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문득 든 의문에 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라우렐과 세이지야 전쟁터에서 5년 동안 생사의 경계를 오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믿게 된 존재였다.
시모네타 역시 같은 비밀을 품고 있다는 사실에 동질감을 품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신뢰였고.
하지만 록스버그 공작은 아니었다.
사실 가장 의심스럽고 경계해야 할 존재가 바로 그녀였다. 황제와 모종의 관계를 갖고 그를 진탕으로 밀어 넣을 확률이 가장 큰 이였고, 그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면 그 비밀을 핑계로 그의 목을 조일 가능성이 가장 컸으니까.
그러니 저를 도울 사람은 록스버그 공작이라고 믿었던 자신의 생각은 잘못돼도 한참은 잘못된 판단이었다.
‘그나저나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날 도운 건지 모르겠군.’
무엇보다 로열 에스콧에서 에드윈의 뜻을 거스르며 저를 저택까지 옮겨 온 것이라면 이건 황제 쪽과 척을 질 각오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해서다.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인님의 비밀을 숨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내린 결정이란 점만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유능한 집사인 알렉답지 않게 서론이 너무 길었다. 한마디로 제가 의식을 잃고 있던 사이 밑밥을 깔 만큼 아주 난처한 일이 벌어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변명은 그쯤 하면 됐고. 내가 알아서 감안해 들을 테니, 어서 말이나 해 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진의 말에도 불구하고 알렉은 몇 번이나 숨을 고른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록스버그 공작님께서 폐하께 비공식적으로 주인님과 약혼한 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기지 않아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그 모습이 살벌했는지 알렉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비공식적으로 약혼한 사이라 이거지? 그럼 공식적으론 뭔지 궁금하군.”
진의 입가가 냉소로 비틀렸다.
“폐하께서도 같은 질문을 하셨지만, 공작님은 대답을 미루셨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뒷수습은 생각도 않고 대책 없이 일만 벌이는 성격은 아니라서.”
진이 입가를 비틀며 한껏 비꼬았다. 그 모습에 애가 타는 쪽은 오히려 알렉이었다.
진의 표정이 싸늘해질수록 어떻게든 착하고 상냥한 록스버그 공작에 대한 오해를 풀어야겠다는 생각뿐인 듯했다.
“사실 주인님이 사고가 난 직후 공작님이 저를 찾아와 주인님을 돕겠다고 하셨습니다. 처음엔 저도 공작님처럼 의심했지만 어떻게든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 약혼에 대한 이야기 역시 언제든 철회할 수 있는 내용이니 안심해도 된다고 하셨고요.”
“입에 발린 말로 널 회유했던 모양이군.”
알렉이 재빨리 고갤 가로저었다.
“그게 아니라, 진심인 듯 보였습니다. 무엇보다 공작님은 더 이상 지켜야 할 명예와 평판 같은 건 없으니 이용해도 상관없다고 말씀하셨고요.”
진은 알렉의 설명에 코웃음을 쳤다.
‘그게 말이 돼? 아무 이유도 없이 선의를 베푸는 게?’
거짓말이 분명했다. 아니면 제 환심을 사기 위한 방편이었거나.
귀족가의 레이디에게 명예와 평판은 목숨만큼이나 중요했다. 그런데 저를 구하고자 그 목숨을 시궁창에 던져 버렸다는 말은 솔직히 믿기 힘들었다.
“순진하게 그 말을 믿은 건 아닐 테지?”
“믿지 않았습니다. 의심도 여러 번 했고요. 하지만 폐하와 귀족들로부터 주인님을 보호해 주신 분은 공작님뿐이었습니다. 또한 저택으로 함께 돌아와 치료까지 해 주신 덕에 주인님이 이렇게 깨어나셨습니다.”
그러니 믿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진이 귀족의 사탕발림에 홀라당 넘어간 알렉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렉, 너도 잘 알잖아? 귀족들이 제 이익을 위해 얼마나 거짓말을 잘하는지. 분명 록스버그 공작 역시…….”
“아닙니다. 록스버그 공작님은 다른 귀족들과 다릅니다.”
이건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이미 알렉을 설득해 생각을 바꾸는 건 힘들 것 같았다.
진은 이렇게 된 이상, 알렉의 말을 끊는 대신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끝까지 들어 보기로 했다.
“사실 제가 공작님을 믿게 된 이유는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진심인 것 같아섭니다. 켈피와 주인님을 걱정하는 마음은 꾸며 낼 수가 없는 것이니까요.”
진은 그녀가 걱정했다는 말에 인상을 썼다. 알렉이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결론에 도달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그 순간 뭔가 머릴 스쳐 지나가는 게 있었다.
‘혹시 그레이트 모먼트에 실린 공작의 공개 구혼 때문인 건가?’
