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귓가를 스치는 은근한 목소리에 등줄기에 야릇한 전율이 흘렀다. 로엔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사이 진이 고갤 들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는 로엔이 불안해 그녀의 안색을 살피는 눈치였다.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혀 들었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 그의 은청색의 눈동자에 제 얼굴이 비쳤다.
로엔은 숨 막힐 것 같은 긴장감에 혀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긴장으로 자꾸만 입술이 말랐다.
‘왜 이렇게 야하고 난리야.’
분명 아파서 찾아온 건데, 저를 삼킬 듯 바라보는 눈빛에 자꾸만 다른 생각이 들었다.
“해도 돼?”
그의 물음에 놀란 로엔이 ‘뭘요?’라고 물으려다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어느새 그의 시선이 제 입술에 닿아 있어서다. 말하지 않아도 그의 의도가 너무도 명백했다.
따가울 정도로 쏟아지는 날 선 긴장감에 로엔은 고갤 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피할 수조차 없었다.
“어, 그게…….”
대답을 하지 못한 채 망설이는 사이, 그가 고갤 숙여 입을 맞춰 왔다. 마치 맹수가 목을 축이듯 그녀의 입술을 핥아 내렸다. 그 나른하고 간지러운 감촉에 로엔은 흠칫 몸을 떨며 눈을 꽉 감았다.
“하아, 하아.”
그의 입술이 떨어지자 로엔은 참고 있던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 모습에 진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간다.
‘하아, 창피해서 미치겠네.’
분명 제가 그와의 입맞춤을 잔뜩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듯했다.
“잠깐, 잠깐만 떨어져요.”
진정 좀 해야 했다. 로엔이 손을 넣어 두 사람 사이에 간격을 만들려 했지만 그는 벽처럼 단단해 꼼짝도 하지 않는다.
“미안. 움직일 힘이 없어서…….”
핑계라는 게 뻔히 읽혔다. 그리고 그 말에 항의하기 위해 입을 연 순간, 그가 무섭게 다시 입술을 겹쳐 왔다.
이번엔 닿았다 떨어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습기를 품은 입술이 열기마저 품고 진득하게 들러붙는 키스였다.
말캉한 입술을 뭉개듯 짓쳐 오던 입술이 아쉬움을 품고 또다시 떨어졌다.
‘으음.’
심장이 간질거렸다. 애를 태우듯 닿았다 떨어지길 반복하는 그의 입맞춤에 조급증이 밀려들어 무의식적으로 턱을 기울였다. 아파서 치료를 원하는 건 그였지만, 그와의 키스에 안달 난 건 저였다.
쿡쿡,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놀라 고갤 드니, 이번엔 그의 은청색의 눈동자 역시 나른하게 풀려 있었다.
제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민망했다. 민망한 감정을 감추기 위해 로엔이 평소보다 더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프다면서요? 웃을 여유가 있나 보네요.”
시선을 마주할 수 없어 슬쩍 피하려 하자, 그가 그녀의 턱을 붙잡곤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또다시 그의 눈동자에 어린 반점까지도 다 보일 수 있는 거리에서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그의 창백한 얼굴이 눈이 들어왔다.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아서인지 그의 눈가가 어두웠다. 짙게 음영이 진 이목구비와 열기로 짙어진 은청색의 눈동자엔 아직 사고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착각이야. 난 지금 여유 따위 하나도 없거든. 만약 내가 웃었다면 그건 너와 닿아 있기 때문이야. 이상하게도 널 보고, 너와 이렇게 마주한 채 서 있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사라지는 느낌이거든.”
제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가 입술을 부딪쳐 왔다. 탐색하듯 조심스럽던 입맞춤이 어느새 농밀해져 서로의 입술을 얽고 체액을 삼켰다.
“하아!”
로엔의 나른한 한숨 소리가 그의 입술 안으로 삼켜졌다.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분 좋은 키스였다. 그는 마치 제가 깨지기 쉬운 유리 세공품이라도 된 듯 조심스럽게 그녀의 입술을 핥고 짓쳐들었다.
그에게 보호받는 것 같은 감각에 목 안에 울컥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하아, 시모네타.”
열기로 젖은 그의 목소리가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나른하게 풀린 그의 속삭임에 로엔은 저도 몰래 그의 옷을 힘껏 움켜쥐었다.
발끝이 곱아들었다. 로엔은 낯선 감각을 견디기 위해 발끝에 힘을 주었지만 소용없었다. 등줄기를 타고 나른한 열기가 확 퍼졌다.
위험해. 이러다간 어떻게 되어 버릴 것 같아…….
“잠깐, 공작님. 잠깐만.”
퍼뜩 정신을 차린 로엔이 입술을 떼곤 그를 밀어냈다. 지금까지 꼼짝도 하지 않던 그가 이번엔 순순히 물러섰다.
“뭔지 빨리 말해. 듣고 있으니까.”
“그게, 이제 충분한 것 같아서요. 그러니까 이제 키스는 그만하는 게 좋겠어요.”
“왜 그래야 하지?”
“네?”
의아한 듯 저를 보는 진의 시선을 마주한 로엔은 입술을 깨물었다.
“서로에게 필요한 거잖아. 그러니까 충분할 때까지 해도 되는 것 아닌가? 그리고 난 너에게 날 마음껏 이용하라는 말도 했었고. 그러니 너도 그러면 안 될까?”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서로에게 필요한 체액을 삼키는 행위가 너무도 사적인 것이라 문제였다.
서로의 입술을 삼키고 체액을 나누는 일은 연인들의 키스와 닮아 있어서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지금처럼.
