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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74화 (75/201)

74화

대체 뭘까? 이 반응은.

제 모난 성격을 비꼬는데도 화를 내기는커녕 웃는 걸 보니, 사디스트인 모양이다.

“이제 가식은 벗어던진 모양이군, 록스버그 공작.”

“얼마 전까진 예를 갖출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라서요.”

로엔은 캠벨 후작가의 파티에선 그가 제게 기사의 예를 갖췄으니,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예를 표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가 저를 오해해 무례하게 방에서 쫓아낸 이상, 더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군.”

지금 장난해?

“당연한 것 아닌가요?”

로엔이 어이가 없다는 듯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차분하게 두 손을 모아 쥐곤 싸울 준비를 했다.

“이제 시간 끌지 말고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어떨까요? 절 붙잡은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사실 처음엔 깜빡 속을 뻔했지 뭐예요. 저는 공작님 같으신 분이 그런 술수를 쓸 것이라곤 생각지 못해서.”

“무슨 말이지?”

“쓸데없이 시비 걸지 마시고, 원하는 게 있으면 직접 말하세요. 협상을 하든, 협박을 하든 난 충분히 들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

사실 그에게 쫓겨날 때만 해도 알지 못했다. 그가 정말로 공작 부인의 침실에서 나오는 저를 오해했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는 의외의 반응을 보였고, 그 의외성에 다른 뜻이 내포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지금, 저와 협상 테이블에 앉기 위해 괜한 시비를 걸었다는 걸.

“역시 눈치가 빠르고 머리가 좋으니 편하군. 내 주위엔 아둔한 자들뿐이라 답답했거든.”

이젠 품고 있는 의도를 숨기지 않을 작정인 듯하다.

“이제 아셨으니 시간 낭비 하지 말죠. 내가 먼저 원하는 걸 말하면 되는 건가요? 그런 분위기 같은데.”

“말해. 원하는 게 뭐지?”

“제 공개 구혼에 대한 대답. 그리고 로열 에스콧에서 폐하와 귀족들 앞에서 했던 말을 사실로 만드는 것. 그게 제가 원하는 거예요.”

진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이미 그녀의 제안을 예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실망이야. 네가 원하는 게 공작 부인 자리였다니.”

“누가 줘도 안 갖는 공작 부인 자릴 탐낸대요? 내가 공작인데, 더 낮은 신분을 갖는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로엔이 어이가 없다는 듯 차갑게 일갈했다. 그제야 진의 은청색이 눈동자가 흥미로 반짝였다.

“그렇다니 다행이군. 그런데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지? 싫다고 하니, 괜스레 의욕이 불타는 것 같군.”

뭐래? 의욕이 불타다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로엔은 그의 말에 담긴 뜻을 곱씹는 대신,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진이 의자에 기댔던 몸을 바로 했다.

그의 태도에 로엔은 긴장했다. 지금껏 그의 입가에 떠올랐던 미소가 사라지고, 예의 냉정하고 차가운 표정으로 되돌아와 있어서였다.

“그럼 구체적으로 뭘 원하는지 협상해 볼까? 내 비밀의 대가로 뭘 원하지?”

“1년간의 정략결혼.”

로엔은 틈도 주지 않고 바로 말했다.

“그 족쇄를 차는 대신 내가 얻게 되는 이익은?”

“이혼 후 얻게 될 엄청난 위자료. 그리고 공작님의 목숨. 아마 공작님도 이번 사건을 통해 느끼셨을 거예요. 폐하의 위협으로부터 제가 완벽하게 보호막이 되어 줄 수 있다는 걸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니, 반박할 말이 없을 터였다.

“그럼 네가 얻는 건 뭐지? 공개 구혼으로 무너진 그대의 평판을 나와의 정략결혼으로 회복시킬 수 있다는 입에 발린 소린 않는 게 좋아. 아닌 걸 뻔히 아니까.”

거짓말 같은 건 애초에 할 생각 말라는 듯 진이 못을 박았다.

“제가 얻게 될 이익은 두 가지예요. 첫 번째는 10년 동안 계속된 암살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죠.”

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역시 듣기 싫어도 주위에서 떠들어 대는 소문에 다 귀를 막을 순 없었다. 그래서 록스버그 공작이 계속해서 암살 위협에 시달려 왔고, 얼마 전 죽음의 문턱까지 갈 만큼 위험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좋아. 그럼 두 번째는 뭐지? 이것이 네가 나와 1년간의 정략결혼을 하려는 핵심일 것 같은데 말이야.”

역시, 그는 호락호락한 자가 아니었다. 눈치가 너무 빨랐다. 그리고 로엔은 진과는 다르게 눈치 빠른 사람은 질색이었다.

차라리 돈만 밝히고 눈앞의 욕망에 눈이 먼 자였다면 훨씬 다루기 쉬웠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굉장히 이성적이었고, 또한 영리했다. 무엇보다 프라이드가 강한 자였기 때문에 다른 이의 말에 휘둘릴 인물도 아니었다.