그것 때문에, 그러니까 록스버그 공작이 저에게 반해서 이 모든 걸 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진은 어이가 없어 알렉을 보았다. 흔들림 없는 알렉의 눈빛과 태도가 제 생각이 맞는다는 걸 보여 주는 듯 했다.
그는 마땅찮은 얼굴로 고갤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짧은 시간에 사람을 홀려 놓았군. 내 말에 한 번도 반박해 본 적 없는 네가 이렇게까지 싸고돌 정도라니.”
“죄송합니다, 주인님.”
면목 없다는 듯 알렉이 고갤 숙였지만, 절대 아니란 말은 하지 않는다.
결국 진은 그를 다그치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 어차피 제가 상대해야 할 사람은 제 저택의 집사가 아니라, 록스버그 공작이었으니까.
“다시 방문한다는 말은 없었고?”
“오늘 다시 방문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한 번 내 영역에 발을 들였으니, 제대로 표시를 하겠다는 선전포고로군.’
약혼자라는 가짜 신분까지 얻었으니 로이슈덴 공작가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명분까지 확보한 셈이었다.
생각보다 영리했다. 만약 처음부터 켈피에 대한 공격까지 알고 계획한 것이라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치밀한 여인이다.
무엇보다 황제와 귀족들 앞에서 약혼했다는 말까지 했으니, 이번 기회에 기정사실로 만들 의도가 분명해 보였다.
‘지극정성으로 날 돌봤던 이유가 있었군.’
진의 눈빛이 서늘해지며, 입가 역시 냉소로 비틀렸다.
“다른 의도는 없으실 겁니다. 주인님의 상처가 꽤 깊은 데다가 의식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이니 걱정이 돼서…….”
알렉이 진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로엔을 변호했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제가 의식을 잃은 그 짧은 사이 제 사람들을 흔들어 놓은 게.
“알렉, 잊은 건 아닐 테지? 내가 드래건의 심장을 삼킨 후론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는 걸 말이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시도 잊은 적이 없고요.”
“그럼 괜한 걱정이었다는 것도 알겠군.”
진이 처음으로 알렉을 서늘한 눈빛으로 질책했다. 죽지 않을 걸 뻔히 알면서, 아무런 경계도 없이 록스버그 공작의 손을 덥석 잡은 것에 대한 경고였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결국 알렉의 입에서 죄송하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허릴 숙인 나이 든 집사를 보며, 진은 괜한 사람에게 화풀이한 제 치졸함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사실 어떤 의미에선 록스버그 공작의 방문을 반겨야 했다. 그래야 협박을 하든, 아니면 회유를 하든 그녀가 제 비밀을 말하지 못하도록 입막음을 해야 했다.
“방문 시간은 정했고?”
“정확한 시간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출발하시기 전에 미리 공작저로 사람을 보낼까요?”
“그게 좋겠다.”
대답과는 달리 진의 표정은 서늘했다. 사실 록스버그 공작을 만나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오늘은 됐고, 내일 방문해 줬으면 한다고 전해.”
“내일이요? 하지만 상처를 치료해야…….”
“거절하는 게 아니라 미루는 것뿐이야. 지금 당장 가 볼 곳이 있다.”
진이 더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알렉은 대체 그 몸을 하고 어딜 가려는 거냐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서슬 퍼런 제 주인의 표정에 차마 행선지를 묻지 못하는 얼굴이다.
“꼭 가야 해. 특효약이 거기에 있거든.”
진이 변명하듯 설명을 덧붙였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다. 하지만 하루 사이에 말도 못하게 핼쑥해진 알렉의 얼굴을 보자, 입을 꾹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제야 알렉이 고갤 끄덕였다.
“은둔자의 숲까지 함께 가겠습니다. 그 몸으로 혼자 움직이시는 건 아직 무리십니다.”
은둔자의 숲?
알렉이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진은 애써 사실을 바로잡아 주지 않았다. 평소의 그였다면 알렉의 말처럼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은둔자의 숲에 가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에겐 은둔자의 숲보다 더 좋은 치료약이 있었다.
“괜찮아. 혼자도 충분해.”
“하지만, 주인님…….”
“혼자 가야 해. 그리고 내가 가려는 곳은 은둔자의 숲이 아니야. 그러니 알렉, 이번엔 네가 포기해.”
알렉은 빠르게 머릴 굴렸다. 아픔 몸을 이끌고 굳이 혼자 가야 하는 곳이 어딘지를.
그러다 어렴풋이 그곳이 어딘지 깨닫고는 놀라 입이 벌어졌다. 믿기지 않아서였다.
‘정말 주인님은 시모네타 님을…….’
차마 혼잣말로도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뱉어 낼 수 없었다. 그저 몸을 일으켜 외출 준비를 하려는 제 주인을 멍하니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리고 가까스로 한마디를 뱉어 냈다.
“마차를 준비해 두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