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오후의 햇살이 창문을 통해 서재 깊숙이까지 들어왔다.
진은 메리언이 가져다준 차를 마시며, 느긋하게 오후의 티타임을 즐겼다.
그는 테이블 한쪽에 놓여 있는 그레이트 모먼트의 특별판을 들어 올렸다. 조금 전 서류를 잔뜩 들고 서재로 들어온 알렉이 차를 마시고 있던 진의 테이블에 슬쩍 올려놓고 간 것이었다.
무감한 표정으로 특별판을 살피던 진의 시선이 기사 하나에 고정됐다.
기사는 캠벨 후작가의 영애이자 황제의 약혼녀인 그리젤라 캠벨이 가까운 지인 몇 명을 초대해 가든파티를 연다는 흔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진의 눈을 붙잡은 건, 황제의 약혼녀가 가든파티에 록스버그 공작을 초대했다는 점이었다.
‘그리젤라 캠벨과 록스버그 공작이라.’
아직 에드윈이 록스버그 공작을 적으로 돌리진 않은 모양이다. 제 약혼녀가 대놓고 록스버그 공작에게 친분을 드러내는데도 유감을 표하지 않는 걸 보면.
특별판의 기사에는 록스버그 공작이 로열 에스콧에서 로이슈덴 공작과 사라진 이후 공식적인 자리에 처음 얼굴을 보인다는 점을 지적하며, 황제와 귀족들 앞에서 했던 의미심장한 발언의 진위를 파악할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 쓰여 있었다.
록스버그 공작이 그리젤라의 초대를 받아들여 가든파티에 참석한다면, 가십에 목숨을 건 자들의 먹잇감이 될 운명이란 뜻이었다.
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신문을 접어 테이블에 놓았다.
“흠, 흠.”
헛기침 소리에 고갤 들자, 제 눈치를 살피던 알렉과 눈이 마주쳤다.
“할 말이라도 있나?”
“아닙니다, 주인님.”
알렉이 재빨리 고갤 숙여 서류를 살피는 게 보였다. 진은 알렉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알고 있었지만, 괘씸해 모르는 척했다.
“주인님?”
“안 가. 가야 할 이유도 없고.”
진의 단호한 목소리에 알렉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알았으면 앞으로 이런 일 하지 마.”
진이 테이블에 놓여 있는 신문을 툭 쳐서 바닥에 떨어뜨렸다. 알렉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서둘러 신문을 주어 든다. 그리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작님이 곤란하게 되신 데는 주인인의 책임도…….”
진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그러자 알렉이 재빨리 입을 다무는 게 보였다.
지금껏 한 번도 제 의견에 토를 단 적 없던 알렉이었다. 하지만 요 근래, 특히 록스버그 공작에 관련된 일엔 어미 새처럼 싸고돌고 있었다.
진은 그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걱정되면 여긴 그만두고 록스버그 공작가에 취직하면 되겠군. 네 충성심에 탄복해 한자리 거하게 챙겨 줄지 누가 알아?”
집사의 변심에 질투라도 하는 것처럼 진의 목소리가 유독 퉁명스러웠다.
다섯 살 이후 한 번도 부려 본 적 없는 투정에 알렉의 표정이 순식간에 사색이 됐다.
“무슨 그런 말씀을. 오해십니다. 저는 한 번도 로이슈덴 공작가를 떠날 생각 같은 건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말씀은 하지도 마십시오.”
당황한 알렉이 손사래까지 치며 부정하자 그제야 조금 마음이 누그러졌다.
“지난번에 조사하라고 시켰던 일은 어떻게 됐지?”
진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알렉은 며칠 전 제 주인이 록스버그 공작에 대해 조사하라고 했던 일을 떠올렸다.
“10년 전 사고 이후 딱히 눈에 띄게 록스버그 공작가와 척을 진 가문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어린 상속녀에게 청혼을 하거나, 후견인이 되어 주겠다고 방문한 귀족들이 넘쳐날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하이에나 떼가 따로 없군. 부모를 잃은 어린아이를 두고 청혼에 후견인이라니.”
보지 않아도 속이 시커먼, 탐욕에 찌든 욕망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그런 자들 속에서 굳건히 제 자릴 지킨 어린 로엔의 모습도 떠올랐다.
‘대견하다고 해야 하나? 그 어린 나이에 더러운 진탕에서 무사히 살아남았으니까. 아님, 사고로 인해 얼굴과 몸에 난 흉터가…… 오히려 행운인 건가?’
그런 생각이 들자 씁쓸함에 입이 썼다.
진의 생각이라도 읽은 듯 알렉이 다음 말을 덧붙인다.
“다행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공작님의 몸에 흉터가 있다는 게 알려지면서 귀족들의 방문이 뚝 끊긴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 후부터 주인님도 아시는 것처럼 어린 공작님을 죽이려는 시도가 꾸준히 일어나게 된 것이고요.”
“미친.”
무의식적으로 참고 있던 욕설이 튀어나왔다.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타인의 불행이나 사정 따위엔 관심도 없었던 그였다. 하지만 알렉의 말을 듣는 동안, 10년 전 목격한 마차 사고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죄책감을 가질 이윤 없어. 충분히 도왔고, 사고 소식을 공작가에도 알렸으니까.’
무엇보다 그날 진의 상태 역시 최악이었다. 몸속에 잠들어 있던 드래건의 힘을 처음 각성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제 앞가림하기에도 급급한 상황이었다. 제가 품은 비밀이 알려진다면, 로이슈덴 가문은 반역죄를 물어 멸문이었으니까.
