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신가요?”
옆에서 들려온 그리젤라의 목소리에 로엔이 제 앞에 놓인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먹기 좋게 구워진 고기가 형태를 알 수 없게 난도질되어 있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저도 모르게 마구잡이로 잘라 놓은 모양이다.
“고기가 부담스러우시면 생선 요리를 가져오도록 할게요.”
그리젤라가 하녀장을 부르려 하자 로엔이 재빨리 저지했다.
“아닙니다, 레이디 그리젤라. 콜록, 콜록. 사실 어젯밤 창문을 열고 잤더니 감기에 걸린 모양입니다.”
“아, 그래서 입맛이 없으신 모양이었네요. 그럼 식사가 불편하시면 차를 좀 가져다 드릴까요?”
친절하고 상냥한 그리젤라의 태도에 로엔은 거짓말을 하는 게 미안해졌다.
거짓말을 한 이유는 베일과 얼굴 가리개까지 쓰고 식사를 하는 게 영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제 흉터에 경기를 할 레이디들을 생각하자 벗는 것도 꺼림칙했다.
“네, 그게 좋을 것 같군요.”
“그럼 차를 내오라고…….”
“아니, 그것보다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하녀장을 부르려던 그리젤라가 몸을 틀어 로엔을 응시했다.
“뭐든 말씀하세요, 공작님.”
“기침이 나올 것 같아서 그러는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먼저 자릴 옮겼으면 해서요. 티룸에서 오찬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으면 합니다.”
“아.”
그런 부탁을 할 것이라 예상하지 못한 듯 그리젤라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 로엔이 쓰고 있는 검은 베일에 시선에 닿았다.
그제야 로엔이 음식을 먹지 않은 이유를 깨달았는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네, 공작님. 편하게 차를 마실 수 있게 티룸으로 안내해 드리라고 하겠습니다. 제인.”
“네, 아가씨.”
“공작님을 티룸으로 먼저 안내해 주겠어? 감기 기운이 있으시다니, 그에 맞는 차를 내와. 그리고 간단히 먹을 다과도 함께 가져다 드리고.”
“알겠습니다. 공작님, 저를 따라오시겠습니까?”
로엔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식사 중인 레이디들을 향해 양해를 구하듯 고갤 숙여 보였다. 그리곤 하녀장인 제인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정말 감기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봐요.”
로엔이 오찬장을 나서자마자 의구심이 가득 찬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그녀의 말에 동의하듯 따라 웃는 웃음소리 역시도.
“레이디 로라, 무례하군요. 지금 공작님의 말씀을 의심하는 건가요?”
“아니요, 레이디 그리젤라.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앞으로 조심해 줘요. 폐하께서 아끼시는 분이란 걸 기억하시고요.”
오찬장과 멀어지자 더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저를 비웃던 레이디 로라에게 경고를 준 이가 그리젤라란 건 알 수 있었다.
굳어 있던 로엔의 얼굴이 베일 안에서 조금 누그러졌다.
“이곳이 티룸입니다. 편히 쉬고 계시면 차와 간단한 다과를 가져오겠습니다.”
하녀장이 예를 갖춘 뒤 자릴 떴다. 혼자 남겨진 로엔은 티룸 안으로 들어가 적당한 곳에 자릴 잡고 앉았다.
평소와 달리 베일 안에 얼굴 가리개까지 했더니 유난히 답답하게 느껴졌다.
잠시 고민하던 로엔은 쓰고 있던 검은 베일을 벗었다. 이제 막 오찬이 시작되었으니 레이디들이 오찬을 끝마치고 티룸으로 오려면 아직 1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베일을 벗느라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있을 때 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하녀장이 벌써 차를 가져온 모양이었다.
“들어와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문이 열리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로엔은 뒤를 돌아보는 대신 계속해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세실이 아침저녁으로 빗질을 해 준 덕분에 머리카락을 쓸어내릴 때마다 윤기 나는 황금빛 머리카락이 햇살을 받아 아름답게 빛났다.
머릴 매만지던 로엔은 인기척이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 괴물 공작이 베일을 벗고 있으니 겁이 나 다가오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로엔이 한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차는 테이블에 놔 주겠어요?”
그녀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문 앞에 서 있는 하녀장은 움직일 생각이 없는 듯 미동도 없었다.
‘베일을 다시 써야 하나? 답답한데.’
로엔이 무심한 표정으로 입구 쪽으로 고갤 돌렸다. 그러다 난처한 표정으로 서 있는 남자를 발견하곤 눈살을 찌푸렸다.
‘캐슬리우스 백작이 왜 여기에? 벌써 오찬이 끝난 건가?’
의아해하는 표정을 읽은 듯 캐슬리우스 백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방해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공작님. 원하신다면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겠습니다.”
캐슬리우스 백작이 당장에라도 문을 열고 나갈 것처럼 몸을 돌리는 게 보였다.
“아니에요. 나갈 것 까진 없어요.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캐슬리우스 백작님?”
“저를 아십니까?”
