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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75화 (76/201)

75화

“정말 로이슈덴 공작님과 정략결혼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마차에 몸을 묻은 채 눈을 감고 있던 로엔이 눈을 떴다. 진과의 협상에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쏟았는지 급속히 피곤해졌다.

하지만 저를 걱정하는 라이칸에게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없어, 몸을 바로하고는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리곤 염려할 것 없다는 얼굴로 라이칸을 향해 고갤 끄덕였다.

“응. 할 거야.”

로엔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라이칸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하지만 믿을 수 있는 자인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위험할지도…….”

“위험한 것 맞아. 거기다 호락호락한 자도 아니고. 대신 비열하진 않잖아? 뒤통수 칠 성격은 더더욱 아니고.”

진 로이슈덴은 위험했지만, 한 번 결정한 약속은 꼭 지키는 자였다. 신뢰할 수 있는 자.

그리고 로엔에게 가장 필요한 이가 바로, 진 같은 이였다. 그러니 충분히 위험을 감수할 수 있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 누구도 완벽하게 신뢰해선 안 되고요. 언제든 공작님을 향해 검을 들 수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될 겁니다.”

로엔은 라이칸이 며칠 전 저택으로 날아든 화살을 떠올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암살자는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숨고 도망치는 대신 공격을 해 왔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행보였고, 예상 밖의 일이었다.

이는 곧, 암살자들의 행동 패턴이 바뀌게 된 계기가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로이슈덴 공작과의 정략결혼이 그레이트 모먼트에 의해 발표된다면, 며칠 전처럼 섣부르게 공격해 오진 않을 거야. 일종의 방패막인 샘이지.”

진 로이슈덴은 200년 동안 계속된 정복전쟁을 승리로 이끈 기사였다. 그리고 그가 전장에서 얼마나 잔혹했고 적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인물인지 아드리안 제국은 물론 타란 대륙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의 아내가 될 로엔을 암살한다는 건, 그런 자와 척을 지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정말 방패막일 뿐인 겁니까? 1년간의 정략혼의 이유에 사적인 감정은 정말 조금도 없는 건지 알고 싶습니다.”

라이칸의 말에 로엔이 쓰고 있던 검은 베일을 뒤로 넘겼다. 그러자 얼굴의 반쪽을 가린 가면이 드러났다.

“세실이 말했어? 내가 로이슈덴 공작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가면을 쓰지 않은 쪽의 입가에 재미있다는 듯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자 그녀의 미소에 조금은 안도한 듯 라이칸이 누그러진 목소리로 다시 물어왔다.

“사실이 아닌 겁니까?”

“아니, 맞아.”

로엔의 단호한 대답에 라이칸의 눈동자가 혼란스러운 듯 흔들렸다.

그럴 만했다. 라이칸은 로엔이 진 로이슈덴을 만나 그의 비밀을 알게 되고, 그를 제 계획에 끌어들일 계획을 세우는 동안 그녀의 곁에 없었으니까.

그의 걱정과 혼란스러움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걱정 마. 네가 뭘 걱정하는지 다 알고 있어.”

“진심이십니까? 정말 첫눈에…….”

“그렇다고 했잖아. 첫눈에 그가 록스버그 공작가의 저주를 풀어 줄 자란 걸 알았거든. 그래서 그에게 접근했고, 결국은 1년간의 시간을 번 거야. 그러니 라이칸.”

로엔의 부름에 흔들리던 라이칸의 검은 눈동자가 제자릴 찾았다. 다시 단단해진 믿음과 한결같은 의지를 품고 제 주인에게 눈을 마주쳐 왔다.

“정략결혼이 유지되는 1년 동안 로이슈덴 공작을 지켜 줘. 그가 없다면 저주를 풀 수도 없고, 더 나아가 나도 존재할 수 없어. 내가 하는 말이 뭘 의미하는지 알겠지?”

로엔의 몸속에 흐르는 혈독화는 언제든 그녀는 물론 그녀가 아끼는 이들을 집어삼킬 수 있었다.

10년 전 그녀의 부모님에게 있었던 일이 또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었다.

