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아직 아무것도 몰라. 하지만 폐하도 암살 의혹에선 자유로울 순 없을 거야.”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네요. 로이슈덴 공작님은 폐하와 사촌지간이잖아요. 그래도 피를 나눈 혈족인데…….”
세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로엔은 오히려 피를 나눈 혈족이기에 더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고귀해야 할 황제의 자리는 사실상 끝없는 의심과 탐욕으로 점철된 곳이란 걸 납득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어서 빨리 라이칸이 돌아왔으면 좋겠어.”
로엔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계단을 올랐다. 아주 긴 하루였다.
로열 에스콧으로 향하는 마차에서부터 오늘 일어날 사건에 대해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진의 사고를 본 후 제 반응은 예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아직도 화살이 그의 몸을 관통하던 순간을 생각하면, 온몸이 얼어붙은 듯 소름이 끼쳤다. 심장이 무섭게 가라앉으며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를 구해야 한다는 것 외엔.
‘그가 없으면 가문의 저주를 풀 수 없기 때문이야.’
그래서 그런 것뿐, 다른 감정은…….
“없어.”
당연히 없어야 하고.
로엔은 굳은 얼굴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괜스레 초조했다. 저택으로 돌아왔지만, 아직 의식을 찾지 못했을 진을 떠올리자 걱정이 됐다.
“세실, 내일부터 소문을 만들 생각이야.”
“소문이요? 무슨 소문인데요?”
“내일이 되면 너도 알게 될 거야. 내가 바라는 건, 그 소문이 사실이 되는 것이고.”
확인해 보지 않았지만, 오늘 발간된 그레이트 모먼트지의 특별판에 로열 에스콧에 있었던 일들이 실렸을 터였다. 특히 그녀와 진의 관계에 대한 암시가 중점적으로 다뤄졌을 테고.
‘이제 판을 깔아 놨으니,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켜보면 될 테지.’
그리고 10년 동안 끈질기게 그녀를 쫓던 암살자의 정체가 드러날 테고.
그들을 처리하고 나면, 진 로이슈덴을 이용해 가문의 저주를 풀면 다 끝이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때 계단을 오르던 로엔은 낯선 예감에 걸음을 멈췄다. 그리곤 뒤따라오던 세실을 잡아당겨 재빨리 바닥에 엎드렸다.
두 사람의 몸이 바닥에 넘어진 순간.
챙! 파사삭.
바로 옆에 있던 유리창이 날카로운 소릴 내며 산산조각 났다.
“주, 주인님?”
로엔에 의해 바닥에 엎드린 세실이 사색이 된 얼굴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빌어먹게도, 또 암살자였다.
자리에서 일어선 로엔이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주인님, 어딜 가시는데요? 위험해요.”
세실이 부르는 소릴 뒤로하고 빠르게 계단을 내려간 로엔은 유리 파편에 섞여 있는 화살을 확인했다.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로열 에스콧에서 진을 노렸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제길!”
화살을 쏘아보던 로엔이 재빨리 현관으로 나가려 하자, 언제 왔는지 스미스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위험합니다.”
안 된다는 듯 천천히 고갤 가로저었다.
“알아. 하지만 지금 확인해야 해. 위험하다고 그들의 정체를 알 기회를 놓칠 순 없어.”
로엔의 단호한 태도에 스미스 역시 그녀의 팔을 놓았다.
“함께 가겠습니다.”
로엔이 스미스에게 고갤 끄덕였다. 그리곤 굳게 닫혀 있던 저택의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은 순간, 문이 확 하고 열렸다. 암살자가 간 크게도 현관문을 열고 침입해 들어오려는 모양이었다.
바짝 긴장한 로엔이 호신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단검을 신고 있던 가죽 부츠 안에서 꺼내 공격할 준비를 했다.
잠시 후 검은 그림자가 일렁이며 안으로 들어선 순간, 로엔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암살자를 향해 단검을 날렸다.
“엇, 주인님?”
공격과 동시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황한 로엔이 재빨리 공격을 멈췄다.
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침입자가 라이칸이란 사실을 깨닫고, 최대한 손에 힘을 빼긴 했지만 날카롭게 벼린 단검의 끝이 그의 머리카락을 스쳤다.
사락 소리와 함께 머리카락이 바닥에 떨어졌다.
“제길! 라이칸! 죽일 뻔했잖아.”
로엔의 목소리가 당혹감으로 떨렸다. 스미스를 비롯해 세실 역시도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로 인해 말을 잇지 못하는 눈치였다.
“괜찮으십니까?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나 급히 오던 참이었습니다.”
현관 앞에 선 라이칸이 먼저 로엔의 안위를 살폈다. 그리고 무사한 것을 확인하곤,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난 괜찮아. 너는?”
“아, 다친 곳은 없습니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라이칸이 멋쩍게 웃자, 로엔 역시 고갤 끄덕였다. 그리곤 단검을 갈무리하며 밖을 살폈다.
“들어오면서 본 자는 없었고?”
“없었습니다. 제가 한발 늦은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누군가 유리창으로 화살을 쏘았어. 경고를 하려는 모양이야. 네가 돌아온 시각에 맞춰 화살을 쏜 걸 보니 그쪽에서도 똥줄이 타는 거지.”
