면, 제가 대신 답해 드릴게요. 사실이에요. 소문처럼 제가 진 로이슈덴 공작님에게 홀딱 반해 있는 중이거든요.”
그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만큼 완벽한 답이었다. 무엇보다 사교계에 떠도는 소문 중에 ‘괴물 공작과 미남’이란 말까지 있으니 더는 설명이 필요 없는 말이기도 했다.
“어떤 면에 반하셨는지 여쭤도 될까요? 그러니까 제 말은 로이슈덴 공작님은 외모적으로 굉장히 뛰어나고 검술 실력 역시 놀라울 정도지만, 실제 성격은 혹독할 정도로 냉정하시거든요.”
“거기다 파렐 수도원의 수도사처럼 금욕적이라 여인에게 관심도 없다죠?”
로엔은 세이지의 말을 떠올리며 농담조로 덧붙였다. 그러자 캐슬리우스 백작의 눈이 화등잔만큼 커졌다. 정말 놀란 모양이었다.
“그걸 어떻게?”
“로이슈덴 공작님이 로열 에스콧에서 다치신 후 제가 저택으로 찾아가 치료해 주었어요. 그때 저택에서 세이지 님을 만났고요. 세이지 님이 직접 말씀해 주시더군요. 전쟁터에 있을 때부터 아주 유명했다고.”
“아아, 그랬군요. 세이지에게 들은 거라면.”
그제야 납득이 된 듯 캐슬리우스 백작이 고갤 끄덕였다. 그리곤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린다.
‘뭐지, 이 캐릭터는? 에드윈이 사람을 잘못 선택한 것 아닐까?’
아주 잠깐 대화를 나눠 본 게 다였지만, 지금까지 파악한 그의 성격으로 보건대 진 로이슈덴과 에드윈의 사이를 오가며 염탐꾼 노릇을 할 만큼 교활하진 못한 것 같았다.
표정이 얼굴에 드러나 거짓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아니지.’
겉으로 드러난 모습으로 귀족들은 판단하는 건 금물이었다. 순진하고 어리숙한 얼굴을 하곤 피도 눈물도 없이 암살자를 보내는 귀족들이 태반이었으니까.
섣부르게 결론을 내리는 대신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그때, 복도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야 오찬이 끝난 모양이었다.
로엔은 벗어 놓았던 베일을 다시 썼다. 이번엔 캐슬리우스 백작도 말리지 않았다.
잠시 후 티룸 문이 열리더니, 그리젤라와 함께 레이디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미리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던 듯 두 사람이 차를 마시는 모습을 보고도, 그리젤라와 레이디들은 놀란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호기심과 안도가 교차되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살피기까지 했다.
‘뭐지, 이 분위기는?’
로엔은 레이디들의 행동이 거슬려 눈살을 찌푸렸다. 제가 모르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차는 입에 맞으셨나요?”
“네. 그리고 중간에 캐슬리우스 백작님께서 오셔서 이야기 상대가 되어 주셨답니다. 친절한 분이시더군요.”
“어머, 다행이에요. 사실 공작님 혼자 계셔야 해서 걱정이었는데, 캐슬리우스 백작님이 먼저 일어나겠다고 하셨을 때 얼마나 안심이 되던지. 생각보다 두 분이서 이야기가 잘 통하셨나 보네요.”
‘이게 아닌가?’ 유난할 정도로 기뻐하는 그리젤라의 반응에 로엔은 미간을 구겼다. 뭐라고 꼭 집어 말할 순 없었지만 그녀의 태도가 굉장히 신경에 거슬렸다.
“소문과는 달리 아름답고 솔직한 분이셔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즐거웠습니다.”
수줍은 듯 어색하게 웃는 캐슬리우스 백작의 반응에 찌푸려졌던 로엔의 미간이 더욱 깊어졌다.
‘대체 이건 또 뭐 하는 상황이지? 설마…….’
순간 로엔의 입매가 굳어졌다. 그제야 묘하게 거슬리던 게 뭔지 분명하게 깨달은 것이다.
‘미친 것 아냐? 이 상황에서 내게 남자를 소개할 계획을 세우다니.’
로엔은 에드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이건 황실의 티룸에서 에드윈과 처음 했던 계약이 파기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건국기념일 파티에서 진과의 결혼을 허락하겠다는 그 약속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약혼녀인 그리젤라까지 동원해 내게 중매를 서다니.’
