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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78화 (79/201)

78화

갑작스러운 명령에 알렉이 고갤 들었다. 서류를 확인할 때만 쓰는 동그란 안경이 코끝에 걸려 불안해 보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공작 부인의 방을 새로 단장하라니. 이건 마치 제 주인이 록스버그 공작을 로이슈덴 공작 부인으로 인정한다는 말처럼 들려서다.

“말 그대로야. 오랫동안 비어 있었잖아. 그러니 최대한 사람이 쓸 수 있게 꾸며 놔.”

“예산은 얼마나…….”

침착해야 했다. 여기서 놀란 기색을 드러내며 더 꼬치꼬치 캐묻는다면 제 주인이 버럭 화를 내며 입을 다물 게 분명했다.

“로이슈덴 공작 부인에게 맞게 준비해.”

한마디로 돈이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최상으로 준비하라는 말이었다. 그러자 더욱 궁금해졌다.

‘정말 이 결혼을 진짜로 만드실 생각이신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1년이란 짧은 결혼 생활을 위해 거액을 투자할 이유가 없었다.

“단 1년이라도, 로이슈덴 공작 부인이잖아. 그만한 대우와 존중을 받아야지. 그만큼 가치 있는 사람이고. 너도 그렇게 생각해서 공작을 싸고도는 것 아니었나?”

“네?”

감춘다고 감췄는데 들킨 모양이다. 당혹스러움을 드러내듯 알렉의 코끝에 걸려 있던 안경이 툭 하고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진이 테이블 위에 떨어진 안경을 집어 알렉에게 건넸다.

“결혼으로 묶여 있는 동안은 진짜야. 그것이 계약이든 정략이든 상관없이. 그러니 알아서 준비하도록 해.”

진은 별일 아니라는 듯 여상하게 말했다.

알렉의 시선이 느껴졌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굉장히 많은 눈치였지만 유능한 집사답게 더는 묻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당분간은 비밀이야.”

“언제까지 입을 다물어야 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주인님.”

이유를 묻지도 않고, 기한을 물었다.

“건국 기념일 파티까지야. 그때 공식적으로 발표할 생각이거든.”

“그럼 결혼 날짜는 언제쯤 생각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한 달 뒤가 되지 않겠어? 최대한 빨리 치를 생각이니까.”

대답만 들으면 제 주인이 록스버그 공작과 결혼하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알렉은 무턱대고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제 주인이 록스버그 공작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다.

귀족들의 결혼이 대부분 정략결혼인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간단한 예로 선대 공작 역시도 가문과 가문 사이에 이루어진 정략혼이었으니까.

하지만…… 마음 한편에 제 주인인 진만은 정략혼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반려를 만나길 원했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절대 물어선 안 되는 것까지 묻게 만들었다.

“혹시 시모네타 님도 공작님의 결혼에 대해 아십니까?”

목소리가 떨리지 않아 다행이다.

알렉의 억눌린 목소리에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진의 은청색의 눈동자가 다시 알렉을 향했다.

“그러게.”

안다는 건지, 모른다는 건지.

진의 애매한 대답에 속이 타는 건 알렉이었다.

“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건국 기념일 파티 전에라도 말씀을 하시는 게…….”

“그렇겠지?”

진의 무심한 말투에 알렉이 초조해졌다. 그리곤 안경을 고쳐 쓰며,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말씀하셔야 합니다. 시모네타 님을 위하신다면요.”

무감하던 진의 표정이 바뀌었다. 서늘한 기운이 감돌던 은청색의 눈동자가 선명한 감정을 담고 짙어졌다.

“록스버그 공작을 더 좋아하는 것 아니었나? 난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진의 입가에 재미있다는 듯 미소가 떠올랐다. 알렉은 당황하며, 흠흠 헛기침을 했다. 제 주인이 제 마음을 알고 있다는 게 민망해서였다.

“좋아합니다. 하지만 시모네타 님도 좋아합니다. 그분이 상처받길 원한 적 없습니다.”

무엇보다 알렉은 제 주인인 진이 행복하길 바랐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시모네타가 상처받는 일 따윈 없을 테니까. 아마 좋아하지 않겠어?”

상처받지도 않고, 진의 결혼 소식을 좋아할 거라니. 도무지 그 이유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설마 결혼 후에 시모네타 님을 숨겨진 정부로 두시려는 건가?’

문득 든 생각에 알렉은 고갤 가로저었다.

아니, 절대 그럴 리 없었다. 제 주인인 진 로이슈덴은 록스버그 공작과 결혼하기로 결정한 이상, 또 다른 여인을 정부로 둘 사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결혼으로 묶여 있는 동안 그 결혼은 진짜라고 했고, 공작 부인으로 존중한다고 말했었다.

“알렉,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 너는 내 명령대로 결혼 준비만 차질 없이 하면 돼.”

진이 단호한 태도로 알렉의 머릿속에 떠도는 혼란을 정리했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그럼 나가 봐. 한 달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니까.”

진의 말은 사실이었다. 귀족들의 결혼식은 준비 기간만 최소한 3개월에서 6개월은 걸렸다. 그런데 한 달 안에 모든 준비를 끝내야 했다.

알렉이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정리해 품에 안고는 서재를 나갔다.

문이 닫히자 진은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로엔 록스버그와 시모네타라.”

밀어처럼 속삭이는 나직한 목소리가 고요한 서재 안을 울렸다. 투명한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들어와 그의 조각처럼 얼굴을 비췄다.