매 순간 죽음을 품고 사는 심정을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진 로이슈덴은 로엔에게 처음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어디까지나 동정심이야. 같은 저주를 가진 이들만이 갖는, 짐을 나눈 그런 종류의. 그러니 그 이상이 되어선 안 되는 감정이야.’

제 뜻대로 1년간의 정략결혼을 하게 된 마당이니 쓸데없는 감정으로 다시없는 기회를 날릴 순 없었다. 더 냉정하고, 철저하게 계산적이 되어야 했다.

‘그도 이미 동의한 일이야. 그리고 대가 역시 받게 될 테니…….’

양심에 찔려 할 필요도 없었다. 그를 속인다는 죄책감도 더는 제 몫이 아니었고.

그런데 왜 이렇게 답답한지 알 수가 없다. 오히려 기뻐서 환호라도 질러야 할 판인데…….

“명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라이칸의 대답에 로엔은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년 동안 로이슈덴 공작님을 지키겠습니다. 그것이 제 주인이신 공작님의 명이라면.”

라이칸이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무릎을 꿇었다. 로엔은 제 앞에 머릴 숙인 라이칸의 투명한 은발을 내려다보았다.

‘원래의 머리색이 갈색이었던가?’

로엔의 눈빛이 안타까움과 죄책감으로 그늘졌다.

5년 전 암살 사건으로 인해 로엔은 팔을 다쳤었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 있던 라이칸이 그녀를 감싸다 혈독화에 중독된 것이다.

그가 제 맹독에 중독돼 사경을 헤매는 동안, 로엔은 공작새의 눈물을 비롯해 그녀가 지금껏 공부한 의술을 총 동원해 그를 살려 냈다.

하지만 한 달 만에 눈을 뜬 라이칸의 머리카락은 맹독 때문에 새하얗게 세, 은발이 되어 있었다. 라이칸의 은발은 로엔에겐 제 운명을 잊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였다.

“염색은 언제 할 거야?”

그 사건 이후 라이칸은 로엔이 그날 일을 떠올릴까 봐 갈색으로 염색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명령한 것도 아니었지만 제 주인의 마음을 헤아린 라이칸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그의 머리카락은 다시 은발이 되어 있었다. 두 달이 넘게 그녀의 곁을 떠나 게르피온에 가 있는 동안 염색물이 빠져 본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염색을 하지 못했습니다. 당장에라도 세실에게 부탁해 염색하겠습니다.”

로엔의 물음에 라이칸이 제 머리카락을 감추려는 듯 외투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쓰려 했다. 그러자 로엔이 그의 손을 붙잡아 제지했다.

“가만 둬. 난 네 머리카락 색깔 좋아해. 달빛 같아서.”

순간 당황한 듯 라이칸이 고갤 들었다. 하지만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서둘러 시선을 피했다.

은색 머리카락 속에 숨겨져 있는 귓불이 조금 붉어진 것 같았다. 제 주인이 처음으로 건넨 속내에 쑥스러운 모양이다.

“네가 싫으면 어쩔 수 없지만, 나 때문이라면 더는 안 해도 돼. 전부터 말해 주고 싶었어.”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차피 제 주인을 위해 한 염색이었으니까.

“그럼, 하지 않겠습니다.”

라이칸이 자리에서 일어나 맞은편에 앉았다. 여전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는 그를 보자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도 후드를 써 더는 제 머리카락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너도 귀찮았던 모양이지? 그렇겠지. 3주에 한 번씩 염색을 했어야 하니까. 이제 그럴 필요 없어.”

어색해하고 있는 라이칸을 위해 로엔이 농담을 건넸다.

“귀찮지 않았습니다.”

“그래? 다행이야. 난 그게 걱정이었거든.”

사실은 꼬박꼬박 염색을 해야 하는 라이칸의 수고보다, 그가 염색 머리를 유지하는 동안 마음속에 담고 있었을 마음이 걱정되었다. 그리고 죄책감 때문에 이런 속내조차 제대로 내비비치 못해서 미안하기도 했었고.

하지만 이제…… 그런 말을 건넬 용기가 생겼다.