평소의 에드윈 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거기다 그레이트 모먼트의 특별판에 기사까지 실으면서 그리젤라 캠벨의 초대를 거절할 수 없도록 만들기까지 했다.
그 말인즉, 에드윈이 제 약혼녀를 앞세워 로엔과 로이슈덴 공작의 약혼이 가짜라고 대놓고 말한 것이다.
로엔은 욕설이 튀어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삼켰다.
‘감기라고 말해 놓았으니, 지금이라도 아프다는 핑계로 돌아갈까?’
잠시 고민하던 로엔은 생각을 바꿔 끝까지 파티에 남기로 마음을 정했다. 에드윈이 저를 위해 뭘 준비해 놓았는지 끝까지 지켜보며 즐겨 볼 생각이었다.
“차는 밖에서 마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날씨가 좋아서 호수에 배를 띄울 준비를 해 놓았거든요.”
그리젤라가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밖으로 유도했다.
“캐슬리우스 백작님, 록스버그 공작님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간혹 호수에 바람이 불면 위험하기도 해서요.”
“걱정 마십시오, 레이디 그리젤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미치겠네. 그러니까 뱃놀이라 이거지?
뱃멀미가 있는 로엔에겐 배는 쥐약이었다. 제 기억으로 에드윈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참석했던 선상 파티에서 로엔이 뱃멀미로 고생을 했던 걸 기억하고 있을 터였다.
로엔은 쓰게 웃었다. 힘든 오후가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떨쳐 내지 못한 채, 일행을 따라 호수로 향했다. 날씨는 그녀의 마음과는 달리 화창하기만 했다.
* * *
콘티아나 숲을 끼고 있는 호수는 제법 컸다. 별장에 딸린 호수라 작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숲에서 바람까지 불어오자 호수 위에 떠 있는 배가 위험스러울 정도로 흔들렸다.
로엔은 주먹을 꽉 쥐곤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금이라도 뱃멀미가 있다며 거절하는 게 좋지 않을까 고민했다.
“아직 준비가 덜 돼, 뱃놀이를 하려면 시간이 거릴 것 같으니, 먼저 산책을 하는 건 어떨까요? 아님, 승마를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리젤라가 로엔과 캐슬리우스 백작을 번갈아 보았다.
로엔이 보기엔 뱃놀이 준비 같은 건 완벽하게 끝난 것 같았지만, 애써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무슨 속셈으로 승마를 제안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로엔의 입장으로선 당장 배에 타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하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로엔은 그리젤라를 보았다.
사실 그리젤라를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그리젤라 역시도 약혼자이자, 황제인 에드윈의 부탁으로 중매쟁이 역할에 충실한 것뿐이었으니까.
‘남쪽 섬보단 광산 쪽이 더 좋겠어.’
로엔은 돈을 좀 더 써서라도 귀족들이 로이슈덴 공작이 저와 결혼한다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게 못을 박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공작님, 산책을…….”
“아니요. 승마가 좋겠군요.”
로엔이 캐슬리우스 백작을 지나쳐 마구간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럼 저희도 승마가 좋겠네요.”
그리젤라의 목소리가 한껏 들떠 있었다. 로엔은 걸음을 옮기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히 레이디들은 산책을 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승마를 하려는 모양이다.
그러다 레이디들이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저와 캐슬리우스 백작을 번갈아 보는 걸 발견하곤, 눈살을 찌푸렸다.
그제야 로엔이 오찬장에 들어가기 전까지 나눴던 얘기가 뭔지 깨달아서다. 처음부터 다 한통속이었다.
‘내 의사와 상관없이 중매를 하는 꼴이라니.’
분명 레이디들은 괴물 공작인 제가 훈남인 캐슬리우스 백작과 결혼할 기회를 잡게 되었으니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라고 생각할 터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지금껏 의도적으로 사교계에서 천덕꾸러기가 된 것이었지만, 이런 것까진 용납할 생각은 없었다.
오늘은 입이 썼다.
마구간에 도착한 로엔은 무리들 사이에서 멀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뱃멀미가 있어서 배를 타지 못할 테니 핑계도 필요하던 참이었다.
길을 잃었다고 하며, 뱃놀이가 끝날 즈음 호수로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러기 위해선 그 전에 캐슬리우스 백작을 따돌려야 했다.
‘그게 가능할진……. 불가능하겠지? 말이라면 전쟁터에서 여한이 없을 정도로 탔을 테니까.’
그렇다면 방법을 바꾸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