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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76화 (77/201)

76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알리기 싫은 거였다. 존더부르크 1세가 없애려고 혈안이 되었던 라딘의 예언의 주인공이 바로 진 로이슈덴이란 걸, 아드리안 제국민들이 알게 하고 싶지 않은 거였다.

아드리안 제국에게 영광과 풍요를 가져다줄, 라딘의 예언이 선택한 존재는 오직 존더부르크 황실의 사람이어야 했을 테니까.

‘선택받은 존재라니. 이건 선택이 아니라, 저주야.’

한 번도 황제가 되는 걸 원해 본 적 없는 진에겐 벗어나고 싶은 저주일 뿐이었다. 진은 애써 씁쓸함을 감춘 채 무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 걱정해 주신 덕분에 빨리 나을 수 있었습니다.”

“너도 변했군. 입에 발린 소리도 할 줄 알고.”

에드윈의 입가가 냉소로 비틀렸다. 그러다 의뭉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넌지시 물어 온다.

“록스버그 공작과는 어때? 이틀에 한 번 꼴로 저택을 방문한다고 하던데.”

진이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새벽부터 검술 대련을 하자는 핑계로 그를 부른 진짜 이유가 여기에 있는 모양이다.

짐작은 했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물어 올 줄은 몰랐다. 그만큼 마음이 조급하긴 한 모양이다.

“생각보다 록스버그 공작이 치료술에 뛰어나더군요.”

“그래서 도움을 받았다? 그것뿐인가? 그날, 로열 에스콧에서 록스버그 공작이 나에게 굉장히 흥미로운 말을 했거든.”

“사실입니다.”

진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에드윈의 표정은 여전히 믿지 않는 눈치였다.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허, 괴물 공작과 그대라니. 직접 듣고도 믿기지 않는군. 그럼 떠도는 소문처럼 돈 때문인 건가? 공작의 얼굴에 반한 건 아닐 테니 말이야.”

에드윈의 비아냥거림에 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록스버그 공작과 1년간의 정략결혼을 협의한 날, 약혼 선물로 남쪽 섬이 어떠냐는 질문과 함께 그녀가 비슷한 말을 하긴 했었다.

「확실히 하자면, 공작님은 제 돈에 팔려 오시는 게 맞아요. 소문을 그렇게 낼 생각이거든요.」

제길. 그땐 그냥 하는 말이겠거니 하며 넘겼더니, 이런 식으로 소문이 되어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갈 줄은 몰랐었다.

더 웃긴 건, 록스버그 공작의 계획대로 에드윈을 비롯해 아드리안 제국의 귀족들은 그 소문을 믿는다는 사실이었다.

이로써 진 로이슈덴은 괴물 공작의 돈에 팔려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진은 모든 걸 내려놓고 초연해지기로 했다. 이미 결정한 일이고 번복하기엔 늦었으니까.

무엇보다 이렇게 된 이상 록스버그 공작의 계획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방법밖엔 없었다.

“약혼 기념으로 남쪽에 있는 섬을 선물하겠다고 하더군요.”

“헛, 어이가 없군. 그래서 받겠다고 한 건가?”

에드윈의 입술 새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처구니가 없는 모양이다.

진은 대답 대신 어깰 으쓱했다. 소문이 맞는다는 걸 확인시켜 준 셈이었다.

“설마설마했는데 정말 돈에 팔린 게 맞았군. 가문의 긍지도 자존심도 없이.”

에드윈의 비난에 진은 코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아 냈다. 돈을 받고 록스버그 공작과 모종의 계약을 한 에드윈이 할 말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제 속마음을 내비칠 정도로 눈치가 없는 건 아니라, 진은 그것을 지적하는 대신 대놓고 속물처럼 굴기로 했다.

“이제야 눈을 뜬 거죠. 돈이 갖는 힘에.”

에드윈이 의심의 눈초리로 그런 진을 쏘아보았다.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너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군, 로이슈덴 공작. 사실 전부터 너에게 충고를 해 주고 싶었지. 맑은 물엔 물고기가 살지 않는다는 진리를 말이야. 잘 생각했어.”

적당히 타협하며 사람들 속에 섞여 평범하게 살라는 뜻이었다. 제 눈에 거슬리지 말고.

“앞으로 그럴 생각입니다.”

진의 대답에 에드윈이 묘하게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고결하고 긍지 높은 진 로이슈덴이 돈과 권력에 물들어 무너지는 꼴이 재미있었다.

가장 높고 고귀한 황제라는 자리에 앉았어도, 에드윈은 저 혼자만 시궁창에 서 있는 것 같은 더러운 기분이었다. 항상 진 로이슈덴과 자신을 비교하며 좌절을 맞본 탓이었다.

그런데 이젠 진 로이슈덴 역시도 저와 같은 시궁창을 구르게 되었다.

“철이 든 걸 보니 안심해도 되겠어.”

철컹 소리와 함께 지금껏 에드윈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이 검집 안으로 사라졌다. 진은 검집에 새겨진 존더부르크 황실의 문장을 확인했다.

황제의 보검이었다. 존더부르크 1세가 아드리안 제국을 세웠을 때, 신탁을 통해 받았던 신성한 검.