그런데도 자꾸만 뒤가 찝찝했다. 마치 제가 져야 할 책임을 미룬 느낌이었다. 그것도 10년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미친 자들입니다. 어린 소녀를 죽이려 혈안이 되다니. 제가 만약 그때 알았다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 주었을 텐데.”
알렉의 눈동자가 안타까움으로 가득 찼다. 그제야 왜 알렉이 록스버그 공작을 유난스러울 정도로 싸고도는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어린 상속녀에게 닥친 불행은 눈으로 보지 않아도 상상이 될 정도로 진탕이었을 터다. 특히 울타리 하나 없는 어린 여인에겐 더더욱 가혹했을 테고.
“황실에선 어떤 태도를 보였지?”
“그게 조금 이상합니다. 선대 황제께선 알게 모르게 록스버그 공작가에 도움을 주려 한 것 같지만, 현 황제께선 철저히 방관하신 듯합니다.”
진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에드윈이 선대 황제와는 달리 암살 사건을 방관했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정말 변했군. 5년 전엔 이렇게까지 탐욕에 눈이 멀진 않았었는데.”
열등감은 좀 있긴 했지만 다른 자의 죽음에 눈을 감는 이는 아니었다. 그것도 록스버그 공작처럼 불행을 딛고 굳건히 일어난 자에겐 굉장히 관대했었다.
‘그런데 왜 유독 록스버그 공작에게만 그렇게 가혹했던 걸까?’
그러다 잊고 있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내 기억으론 아주 오래전에 록스버그 공작가와 존더부르크 황실 간에 국혼 얘기가 오갔던 것 같은데.”
“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선대 공작부처가 살아 계셨을 때 아주 잠깐 나온 얘기였지만, 제가 알고 있는 바론 선대 록스버그 공작께서 거절하셨습니다.”
“폐하가 아니라, 록스버그 공작이 거절했다고?”
“저도 그 당시 의아해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한동안 묘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록스버그 공작님이 폐하의 제안을 거절한 대가로 공작가가 소유하고 있던 광산과 막대한 전쟁 지원금을 냈다고요. 그리고 실제로 그 광산은 황실의 소유가 되기도 했고.”
알렉의 말을 들을수록 더욱 미궁으로 빠지는 느낌이었다.
만약 알렉이 말해 준 것들이 사실이라면, 어쩌면 에드윈은 록스버그 공작에게 일어났던 암살 사건을 방관만 한 게 아닐 수도 있었다.
진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제길! 대체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 건지.’
재수 없게도 제 추측이 맞는다면 황제에게 미움받은 두 가문이 결혼하는 꼴이었다.
‘완전 눈엣가시겠군. 아니면 한꺼번에 묶어서 단번에 처리해 버릴 기회이기도 하고.’
진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순식간에 험악해진 분위기에 알렉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왜 그러시는 겁니까? 무슨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아니, 별일 아니야. 잠시 생각 좀 하느라. 알렉, 좀 더 알아봐. 그리고 록스버그 공작의 암살 사건에 존더부르크 황실이 개입되어 있는 정황이 발견되면 바로 나에게 알려 줘.”
“걱정 마십시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눈에 띄게 안심이 된 알렉의 얼굴을 보며, 괜히 찝찝했다. 록스버그 공작 일에 지나치게 열을 올린 것 같기도 했다.
“1년간의 정략결혼도 결혼이니까.”
“알고 있습니다.”
이번엔 알렉의 입가에 미소까지 떠올랐다.
그 표정을 보자 진이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곤 괜스레 변명을 덧붙이기까지 했다.
“그런 게 아니라, 로이슈덴 공작 부인의 이름을 달고 있는 동안 죽게 할 수 없어서 그런 거지, 다른 뜻은 없어.”
“그것 역시도 알고 있습니다.”
여전히 웃고 있는 알렉을 보며 진은 혀를 찼다. 더 말해 봐야 저만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지막 말을 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배길 수가 없었다. 진은 결백을 주장하는 죄수처럼 진심을 토로했다.
“네가 뭔가 단단히 오해하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그저 공작이 내 비밀을 알게 되었으니 나도 그녀의 약점 하나를 쥐려는 것뿐이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오해하지 않았으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주인님.”
고개까지 주억거리며 알렉은 순순히 수궁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진은 불쾌감에 자꾸만 화가 났다. 놀림받는 느낌이었다.
진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렸다. 차가 식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의 생각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혼의 첫 번째 이유가 암살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던가?’
진은 한 번도 타인의 생명에 관심을 가진 적 없었다. 오히려 전쟁터에서 5년을 구르는 동안, 살리는 것과는 정반대로 죽이는 것에 골몰했었다.
누군가를 보호하고 지킨다니. 그에겐 굉장히 낯선 경험이었다.
그런데 싫지 않았다. 묘하게 가슴 벅차 오르는 감각에 기분이 좋아지기까지 했다.
타란 대륙을 통째로 삼키는 것도 아닌 고작 힘없는 여인 하나 지키려는 것뿐인데, 지금껏 느껴 보지 못한 설렘까지 경험했다.
정말 미친 게 분명했지만, 그만둘 생각 따윈 없었다.
‘라이칸이었나? 록스버그 공작을 지키는 자가.’
요 며칠, 저택 주변에 낯선 자가 나타나 주위를 살피고 간다는 보고를 받았다. 낯선 자의 머리색이 은발이라고 했으니, 라이칸이란 자일 게 분명했다.
‘흐음, 날 감시하라고 보낸 자인 거군.’
진은 손끝으로 탁자 위를 톡톡 두드리며 조만간 그자를 불러들여 직접 대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알렉, 메리언에게 말해서 공작 부인의 방을 단장하도록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