“정말 다행이야, 라이칸.”

로엔은 혼잣말처럼 낮게 읊조린 다음 창문으로 고갤 돌렸다.

흔들리는 마차 안. 그 작은 창문 안으로 오후의 햇살이 들어와 비췄다.

그녀가 지금껏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어둠뿐인 곳에 서 있었다면, 이제야 그곳에 한 줄기의 햇살이 들어와 비추는 느낌이었다.

그 달콤하고 중독성 강한 희망이란 빛을 놓치고 싶지 않다고, 로엔은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그래서 뭐든 할 수 있다고, 아니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것이 뭐든.

* * *

챙, 채챙.

날카로운 두 개의 검이 살기를 띄고 맞부딪쳤다. 날 선 검만큼이나, 검을 든 두 남자의 눈빛 역시 차갑기 짝이 없었다.

“로이슈덴 공작, 기사도 아닌 날 상대로 너무 진심인 것 같군.”

진을 바라보는 에드윈의 눈빛이 냉소로 번뜩였다. 입매 역시 불쾌한 듯 삐딱하게 올라가 있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폐하껜 예의가 아닌 듯해 그런 것뿐입니다. 만약 원하신다면 다음부턴 힘의 절반만 사용하겠습니다.”

진의 대답에 에드윈이 코웃음을 쳤다.

“지금껏 그대가 나를 잘못 알고 있었나 보군, 로이슈덴 공작. 난 항상 최선을 다하는 신하도 좋아하지만, 그것보다 내 기분을 잘 헤아리는 신하를 더 아낀다는 걸 말이야.”

그런 면에선 진은 형편없다는 뜻이었다.

또다시 검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맞닿은 시선엔 냉기만 가득했다.

“제가 떠나 있던 5년간 폐하께선 변하신 듯 하군요.”

날 선 긴장감이 두 사람 사이에 흘렀고, 누군가 물러서지 않으면 서로를 겨눈 검 끝에 누군가의 피를 볼 것만 같았다.

다행히 먼저 검을 내린 것은 에드윈이었다.

이제 막 정복전쟁에서 승리하고 온 로이슈덴을 대놓고 적으로 돌린다면 귀족들과 제국민들 사이에서 불만이 일 터였다.

때를 기다려야 했다.

덫을 놓고 그가 그 덫에 목을 내어 놓는 순간을.

검을 갈무리하며, 에드윈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진을 바라보았다.

“변하는 게 당연한 일 아닐까? 이제 난 광활한 타란 대륙의 주인이니까. 존더부르크 1세께서 염원했던 아드리안 제국의 영광을 손에 쥔 최연소의 황제이기도 하고.”

에드윈의 말처럼 지금 아드리안 제국은 건국 이래 가장 평화롭고 풍요로운 한때를 보내는 중이었다. 하지만 에드윈은 전쟁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었다.

아니, 진 로이슈덴이 정복전쟁에서 죽어 칼라일로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는 말이 더 정확할 듯했다.

‘그런데 내게 영광을 안겨 준 자가 하필 진 로이슈덴이라니.’

기분이 정말 엿 같았다. 황제의 자리에 올라도 변하는 게 없었다.

“로이슈덴 공작, 상처는 확인해 보지 않아도 알겠군. 정말 괴물 같은 회복력이야.”

에드윈의 목소리가 음산했다.

진은 무감한 눈빛으로 에드윈을 응시했다. 그의 말처럼 전쟁터에서도 사람들은 진의 놀라운 회복력에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적국의 기사들 사이에서 진 로이슈덴이 불사의 몸이란 소문까지 떠돌았다.

그 소문을 에드윈 역시 들었을 테지.

‘정말 내가 드래건의 심장을 삼키고도 살아남았다는 걸 알고 있는 건가?’

진은 에드윈의 눈동자 속에 담긴 적의를 통해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에드윈은 진의 비밀을 세상에 알릴 생각이 없었다.

정말 의외였다. 그가 알게 되면 당장 반역죄를 물어 교수형에 처해질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대체 무슨 속셈인 걸까? 쉬운 길을 두고 돌아가려 하다니.’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아,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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