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침묵이 흘렀다. 로엔은 진의 침묵에 또다시 초조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생각에 잠긴 채 물끄러미 로엔을 응시하고 있던 진이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말을 꺼냈다.
“데려다줘. 혼자는 못 갈 것 같아.”
진이 지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도하는 것도 잠시, 낯선 그의 태도에 로엔의 눈이 놀라 커졌다.
“…….”
“네가 데려다준다고 약속했잖아. 그러니 같이 가 줘. 혹시 마음이 바뀐 건가?”
당연히 마음이 바뀐 건 아니었다. 하지만 바로 대답하지 못한 건, 그가 저를 바라보는 눈빛 때문이었다.
어리광 같았다. 진 로이슈덴은 사납고 길들이기 어려운 맹수였다. 그런 그가 지금은 마치 눈꼬리를 내리곤 힘없는 강아지처럼 굴고 있었다.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누가 들으면 미쳤다고 하겠지만.
“어, 그러니까…….”
로엔은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때 그가 입고 있는 하얀 셔츠 위로 배어 나온 피가 보였다.
“바래다 드릴게요. 아프시니 어쩔 수 없죠. 그런데 걸으실 순 있겠어요?”
“아니. 다리에 힘이 풀려서 혼자서는 도저히 못 걷겠어서.”
“설마 다리도 다치신 건가요? 저는 심장 부근에 화살만 맞은 줄 알았는데.”
로엔이 놀란 눈빛으로 진의 다리를 살폈다. 진은 제 다리를 살피는 로엔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깨닫지 못하는 건가? 제가 지금 무슨 실수를 한 건지?’
확신하지 못한 채 흔들리던 진의 은청색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그리곤 뭔가 깨달은 듯 그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눈동자에 걱정스러운 듯 제 다리를 살피는 로엔의 모습이 지그시 담겼다.
“다친 건 아니야. 그냥 다리에 힘이 풀려서…….”
저와의 키스 때문에 다리에 힘이 풀렸으니 책임지라는 말 같았다. 그의 말뜻을 이해한 로엔이 얼굴을 붉힌 채 그를 쏘아보았다.
“정말 못하는 말이 없다니까. 계속 놀릴 생각이시라면 혼자 돌아가세요.”
로엔이 토라진 티를 내며 툴툴거렸다.
“밤이 늦었으니 오늘은 혼자 돌아가지.”
잠깐, 혼자 돌아간다고?
당연히 데려다 달라고 매달릴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껏 질척댔던 게 떠오르지 않을 만큼 쿨하게 말했다.
“대신 내일 저택으로 와 주겠어?”
“저택으로요?”
“응. 내일 또 아플 것 같거든. 이젠 아픈 건 지긋지긋해. 그리고 효과가 좋은 특효약도 있으니 이젠 참을 이유도 없고. 그러니 꼭 와.”
얘길 듣다 보니, 그녀에게 방문을 요청한 이유가 키스 때문이란 걸 눈치챘다.
맡겨 둔 것도 아니고. 이젠 대놓고 뻔뻔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바람둥이, 변태. 누가 간대요? 그리고 왜 그렇게 당당하게 요구하는지 모르겠네요. 입술을 맡겨 둔 것도 아니면서.”
로엔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변태는 너인 것 같은데? 난 키스가 아니라, 특효약을 복용하려던 것뿐이었거든.”
“이잇! 당장 돌아가세요. 꼴도 보기 싫으니까.”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채 로엔이 진을 향해 소리쳤다. 당황한 나머지 진에게 무례하게 소리쳤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진 또한 그것에 대해 문제 삼지 않았다. 그저 로엔을 보며 기분 좋은 듯 웃을 뿐이었다.
어딘가 이상했다. 목소리는 퉁명스럽고 불쾌한 듯 거칠었지만, 심장은 자꾸만 간질거려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한없이 따뜻해 울고 싶어졌다. 해일처럼 찾아드는 낯선 감정에 로엔은 두려워졌다.
제 감정을 눈치라도 챈 듯 진이 또다시 입술을 겹칠 것처럼 고갤 숙여 왔다.
위험해.
머릿속에 경고등이 켜졌고, 로엔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그의 입술을 단단히 막았다. 그리곤 필사적으로 고갤 가로저었다.
“잠깐만 기다려 봐요. 이러면 안 될 것 같아요.”
“뭐가 안 된다는 거지? 조금 전에 새로운 계약을 한 것 아니었나? 필요하면 언제든 하자고. 아닌가?”
그가 뻔뻔스럽게 그녀의 손바닥에 입을 맞추며 물어 왔다. 로엔이 눈을 가늘게 뜨곤 눈을 흘겼다.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게 정말 어이가 없어서다.
정말 사기였다. 외모는 키스나 욕망 같은 것과는 하등 상관없다는 듯 지독히도 금욕적으로 생겼으면서, 지금은 음흉한 늑대처럼 굴고 있었다.
제 암컷을 대놓고 유혹하는 늑대.
“파렐 수도원의 수도사라면서요? 그런 쪽으론 금욕적이라 여자 손 잡는 것도 질색한다면서요?”
정말 키스 못 하고 죽은 귀신이라도 붙은 듯 그가 그의 입술을 막은 로엔의 손을 떼어 내곤, 입술을 얽혀 왔다. 끈적끈적하게 들러붙는 더운 숨결에 저절로 몸이 떨렸다.
억지로 고갤 돌려 그의 입술을 떼어 내곤,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왜 자꾸 엉겨 붙는데요? 떨어지라고요.”