캐슬리우스 백작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야 정복전쟁을 승리로 이끈 기사들 중 하나니까요. 아드리안 제국에서 백작님을 모르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당연한 것 아니냐는 대답에 캐슬리우스 백작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긴장한 듯 잔뜩 굳어 있던 얼굴에 미소가 걸리니 조금 잘생겨 보이기까지 했다.
진 로이슈덴 공작보단 아니겠지만, 레이디들 사이에서 꽤나 인기 있을 법한 얼굴이었다.
“의외로 제가 정복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귀족들이 태반이라, 공작님께서 알고 계서서 좀 놀랐습니다.”
“그래요? 참 이상하네요. 캐슬리우스 백작님 정도라면 사교계의 레이디들 사이에서 아주 인기가 많을 것 같은데요.”
“불행히도 인기가 없더군요. 다른 분이 워낙 인기가 많은지라.”
로엔은 캐슬리우스 백작이 말하는 다른 분이 진 로이슈덴이란 걸 바로 알아차렸다.
“그렇긴 하죠. 아드리안 제국뿐만 아니라 타란 대륙을 들썩거리게 만들 외모니까요.”
로엔이 순순히 수긍하자 캐슬리우스 백작 역시 고갤 끄덕였다. 다른 귀족들처럼 진 로이슈덴에게 경쟁의식을 느끼진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제가 백작님을 아는 것이 왜 의외라고 생각했는지 여쭤도 될까요?”
“별 뜻은 없었습니다. 두 분에 관련된 소문을 들어서.”
“아아, 소문. 제가 로이슈덴 공작님에게 공개 구혼한 걸 말씀하시는 모양이네요.”
로엔이 어깰 으쓱해 보이곤 테이블에 올려놓았던 베일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다시 머리에 쓰려 하자, 당황한 캐슬리우스 백작이 로엔을 제지했다.
“저 때문에 그러시는 것이라면,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나가겠습니다.”
베일을 쓰려던 로엔이 동작을 멈추고 캐슬리우스 백작을 보았다.
“불편한 건 제가 아니라 백작님이 아닐까요?”
로엔의 말에 캐슬리우스 백작의 시선이 로엔의 얼굴로 향했다. 풍성하게 컬을 낸 황금빛 머리카락과 얼굴 가리개에 가려져 흉터가 보일 리는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시선이 닿자 괜스레 긴장이 됐다.
“저는 괜찮습니다. 전쟁터에서 더 지독한 흉터들을 많이 본 터라 전혀 문제될 것도 없고요.”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로엔이 베일을 다시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대화가 이상한 부근에서 끝나서인지,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로엔은 캐슬리우스 백작에게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때까지 어색하게 문 앞에 서있던 캐슬리우스 백작이 초조한 표정으로 뭔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할 말이 더 있으신가요?”
“아니요, 그게 아닙니다.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공작님께서 오해를 하신 것 같습니다.”
오해라고?
대체 뭘 오해했다고 하는지, 로엔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제가 특별히 오해할 게 있나요?”
“공작님의 모습이 병사들처럼 흉측하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소문과는 달리 너무도 단아하고 아름다워 놀랄 정도였거든요.”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생각지도 못한, 아주 엉뚱하다 못해 황당하기까지 한 말에 로엔이 캐슬리우스 백작 쪽으로 고갤 돌렸다.
그러자 로엔의 시선에 목까지 올라온 셔츠 사이로 붉어진 그의 목덜미가 보였다.
‘이쪽도 바람둥인 건가?’
전쟁터에서 싸움은 않고, 연애 기술만 배운 모양이었다. 순하고 말 잘 듣는 덩치 큰 곰처럼 생겨서는 부끄러움도 없이 여인들이 원하는 답을 술술 뱉어 내고 있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군요. 칭찬은 처음이라 믿기지 않지만. 백작님만 괜찮으시다면 함께 차를 마셔도 상관은 없을 것 같군요. 사실 제 외모 때문에 차를 함께 마시자고 청하기가 좀 그랬거든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반색하며 캐슬리우스 백작이 로엔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리곤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릴 잡고 앉았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타이밍 좋게도 차를 가져온 하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작님, 차를 가져왔습니다.”
“들어와요.”
문이 열리고 트레이를 밀고 들어오던 하녀장이 로엔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캐슬리우스 백작을 보곤 멈칫 걸음을 멈췄다.
당연히 로엔 혼자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뜻밖의 인물이 티룸에 있어서 놀란 모양이다.
다행히 유능한 고용인답게 서둘러 표정을 갈무리한 하녀장은 말없이 테이블 위에 찻잔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부르세요. 아가씨께서 특별히 신경 쓰라고 하셨습니다.”
“그럴게요. 고마워요.”
하녀장이 티룸을 나가자,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로엔은 무심한 표정으로 천천히 차향을 음미했다. 그러는 동안 로엔은 그의 시선을 교묘하게 피해 가며 캐슬리우스 백작을 면면히 살폈다.
‘폐하와 어떤 사이인지 어떻게 알아보지? 아니, 왜 레이디들만 참석하는 파티에 오게 된 건지부터 알아야 할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