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티룸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공작님. 말씀 편히 하셔도 됩니다.”
뒤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로엔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알렉은 괜한 말을 한 건 아닌가 걱정이 됐다.
티룸 앞에 도착한 알렉이 로엔을 위해 문을 열어 주었다.
“제가 너무 무례…….”
“고마워, 알렉.”
생각지도 못한 순간 흘러나온 대답에 알렉이 고갤 들었다. 또다시 검은 베일이 눈에 들어왔다. 묘한 감정이 일렁였다.
생각해 보면 그녀와는 오늘이 첫 대면이었다. 그리고 길고 길었던 하루를 함께 보낸 것뿐이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그런 사람에게 신뢰를 품고 있었다. 정이 많은 메리언이라면 모를까, 로이슈덴 공작가의 집사인 그가 가져선 안 될 만큼 낯선 감정이었다.
무엇보다 약혼했다는 거짓말까지 한 공작이었는데도, 믿고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생겼다는 안도감마저 들다니. 제 주인이 깨어나 이 말을 듣는다면 비웃을 게 분명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공작님. 얼른 차를 내오겠습니다.”
“허브티가 좋겠어.”
알렉이 고갤 끄덕이곤 티룸을 나가자, 로엔은 지난번 이곳을 방문했을 때와 똑같은 자리에 앉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며칠 전 상인인 시모네타로 이곳에서 진과 애프터눈 티타임을 가질 때까지만 해도 다시 이 자리에 앉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것도 절대 이곳에 올 수 없다고 생각한 록스버그 공작의 신분으로.
‘삶이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는 말이 정말 맞는 모양이야.’
로엔은 그날 진과 함께 보았던 찻잎점을 떠올렸다. 명백하게 떠오른 진의 점괘와는 달리 그녀의 찻잔은 깨끗했었다. 아무것도 결정된 게 없다는 듯이.
‘오늘처럼 내 선택에 의해 모든 것이 바뀔 수 있다는 뜻이었던 건가?’
로엔은 로열 에스콧에서 서늘한 눈빛으로 저를 쏘아보던 에드윈을 떠올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과적으로 에드윈과 척을 지어 버린 것이다.
지금껏 공들여 온 게 얼만데. 오늘의 제 선택으로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때, 벌컥 하고 다시 티룸의 문이 열렸다.
“뭐야, 당신?”
노크도 없이 열린 문만큼이나, 무례하고 건방진 목소리였다. 그리고 로엔은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확인하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었다.
세이지였다.
“왜 당신이 여기에 있는 건데? 설마 병문안이라도 온 거야?”
그는 로엔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티룸 안으로 들어와 그녀의 맞은편에 삐딱하게 자릴 잡고 앉았다.
“쳇, 검은 천을 뒤집어써 아무것도 볼 수가 없네.”
“소문을 듣지 못하신 모양이군요.”
로엔은 침착한 태도로 세이지의 불만 섞인 항의를 무시했다.
“소문? 설마 비공식적으로 당신과 우리 대장이 약혼했다는 그 허무맹랑한 소문을 말하는 건 아니지?”
역시나. 어떤 상황에서건 돌려 말하는 법이 없는 세이지다운 질문이었다. 그러다 세이지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왜 웃지? 내 말이 그렇게 우스워?”
그제야 로엔은 제가 세이지를 보며 웃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제가 웃었나요?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사실 우스워서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내가 아는 뭔가와 좀 닮은 것 같아서.”
세이지의 짙은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접점도 없는 두 사람 사이에 닮은 사람이 존재할 리 없다는 태도였다.
“대체 뭘 닮았는데? 혹시 어릿광대나 뒷골목의 무뢰배는 아니겠지?”
“켈피였어요. 사람이 아니고 말이라 더 불쾌하려나?”
막상 말을 뱉고 나니 실수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난 또 뭐라고. 뭐, 좀 닮긴 했지. 길들여지지 않은 용맹함이라든가, 주인에게 맹목적인 충성심을 발휘하는 건.”
다행히 싫지 않은 모양이다. 아니, 오히려 기뻐 보였다.
세이지의 입가가 위로 말려 올라가며 웃고 있었다.
“내가 닮았다고 한 건 그런 게 아니라 순한 눈망울이었는데.”
순간, 그의 입가에 감돌던 웃음기기 빠르게 탈색됐다. 그리곤 난생처음 듣는 말이라는 듯 황당한 표정으로 로엔을 보았다.
눈이 삔 건 아니냐는 듯이.
“잘 보이긴 해? 아님, 그 검은 천 좀 치우는 건 어때? 진짜 미쳤네. 순한 눈망울이라니. 설마 내가? 이 세이지가 켈피랑 닮을 게 없어서 눈망울이 닮아?”
납득할 수 없다는 듯 혼잣말을 쏟아 내는 세이지를 보자 정말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하는 모양새가 꼭 심통 난 어린아이 같았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귀여웠다.
하지만 그 말은 입안으로 꼭꼭 삼켜 넣었다. 그 말까지 했다간, 자리에서 일어나 켈피처럼 날뛸 것 같아서였다.
“순한 눈망울과 망나니 같은 성격은 다른 법이니까요.”