폭우처럼 쏟아져 내리는 당혹감에 로엔은 앞뒤 없이, 세이지에게 들은 말을 쏟아 냈다.
처음엔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해하던 진이 그제야 이해한 듯 씩씩대는 로엔을 보며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 누군가 내 몸에 닿는 건 질색인 것. 하지만 말했잖아.”
대체 뭘 말했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너는 예외라고.”
이런, 미친.
이젠 정말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제 심장은 눈치도 없이 팔딱댔다. 이러다 입 밖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아 걱정이 될 정도였다.
‘어쩌지? 모른 척 계속해서 시치미를 떼야 하나?’
그가 저에게 여인으로서 호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실 기뻐서 소리라도 질러야 하는 순간이었다. 세실에게 랑케의 에스테를 부르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말해야 했다.
하지만 하나도 기쁘지 않다. 오히려 두려움과 걱정부터 앞섰다.
“넌 예외다. 그 모든 것에서.”
그가, 그녀에게 숨기지 않고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속에서 이름을 붙일 수 없을 만큼 불분명하던 감정 역시 형태를 갖춘 듯 선명해진 걸 알 수 있었다.
어느새 노을이 내려앉은 오후의 햇살 아래,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가 변했다. 델 것처럼 뜨겁고, 온몸이 녹아내릴 것처럼 달콤했다.
* * *
다행히 진의 몸은 빠르게 회복되었다. 그가 로엔의 상점에 찾아온 후, 그의 요구에 의해 로엔은 이틀에 한 번 꼴로 저택을 방문했다.
그는 하루에 한 번 방문할 것을 요청했지만, 로엔은 장사를 해야 한다는 핑계로 거절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하루에 한 번 로이슈덴 공작가를 방문해야만 했다.
시모네타가 오지 않는 날은 록스버그의 괴물 공작이 되어 그를 방문해야 했으니까.
‘이건 뭐, 쉴 틈도 없네.’
무대에 올라 연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1인 2역으로 번갈아서 진을 만나야 하는 상황이라 신경이 곤두섰다. 이러다 실수나 하지 않으면 정말 다행일 것 같았다.
로엔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곤 오늘의 역할이 록스버그의 괴물 공작이었기 때문에 인물에 충실하기 위해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렸다.
“오셨습니까, 공작님. 어서 들어가십시오. 주인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렉이 마차에서 내리는 로엔을 반겼다.
“공작님의 상태는 어때?”
“주고 가신 약을 꾸준히 복용하신 탓에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이젠 침대에 앉는 것은 물론 움직이는 것도 가능하십니다.”
“그래? 다행이네.”
로엔은 친절한 태도의 알렉을 보며 베일 안에서 피식 웃었다. 어제 시모네타로 이곳을 방문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 때문이었다.
‘알렉은 시모네타보단 괴물 공작 쪽인 모양이야.’
사실 일주일 넘게 로이슈덴 공작가를 방문 하는 사이, 저택에서 일하는 고용인들의 태도가 미묘하게 다르다는 점을 발견했다.
요리사인 제레미야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하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알렉과 메리언의 태도는 분명하게 읽을 수 있었다.
참고로 메리언은 시모네타 편이었다.
그리고 이 저택의 주인인 진은…….
‘흐음, 참 이상하단 말이야. 분명 시모네타인데, 괴물 공작을 대하는 태도 역시 묘하니…….’
사실 가장 의외인 건 진 로이슈덴의 태도였다.
당연히 시모네타가 방문할 때마다 치료를 핑계를 자꾸만 손을 잡고 입술을 부딪쳐 왔다.
처음엔 그의 질척거림에 화들짝 놀라 밀어냈었다. 하지만 몸의 상처가 빠르게 회복되는 것과는 달리, 만년설로 만든 화살촉에 찢긴 드래건의 비늘은 낫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론 그의 입술을 밀어낼 수만은 없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시도 때도 없이 입을 맞추는 건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정해진 게 딱 두 번.
저택에 도착했을 때와 저택을 떠나기 직전에만 키스를 할 수 있다고 타협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웃기는 건, 그렇게 하자고 마지못해 승낙한 게 제가 아니라 진 로이슈덴이란 점이었다. 그것도 마치 선심이라도 쓰듯이.
정말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어이가 없었다.
‘아쉬운 게 누군데, 그렇게 고고하게 구는지.’
로엔이 한숨을 내쉬며 고갤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실 그에게 휘둘리는 그녀 또한 문제였다. 매몰차게 거절하면 될 일인데…….
이상하게도 그가 차갑다 못해 서늘한 눈꼬리를 내리뜨며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굴 때면, 차마 그를 거절할 수 없었다.
‘타고난 바람둥이가 분명해. 이건 대놓고 사람을 홀리잖아.’
지금까지 그 끼를 어떻게 숨겨 왔는지 모를 정도로 그는 작정하고 끼를 부렸다. 무엇보다 사람을 다루고 휘두르는 게 수준급이었다.
그를 제 손안에 쥐고 주무르려 했는데, 어쩌다 보니 그에게 주물러지고 있었다.
거기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그의 손에 붙잡혀 시도 때도 없이 입술을 맞댈 판이었다.
‘파렐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다 죽은 모양이지?’
세이지는 대체 뭘 보고 그런 날바람둥이를 경건하고 검소한 수도사들과 비교한 건지.
“괜찮으십니까?”
알렉의 목소리에 로엔이 걸음을 멈추곤 고갤 들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문이 보였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벌써 진의 침실 앞에 도착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