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잠깐 딴생각을 하느라 묻는 말을 듣지 못했어. 미안한데 다시 한 번만 말해 주겠어?”
걱정스럽게 로엔을 바라보던 알렉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차를 준비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주인님께선 목욕 중이십니다. 곧 돌아오실 겁니다.”
“고마워. 그리고 걱정 마. 공작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지정석에 앉아서 기다릴 테니까.”
지정석이란 말에 알렉이 난처한 얼굴을 했다. 사실 지정석은 로엔이 진의 치료를 핑계로 로이슈덴 공작저를 방문했을 때, 진이 그녀의 방문을 허락하는 대신 조건으로 내건 것이다.
「상처를 돌볼 때 외엔 저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좋겠군. 만약 그게 싫으면 돌아가도 상관없고.」
당장 꺼지라는 말 대신 한 말이었다.
‘나 참, 치사하고 어이가 없어서. 시간 내서 치료를 해 주러 왔더니.’
완전 거지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식이었다. 로엔은 고갤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게 바로 제 사람일 때와 아닐 때의 온도 차인 건가?’
록스버그 공작일 때 느껴지는 진의 차가운 태도가 떠오르자, 그 서늘함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나저나 알렉은 또 무슨 죄야?’
사실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는 죄로, 알렉이 제 주인의 무례한 행동에 대해 로엔에게 연신 허릴 굽히며 사과해 왔다.
그의 사과를 받으면서도 짜증이 나, 침대에 태연히 기대앉아 있는 진의 등짝을 시원하게 후려치고 돌아갈까 생각했었다.
‘저주만 아니었으면…….’
재고의 여지도 없이 팽이었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정말 무례하고 뻔뻔한 주인을 만나 알렉이 고생이었다.
“네가 미안해할 일은 아니니 그런 얼굴 할 필요 없어.”
로엔이 여상하게 말하곤 진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곧 돌아오겠습니다.”
문이 닫히자, 로엔은 천천히 방 안을 둘러봤다. 주인이 없는 방에 혼자 있으려고 하니, 어색했다.
잠시 문 앞에 서 있던 로엔은 익숙한 듯 진이 말한 창가의 지정석에 앉았다.
“그런데 목욕을 해도 되는 건가? 아직 상처가 다 아물진 않았을 텐데…….”
걱정으로 미간을 찌푸리다 문득 심술이 났다.
‘상처가 벌어지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로엔은 엉덩이를 붙이고 자리에 앉았다.
톡, 톡, 톡. 하지만 불안한 마음을 대변하듯 의자 위에 놓인 손가락이 딱딱한 나무 손잡이를 두드렸다.
“하아, 오지랖도 병이라니까.”
결국 로엔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욕실이 어디였더라? 알렉이 전에 말해 줬던 것 같은데.’
로엔은 기억을 더듬으며 다른 방들과 연결된 문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를 열었더니, 흰색과 검은색의 셔츠가 빼곡히 들어찬 드레스룸이 보였다.
서둘러 문을 닫고는 다른 문을 열었다.
여긴가?
들어간 곳은 또 다른 방이었다. 진의 침실과는 달리 방 안에 놓여 있는 침대며 가구들이 하나같이 아름다웠다. 미래의 공작 부인의 침실인 모양이었다.
로엔은 봐서는 안 될 것을 훔쳐본 것 같은 마음에 서둘러 방을 나왔다. 그러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털며 욕실에서 나오던 진과 마주쳤다.
‘아, 욕실이 파란 문이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로엔이 진에게 다가갔다.
“알렉이 목욕을 했다고 하던데, 상처는 괜찮으신 건가요? 아무리 드래건의 심장을 삼켰다고 해도 상처가 덧나기라도 하면…….”
“왜 거기서 나오는 거지?”
순식간에 바뀐 표정하며 서늘한 목소리에 놀라, 로엔이 걸음을 멈췄다.
“네?”
“꺼져.”
채찍처럼 날카로운 서슬에 로엔의 몸이 그대로 굳어졌다. 그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저는 그러니까…….”
“아무리 욕심내도 넌 가질 수 없다. 그 자린 네 것이 아니니까.”
대체 무슨 말을……. 욕심을 내도 가질 수가 없다니. 내 자리가 아니라니.
도무지 이해가 안 돼 멍하니 서 있다 조금 전 제가 들어갔던 방이 어딘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가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도.
그는 제가 일부러 공작 부인의 방을 훔쳐봤다고 생각한 듯했다. 그 자리가 욕심이 나서.
불쾌감에 로엔은 주먹을 꽉 쥐었다.
사실 그에게 공개 구혼을 한 이상, 그와 계약 결혼을 할 생각이긴 했다.
하지만 결혼을 한다고 해도 그건 당연히 정략혼이었다. 록스버그 공작인 제가 로이슈덴 공작저에 들어와 공작 부인의 침실을 차지할 생각은 전혀 없다는 뜻이었다.
“당장 나가.”
로엔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그녀는 불쾌감을 드러내며 그를 지나쳐 걸어갔다. 그러자 그 역시도 한시도 같은 공간에 함께 있을 수 없다는 듯 그녀의 팔을 붙잡더니 거칠게 방 밖으로 쫓아냈다.