그러니 섣부른 말로 그를 속이려 들었다간 지금 이 협상 역시 물 건너갈 게 뻔했다.

“뭘 좀 찾고 있어요. 지금은 구체적으로 그것이 뭔지 말할 순 없지만, 공작님이 저와 함께 찾아 줬으면 해요.”

“내가 알면 빼앗기라도 할까 봐 비밀로 하려는 건가?”

그에게 빼앗기기보단, 아마 그것이 뭔지 알면 절대 함께 찾으려 하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제 의도를 알게 된다면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저를 죽일 테고.

“아니요. 빼앗진 않으실 거예요. 공작님과는 상관없는 물건이니까.”

“그래? 하지만 내 도움이 필요한 걸 보면, 내가 그것을 찾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뭔가를 갖고 있는 가 보군.”

“네. 부정하지 않을게요. 그리고 어차피 저와 함께 그것을 찾는 동안 그게 뭔지 자연히 알게 될 거예요. 그러니 조급해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거짓은 아니었다. 모든 것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이 되겠지만, 진은 그가 록스버그 공작가의 저주를 풀 열쇠라는 사실을 알게 될 테니까.

“생각할 시간을 드릴까요?”

“그럴 것 있나? 고작 1년간의 정략결혼인데. 남들 앞에서 부부 행세를 하는 것뿐이잖아. 후계자를 낳게 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후계자라니.

생각지도 못한 말에 로엔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곤 긴장한 것을 숨기기 위해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것이 실수였다.

쨍그랑!

긴장으로 굳어진 손이 오히려 옆에 놓여 있던 티스푼을 건드려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떨어진 티스푼을 보며 진의 입가가 나른하게 비틀렸다.

“설마 내 아이를 원하는 건가?”

“설마요! 절대 아닙니다. 말 그대로 제가 원하는 건 두 가지뿐이에요. 그리고 계약 결혼이니, 공작님 말씀처럼 결혼한 척만 하면 되고요.”

로엔이 불쾌한 말이라도 들은 듯 팔짝 뛰자, 진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조금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뭐지? 실망한 것 같은 표정은?

마치 제게 거절이라도 당한 얼굴이었다.

“좋아. 그럼 언제 공표할 생각인지나 말해. 이미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놓았을 것 아냐?”

진이 다 알고 있다는 듯 1년간의 정략결혼에 대한 청사진을 내놓으라고 말했다.

“건국기념일이 좋겠어요. 이미 폐하께도 미리 언급해 놓은 일이라, 이상하게 여기진 않을 거예요.”

“스케일이 생각보다 크군. 네 계획에 아드리안 제국의 황제까지 들어와 있다니.”

예상한 것이라는 듯 진은 크게 놀라는 기색은 없었다.

“로열 에스콧의 사고는 예외였어요. 사실 그 사건으로 폐하의 눈 밖에 나 버려서, 전에 세워 놓았던 계획이 무너질 판이거든요.”

“전에 세운 계획은 뭔데?”

“뭐긴 뭐겠어요? 폐하를 내 편으로 만들어 건국기념일에 제 공개 구혼을 허락해 달라는 요청이었지.”

진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로엔을 보았다.

“설마 에드윈이 그 계획에 동의했다는 건가?”

“당연한 것 아닌가요? 제가 폐하 앞에서 어마어마한 돈을 써 보였거든요. 로열 에스콧에서처럼요.”

진은 제 말에게 베팅을 하던 로엔을 떠올렸다. 베팅에 그 정도의 돈을 지불할 정도면, 에드윈에게 얼마나 많은 돈을 내밀었을지 짐작이 됐다.

“돈이 무섭긴 하군.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너와 어떻게든 결혼할 판이었으니 말이야.”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 본격적으로 돈을 써 볼 생각이에요.”

로엔이 진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약혼 선물로 남쪽에 있는 작은 섬을 주고 싶은데, 어떠세요?”

제대로 된 돈지랄에 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곤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필요 없어. 돈에 팔려 가는 것도 아니고.”

“아니요, 공작님. 확실히 하자면 공작님은 제 돈에 팔려 오시는 게 맞아요. 소문을 그렇게 낼 생각이거든요.”

로엔의 확신에 찬 대답에 진의 얼굴이 불쾌한 듯 찌푸려졌다. 그녀가 뭘 하려는 건지 깨달아서였다.

빌어먹을.

진은 벌써부터 조금 전 동의한 1년간의 정략결혼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앞으로 1년간이 급류처럼 그를 집어삼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절대 무를 수 없으니 그렇게 아세요.”

진의 속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로엔이 못을 박았다. 그리곤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리며 우아하게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마음과는 달리, 오후의 햇살이 유난히 아름답고 따사로운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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