심해처럼 속을 알 수 없던 그의 은청색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그리고 그의 입가에도 수수께끼 같은 나른한 미소가 걸렸다.

곧 아드리안 제국의 건국 기념일이었다. 록스버그 공작과의 약혼을 발표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꼭 확인해야 할 일이 있었다.

“시모네타에게 편지를 보내야겠군.”

이제 막 해가 지려는 듯 청명하던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진은 아름다운 아드리안의 석양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 * *

“정말 캠벨 후작가의 가든파티에 참석하시려고요?”

걱정이 잔뜩 묻어 있는 세실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로엔은 거울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한쪽 뺨에 붙인 인피면구를 꼼꼼하게 확인할 뿐이었다.

“주인님, 말씀 좀 해 보세요.”

참다못한 세실이 거울 앞을 막아섰다. 더는 거울을 볼 수 없어진 로엔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갤 들었다.

“또 뭐가 불만인데?”

“어제 발간된 특별판 기사 보셨잖아요. 분명 뒷말하기 좋아하는 레이디들이 주인님을 물어뜯으려 할 텐데 정말 가시게요? 차라리 로이슈덴 공작님에게 도움을 청하시는 건 어떠세요? 함께 파티에 참석하신다면…….”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 그리고 그게 가능할 것 같아?”

진 로이슈덴이 누군가를 위해, 아니 저를 위해 가든파티에 참석한다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파티에 나타나 그 차갑고 냉정한 얼굴로 깽판 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결혼까지 하는 마당에 좀 도와주면 어때서요? 이번 기회에 귀족들 앞에서 눈도장도 찍어 주고, 덩달아 주인님 평판도 올려 주면 오죽 좋아요?”

세실이 불만을 토로하며 볼을 부풀렸다. 그리곤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듯 볼멘소리를 했다.

“정말 비싸게 군다니까요. 잘난 사람들은 다 그렇게 거만한 건가? 우리 주인님은 세상에서 제일 잘나셨는데도, 절대 안 그러는데.”

세실의 투정에 로엔의 입가에 설핏 장난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사실 비싸신 몸은 맞지. 거만해도 될 만큼 완벽한 외모를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아드리안 제국의 레이디라면 그와 결혼하기 위해서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기세던데. 특히 서늘한 눈빛에 담긴 무심함이 퇴폐미의 끝판 왕이라고 하잖아. 아, 생각하니 또 심장이 두근거리네.”

세실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로엔을 보았다.

“주인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뭘 하긴. 지금 내 남자 자랑 중이잖아.”

“주인님, 정말 이러시기예요? 제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펄펄 뛰는데요!”

세실은 억울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결국 로엔은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렸다.

“알고 있으니 너무 열 내지 마. 아직 결혼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도 아니라, 부탁하는 게 좀 그래. 그리고 몸이 다 회복된 것도 아니고.”

그제야 로열 에스콧에서의 사고가 생각났는지 세실이 표정을 풀었다. 상처를 회복하기엔 열흘이란 시간은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알았어요. 더는 말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주인님도 공작님 앞에선 절대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잡힌 물고기한텐 먹이를 주지 않는다잖아요. 주인님이 공작님에게 홀딱 반해 있는 걸 아는 날엔 더 콧대 높게 구실 거라고요.”

어장 관리하는 진 로이슈덴이라니. 상상이 되지 않았다.

제가 보기엔 진은 여자는 물론, 사람 자체에 무관심했다. 굳이 따진다면 귀찮아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러니 그가 어장관리를 한다면, 그 어장에 있는 물고기는 아사해 죽을 게 분명했다.

“괜찮아. 난 물고기가 아니라 낚시꾼 쪽이니까.”

처음엔 제 말을 알아듣지 못해 어리둥절한 얼굴이더니, 이내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세실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우리 주인님이라니까요. 낚시꾼이라니.”

“이제 알았으면, 테이블 위에 있는 베일이나 줘. 오찬을 겸한다고 했으니 지금 출발해야 해.”

“아, 네. 여기 있어요.”

세실이 레이스로 된 검은 베일을 로엔에게 건넸다.

“아 참, 얼굴 가리개도 하고 가시는 게 좋겠어요. 가든파티라면서요. 야외라 바람이라도 세게 불면, 베일이 날아갈 수도 있잖아요.”

“그래, 그게 좋겠어.”

로열 에스콧에서도 세실이 챙겨 준 얼굴 가리개 덕을 톡톡히 보았었다. 로엔은 세실이 건넨 얼굴 가리개를 만지작거렸다.

“라이칸 님이랑 함께 가시는 거죠?”

“왜? 너도 가고 싶은 거야?”

“가도 되나요?”

세실의 눈빛이 기대감으로 반짝인다. 잠시 고민을 하던 로엔이 고갤 가로저었다.

“오늘은 말고 다음에. 어차피 공식적으로 결혼 발표가 나면, 당분간 만물상점을 닫을 생각이거든. 그때 데려갈게.”

세실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만물상점을 닫는 게 아쉬운 모양이다.

“정말 상점을 닫아야 하나요? 저 혼자 해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진 로이슈덴과 결혼하게 되면 록스버그 공작가에 있는 세실을 보게 될 터였다.

세실이 만물상점의 점원이었던 걸 분명 기억할 테고, 그렇게 되면 시모네타와 록스버그 공작에 대한 연결고리를 제공하는 셈이었다.

상점을 닫는 건 무척이나 아쉬웠지만, 의심의 싹이 생기지 않게 차단하는 게 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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