로엔의 말에 라이칸의 시선이 유리 파편 사이에 놓여 있는 화살로 향했다. 성큼성큼 걸어간 라이칸이 화살을 들어 주의 깊게 살폈다.
“어떤 가문 것인지 알겠어?”
“특징 없는 평범한 화살입니다.”
라이칸의 대답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로엔이 고갤 끄덕였다.
“뭐, 차차 알아보면 되겠지. 그나저나 돌아 와서 기뻐. 오자마자 암살자와 맞닥뜨리긴 했지만, 집에 돌아온 걸 환영해.”
로엔이 환하게 웃으며 라이칸을 반겼다. 그러자 굳어 있던 라이칸의 표정 역시 조금 누그러지며, 주인에게 예를 갖췄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앞으로 자릴 비우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 다시 날 떠날 일은 없을 거야. 그래야만 되고.”
“라이칸 님, 돌아와서 기뻐요.”
그제야 사색이 되었던 세실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스미스 역시 안도한 듯 반갑게 그를 맞았다.
“네가 돌아왔으니 이제 안심이군. 저녁에도 발 뻗고 잘 수 있겠어.”
스미스의 농담 섞인 말에 라이칸이 고갤 끄덕여 보였다.
“공작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도 너에게 할 말이 있어. 서재로 가자. 스미스, 차는 그쪽으로 내와.”
두 사람은 서둘러 서재로 향했다.
로엔은 오늘 로열 에스콧에 있었던 일이 저와는 상관없길 바랐다.
금기된 주술, 그리고 록스버그 공작가에만 전해지는 라딘의 숨겨진 예언까지.
이 모든 사실이 황제인 존더부르크 황실과 연관되어 있다면, 위험했다.
* * *
“깨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가까이에서 들리는 알렉의 목소리에 진은 눈을 떴다. 그리곤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심장 부근에 느껴지는 타는 듯한 통증에 눈살을 찌푸렸다.
“어떻게 된 거지? 네가 날 여기로 데려 온 건가?”
욱신거리는 통증을 참아 내며, 진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아직 누워 계십시오. 출혈은 멎었지만, 상처가 아무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알렉의 말에 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거지?”
의원은 물론 치료사도 부를 수 없다는 걸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알렉은 마치 누군가 저를 치료하고 당부라도 받은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로열 에스콧에서의 일은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대답 대신 난처한 얼굴을 하는 알렉을 보자, 미간에 잡힌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혹시 그곳에 시모네타가 왔었나?”
“시모네타 님이요? 아니요, 절대 아닙니다. 그곳은 귀족 외엔 올 수 없는 곳이라, 초대장도 없이 들어올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당황한 알렉이 서둘러 부인했다.
“그렇지.”
알렉의 대답에도 진은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는 듯 잠시 말이 없었다.
“하지만 분명 내가 본 것 같거든. 내게 입을…….”
진은 말끝을 흐리며 고심했다. 누군가의 체액을 삼키고 고통을 잠재울 수 있으며, 몸속에 날뛰는 드래건의 힘을 통제할 수 있는 존재는 그가 아는 한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입을 맞추신 건 공작새의 눈물을 먹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절대 다른 의도는 없었으니 오해는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알렉이 누군가를 보호하려는 듯 다급한 목소리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 모습이 평소와 달라, 진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뭔가 일이 있었던가?’
로열 에스콧에서 제가 모르는 어떤 일이 일어난 모양이다.
지금껏 진을 제외하곤 이렇게 누굴 감싸고돈 적이 없는 알렉이 필사적인 걸 보면.
“로열 에스콧에서 날 여기로 데려오고, 치료까지 한 사람이 누구지?”
목소리가 생각보다 날이 섰다. 그가 누구든 제 비밀을 에드윈은 물론 귀족들에게 들키지 않게 도왔다는 사실에 고마워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건 다른 의미에서, 그를 도운 이에게 똑같이 약점을 잡혔다는 뜻이기도 했다.
‘분명 보았을 테지. 내 심장에 돋아난 드래건의 비늘을.’
굳은 얼굴에 냉기가 흘렀다. 어린 시절부터 진을 보아 온 알렉이었지만, 그 모습에 긴장이 되고 두려움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제 주인이 그를 헤치지 않을 것이란 믿음과는 상관없는 감정이었다.
“그게…….”
“록스버그 공작인가?”
우물쭈물하던 알렉이 놀란 듯 고갤 들었다.
“기억나신 겁니까?”
“아니. 잠깐 정신이 들었을 때, 검은 베일을 본 것도 같아서.”
“아아.”
진의 대답에 순간 화색이 돌았던 알렉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어떻게 폐하의 눈을 피해 올 수 있었는지 말해 봐.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이상하게도 놀랍지 않았다. 은연중에 로열 에스콧에서 그를 도울 사람이 있다면, 그건 록스버그 공작 한 사람뿐이란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여겨졌다.
어이가 없었지만 사실이었다.
‘처음으로 받는 호의라는 게 이렇게 큰 것이었나? 몇 번 만나지 않은 존재를 무의식적으로 신뢰할 만큼?’
조금 충격적이긴 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누군가를 싶게 믿는 성격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