진이 고갤 들었다. 그러자 에드윈이 기다렸다는 듯 시선을 부딪쳐 왔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 속에 드러난 감정을 읽곤 표정을 굳혔다.

‘황제의 검을 들고 온 건 일종의 경고였던 모양이군.’

네 비밀을 알고 있으니, 반역을 꾀할 생각 같은 건 버리라고.

눈에 띄지 않고 더러운 시궁창에서 지금처럼 구르며 살아간다면, 진의 비밀 같은 건 눈감아 주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진 역시 천천히 제 검을 검집에 넣었다. 철컹, 검이 검집 안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새벽의 차가운 공기를 찢어 놓았다.

이건 어디까지나 암묵적인 동의였고, 거짓으로 점철된 평화였다.

“그래, 정식 발표는 언제 할 생각이지?”

에드윈이 아량이 넓은 황제처럼 묻는다. 진 역시 그의 연극에 동참하듯 태연하게 행동했다.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 건국 기념 파티에서 하고 싶습니다.”

순간 에드윈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입매 역시 냉소로 비틀렸다.

“록스버그 공작이 나와 했던 거래에 대해 이미 말한 모양이군.”

불만스럽게 툭 뱉어 내더니, 이내 상관없다는 듯 어깰 으쓱한다. 오히려 가진 패를 다 까 보였으니 거리낄 게 없다는 태도였다.

“폐하께서 너그럽게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 때문에 가문의 체면과 평판도 버릴 정도니, 불쌍하지 않습니까.”

진은 록스버그 공작의 돈에 팔려 정략결혼을 하는 제 역할에 충실했다.

“다른 사람 일처럼 말하는군. 록스버그 공작이 체면도 평판도 버린 이유가 바로 너인데 말이야.”

“정략결혼에 마음이 있어야 합니까? 그리고 남 일일 때, 동정심도 생기는 법이지요.”

차갑기까지 한 진은 대답에 에드윈의 입가가 나른하게 비틀렸다. 그리곤 냉혈한을 보듯 고갤 절레절레 흔들기까지 한다.

“록스버그 공작이 불쌍하군. 그대처럼 냉정한 남자를 마음에 품다니.”

“감정이야 알아서 하겠죠. 질척이는 건 딱 질색이라. 그래서 혼전 계약서도 쓸 생각입니다.”

혼전 계약서에 대한 얘긴 없었지만, 쓰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계약 결혼을 제의했을 때 로엔이 언급한 건 이혼 후 위자료에 대한 내용뿐이었지만, 진은 다른 내용을 추가할 생각이었다. 로엔이 상상도 하지 못할 조건을 말이다.

“헛, 혼전 계약서까지 작성하다니. 설마 이혼 후에 지불해야 할 위자료까지 정해 놓을 모양인가? 한 몫 단단히 챙길 요량으로 말이야.”

진이 로엔의 등을 쳐먹는 쓰레기라도 된 듯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은 불쾌해하는 대신 당연한 것 아니냐는 태도를 고수했다.

“두 가문이 결합하는 일이니, 뭐든 철저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의 대답에 에드윈이 눈을 가늘게 뜨곤 그를 응시했다. 농담 삼아 건넨 말인데, 진심으로 답하자 놀란 눈치였다.

참 이상도 하지. 진이 불행한 결혼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자, 마음속에 들끓던 록스버그 공작에 대한 분노가 조금은 희석되는 느낌이었다. 급기야 동정심까지 생겼다.

“로엔이 진심으로 불쌍해지는군.”

“그것도 제 알 바는 아니라서.”

저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차갑게 응수했다. 그렇게 진은 에드윈 앞에서 제 역할에 충실했다.

그의 노력 덕분인지, 에드윈은 더는 진을 향해 의심의 눈빛을 보내지 않았다.

“그렇지. 어때? 첫날밤이 기대되지는 않나? 그러고 보니 록스버그 공작은 침대에선 가면은 벗을 테지? 어떤 모습일지 상상이 되지 않는군.”

상스럽고 더러운 농담에 진은 저절로 눈살을 찌푸려지려했다. 다른 건 상관없었지만 록스버그 공작을 상대로 그런 얘길 하는 건 불쾌했다.

하지만 내색을 할 순 없는 노릇이라, 불쾌감을 억누르곤 씹어 삼키듯 말했다.

“상관있겠습니까? 어차피 의무일 뿐인데요. 정 참기 힘들면 베일이라도 씌우면 될 일이고.”

다행히 에드윈은 그 모습을 흉측한 괴물 공작과 밤을 보낸다는 건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으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그가 갑작스레 웃음을 터뜨렸다.

“풋, 하하하하. 하하하하.”

유쾌하기까지 한 그의 웃음소리가 대기를 찢듯 울려 퍼졌다. 그렇게 한참을 웃어 대던 에드윈이 미안한 기색도 없이 진을 보며 선심이라도 쓰듯 말을 건네 왔다.

“건국 기념일이 기대되는군.”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이내 에드윈의 입가에 가식적인 미소가 어리더니,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진, 내 사랑하는 사촌. 내 그날, 너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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