“공작님이야 입술을 저에게 막 내주셔도 상관없는 모양이지만, 전 아니거든요. 저는 계약대로 위급한 상황에서만…….”
“누가 막 내준다고 했지?”
로엔의 말을 자르며 진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그럼 아니란 건가요? 지금도 이렇게 막 입술을 내주고 계시잖아요.”
로엔이 눈살을 찌푸리며 지지 않고 말했다.
“아무나에게 막 주는 건 아니란 뜻이었다. 너니까 허락했던 것이고.”
두근.
심장이 속도 없이 뛴다. 귓불 역시 눈치도 없이 붉어졌고.
그러고 보니 오늘 진의 태도가 평소와 달랐다. 아픈 몸을 이끌고 상점으로 저를 찾아온 것도 놀랐지만, 저와 입술을 나누고 시선을 부딪치는 내내 녹아내릴 것처럼 다정했다.
턱을 쥐고 입술을 얽는 행위 역시도 온몸이 간지러울 정도였다. 마치 연인에게 하는 것처럼…….
‘설마 그가 날 좋아하나?’
로엔은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화들짝 놀라, 서둘러 고갤 가로저었다. 대체 뭘 어떻게 하면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어떻게 되는 거지? 계약과 상관없이 필요할 때마다 키스를 할 수 있다는 뜻이겠지?
생각만 해도 얼굴에 열이 몰리는 느낌이었다. 로엔은 재빨리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지워 내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
“흠흠, 아무리 그래도 제 입술은 함부로 줄 순 없을 것 같네요. 처음 계약한 대로 하는 게 좋겠어요.”
로엔이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지 말고 다시 생각해 보는 건 어때? 분명 너에게도 도움이 될 거야.”
진이 평소와 달리 질척거리며 그녀를 설득했다. 로엔은 난처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귀가 녹을 것처럼 달콤한 유혹을 떨쳐 내기가 어려워서다.
진 로이슈덴은 타고난 바람둥이가 분명하다. 겉모습은 수도원의 수도사처럼 금욕적이게 생겨서는, 하는 행동은 양의 탈을 쓴 맹수였다. 잘못했다간 한입에 꿀꺽 삼켜질 수도 있었다.
“그럼 동의한 걸로 알고 계약서는 수정하는 게 좋겠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진은 그녀의 침묵을 동의라고 여긴 모양이었다.
“네? 잠깐만 그게 아니라…….”
진이 그녀의 턱을 붙잡곤 저를 보게 했다. 로엔은 할 말을 삼킨 채, 그와 눈을 마주쳤다. 진득하게 달라붙는 그의 시선에 자꾸만 고갤 돌리고 싶었다.
“고민할 게 있나? 세 번을 돕든, 여러 번을 돕든 별 차이도 없을 것 같은데. 아니, 오히려 세 번이란 계약에 묶여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더 안전한 것 아닐까?”
은근슬쩍 밀어붙이는 기술이 수준급이다. 로엔은 반박할 이유를 찾지 못해, 결국 그의 제안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알았으니, 이제 저택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겠어요. 혹시 그 몸으로 혼자 오신 건 아니죠?”
뭐가 그리 좋은지 진이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덩달아 로엔의 심장 부근이 자꾸만 간질거렸다.
“알렉이 마차를 준비해 주긴 했지만, 혼자 왔어.”
“정말 혼자 오셨다고요? 알렉도 없이? 정말 미치, 아니 큰일 날 일을 벌이셨네요. 만에 하나 제가 이곳에 없으면 어쩌실 뻔했어요?”
“하지만 있었지. 그럼 된 것 아닌가?”
별문제 아니라는 듯 여상하게 말하는 진을 보며, 로엔이 눈살을 찌푸렸다.
“돌아가요. 제가 저택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진이 물끄러미 로엔을 응시했다. 그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왜요? 저와 함께 가는 게 싫으시면, 혼자 마차로…….”
“혹시 로열 에스콧에 왔었나?”
예상치 못한 질문에 로엔의 입매가 설핏 굳어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그냥. 널 본 것 같아서.”
날 봤다고?
그럴 리 없었다. 베일을 벗긴 했었다. 하지만 제가 베일을 벗고 있는 동안엔 그는 의식이 없었다. 공작새의 눈물을 그에게 먹이기 위해 입을 맞추는 동안에도 그는 그것을 삼키지도 못할 정도였고. 착각이 분명했다.
가능성을 타진해 본다면, 그에게 입을 맞췄으니 그걸 시모네타라고 생각했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착각이었을 겁니다. 귀족도 아닌 제가 초대장도 없이 그곳에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요.”
로엔은 시치미를 뗐다. 그녀의 대답에 진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그의 침묵에 초조함이 밀려들었다.
‘설마 눈치챈 건가?’
아니, 그럴 리 없었다. 아드리안 제국의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록스버그 공작과 일개 상인인 시모네타를 연관 지어 생각할 사람은 없을 터다.
무엇보다 록스버그 공작은 얼굴은 물론 몸에 흉측한 흉터를 가진 이었고, 시모네타는 흉터 따윈 없는 평범한 여인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진이 눈치가 빠르다고 해도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고 결론짓는 건 힘들었다.
“그렇지. 불가능한 일이지.”
내내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결론을 내린 듯 말했다. 그의 대답에 불안으로 뛰던 심장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다행이었다.
“네, 환영을 보신 게 분명해요. 위험한 순간이었으니까 저와의 계약이 떠올랐을 수도 있고요. 그 정도로 절박했으니까요.”
로엔은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순간 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지만, 조급한 마음 때문에 로엔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