이런, 미친 경우를 봤나.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가까스로 억누르며 로엔이 베일 너머로 그를 쏘아보았다.
“다신 보지 않았으면 좋겠군, 록스버그 공작.”
뭔가 말하기도 전에 꽝! 소리를 내며 방문이 닫혔다. 바로 코앞에서 닫힌 문이 그녀를 철저하게 거부하는 것 같았다.
“뭐야, 저 인간? 성격 파탄자도 아니고.”
그의 무례에 정말 어이가 없었다.
“공작님? 괜찮으십니까?”
알렉의 목소리에 로엔이 고갤 들었다. 그러자 조금 전 그녀가 진에게 쫓겨나는 장면을 모두 본 듯 알렉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 있었다.
순간 치욕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로엔은 가까스로 감정을 꾹꾹 눌러 삼켰다. 그리곤 여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공작님이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하신 것 같아. 알렉, 들어가서 말 좀 전해 주겠어? 조금 전 상황은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사실이 아니라고.”
말할수록 격앙되는 감정을 갈무리하기 위해 로엔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곤 냉정함을 되찾자 다시 입을 열었다.
“난 그저 공작님이 목욕을 하신다는 말에 상처가 덧나지 않을까 걱정이 됐을 뿐이야. 욕실을 찾으려다 공작 부인의 침실로 잘못 들어간 것이고. 그 사실을 알고 바로 나오려다 공작님과 마주친 건데, 변명도 하지 못하고 쫓겨났거든.”
로엔이 방에서 쫓겨난 이유를 알게 된 알렉이 서둘러 사과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공작님. 그리고 주인님껜 공작님이 하신 말씀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알렉이 허릴 펴곤 서둘러 진의 방문을 두드렸다.
“주인님! 차를 준비해 왔습니다. 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알렉은 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방문을 열었다. 그리곤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문턱에 서선 로엔을 돌아보았다.
“록스버그 공작님도 안으로 들어오시는 게 좋겠습니다. 약속대로 차를 가져왔거든요.”
예상치 못한 알렉의 행동에 당황한 건 진만이 아니었다. 로엔 역시 그의 행동에 놀라 베일 사이로 알렉을 응시했다.
“오해는 직접 푸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오해에 대한 사과도 직접 받으셔야지요.”
알렉의 말에 진이 눈을 치켜떴다. 그리곤 제 편이 아니라, 대놓고 로엔 편을 드는 알렉을 향해 날카롭게 명령했다.
“오해라니? 내가 뭘 오해했다는 건지 모르겠군. 당장 돌려보내. 난 할 말 없으니까.”
분명 조금 전에 문 밖에서 로엔이 알렉에게 한 말을 들었을 텐데도, 진은 생각을 바꿀 마음이 없는 듯 보였다.
“알렉, 미안하지만 더는 공작님과 얘기할 수가 없겠어. 설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몰아붙이는 사람과는 대화할 이유가 없거든. 그리고 또 하나. 이 저택을 나간 순간, 황궁으로 갈 생각이라고도 전해 줘.”
순간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로엔은 그녀가 내민 협박 카드에 그가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해 하며 고갤 들었다.
이내 진과 눈이 마주쳤고, 서늘한 은청색의 눈동자엔 분노 대신 흥미로운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뭐지? 내가 잘못 본 건가?’
하지만 잘못 본 건 아닌 듯했다. 눈을 깜빡였다 다시 뜬 후에도 진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오히려 그의 입가가 나른하게 비틀려 있기까지 하다. 뭔지는 몰라도 분명 재미있어 하고 있었다.
‘내 협박이 너무도 충격적이라 머리가 돌기라도 한 건가?’
하지만 그가 다음 말을 뱉어 낸 순간, 짜증으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알렉, 공작에게 전해. 알아들었으니 안으로 들어오시라고. 지금부터 아주 길고 긴 대화를 나눠야 할 것 같다는 말도 함께 말이야.”
진이 알렉을 통해 제 뜻을 전했다. 같은 장소에 있으면서 대리인을 통한 대화라니. 제가 먼저 그런 방법을 쓰긴 했지만, 그 역시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하게 날 선 긴장감이 흘렀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만 터진다고 하더니. 두 사람 사이에서 난처한 건 오직 알렉뿐이었다.
로엔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지정석에 앉았다. 허릴 곧게 세우곤 우아한 태도로 알렉이 제 앞에 놓아 둔 찻잔을 들어 차를 즐겼다.
하지만 여유 있는 겉모습과는 달리, 베일 안의 표정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그댄 좋겠군. 그 베일이 표정을 숨겨 줘서.”
그가 삐딱하게 시비를 걸어온다.
“공작님도 하나 장만하시는 게 어떨까요? 아니다. 공작님은 얼굴을 가리는 것보다 입을 꿰매시는 편이 좋을 것 같네요. 입만 열면 사람 기분 나쁘게 하시는 게 장기이신 모양이니까. 제가 소개 좀 해 드릴까요? 바느질에 소질 있는 사람을 잘 아는데.”
로엔 역시 그를 한껏 비꼬며 그의 반응을 살폈다.
‘이렇게 속을 긁어 놨으니 화를 내겠지?’
아니, 목을 조르거나 검으로 내 목을 치겠다고 을러 댈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녀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는 화를 내는 대신 또다시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