그의 표정이 다시 뾰족해졌다. 그리곤 가슴 위로 팔짱까지 끼곤 로엔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니까 내가 망나니 같단 말이었네?”
“켈피도 순한 눈망울을 하고선 무섭게 날뛰더군요. 제 주인이 위험하니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였지만.”
세이지는 그제야 제가 왜 켈피와 닮았다고 했는지 알아들은 것 같았다.
물끄러미 로엔을 보던 세이지가 퉁명스럽게 속내를 드러냈다. 티룸에서 로엔을 발견한 순간부터 묻고 싶었던 말일 터였다.
“왜 도왔지? 그런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우리 대장에게 잘 보이고 싶었어?”
“…….”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세이지가 눈살을 찌푸리며 불쌍하다는 눈빛을 했다.
“만약 그랬다면 꿈 깨. 우리 대장은 도움을 받았다고 해서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할 만큼 다정한 성격이 아니거든. 아마 돈을 주겠지. 그러니 대장이 깰 때까지 잘 생각해 놔. 얼마를 원하는지.”
“돈은 내가 더 많아요.”
돈엔 관심 없다는 뜻을 전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 아냐? 난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세이지의 말이 맞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진 것과 상관없이 더 많은 돈을 원했다.
그 단적인 예가 에드윈이었다. 아드리안 제국은 물론, 진에 의해 타란 대륙을 소유하게 되었지만 그는 더 원했다.
켈피. 아마 그것은 핑계일 테고, 에드윈은 진 로이슈덴 공작이 가진 모든 걸 빼앗고 싶은 눈치였다.
“난 아니에요. 돈은 더는 필요 없거든요.”
“그럼 돈 말고 뭘 원하는데?”
마치 로엔이 뭘 말할지 안다는 눈빛을 했다. 아마 세이지는 그녀가 원하는 게 진 로이슈덴일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로엔의 대답은 그의 예상을 한참이나 빗나갔다.
“신뢰. 그리고 그 신뢰를 통해 얻게 될 사람.”
삐딱하던 세이지의 얼굴에서 비웃음이 사라졌다.
“그게 로이슈덴 공작님이나 그쪽이 된다면 기쁠 것 같군요. 성함이?”
“세이지야. 대장과 함께 전쟁터에서 있었고, 지금은 황실 근위대에 있어. 지루하기 짝이 없는 곳이지.”
“세이지 님, 다음에 또 뵐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그리고 알렉에게 차는 다음에 마시겠다고 전해 주세요. 그리고 내일 다시 방문하겠다는 것도. 로이슈덴 공작가엔 의원이 없어서 제 도움이 꼭 필요하거든요.”
로엔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놀라 말을 잇지 못한 채 앉아 있는 세이지를 남겨둔 채 티룸을 나왔다.
* * *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분명 로열 에스콧엔 함께 가셨는데, 집사님만 혼자 돌아오셔서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아세요? 거기다 집사님은 주인님이 로이슈덴 공작가에 가셨다는 말만 하시곤 입을 꼭 다물지. 마음 같아선 담이라도 넘을 뻔했다고요.”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현관 앞에서 로엔을 기다리던 세실이 울상이 된 얼굴로 참고 참았던 걱정을 쏟아 냈다.
하지만 로엔은 세실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옆에 서 있는 스미스에게 외투를 건넸다.
“스미스, 방으로 차를 좀 가져다줘.”
“바로 가지고 올라가겠습니다. 그리고 목욕물을 미리 준비해 두었습니다.”
“고마워.”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던 세실이 여전히 울상인 얼굴로 로엔을 보았다.
“제 말엔 대답도 안 해 주시고. 너무하세요.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집사님 말론 로열 에스콧에서 사고가 있었다고 하던데, 주인님은 괜찮으신 거죠?”
“사고가 있었다고만 말했습니다.”
자릴 뜨려던 스미스가 서둘러 부연 설명을 했다.
“잘했어.”
또다시 두 사람에게서 없는 사람 취급당하자, 세실이 뚱한 표정을 했다. 로엔이 저택으로 돌아올 때까지 현관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계속해서 제 마음이 무시당하는 것 같아 서운했다.
“제가 눈치도 없이 캐묻기나 하고. 죄송하게 됐네요, 주인님.”
세실이 눈꼬리가 축 처진 채 힘없이 말하자, 그제야 로엔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속상했어? 그런 것 아냐. 사고는 내가 아니라, 로이슈덴 공작님에게 있었어. 그래서 스미스가 말을 아낀 것이고.”
로엔이 말을 건네자 언제 그랬냐는 듯 세실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로이슈덴 공작님이라고요? 대체 무슨 사고였는데요?”
“암살 시도가 있었어. 공작님이 화살에 맞았고, 의원에게 상처를 보일 수 없는 사정이 있어서 지금까지 내가 곁에 있으면서 치료를 해 줘야 했거든. 그래서 늦은 것이고.”
순식간에 세실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목숨이 위태로운 건 아니고요?”
“다행히 화살이 심장을 비껴갔어. 내가 할 수 있는 치료는 모두 했고, 이제 의식이 돌아오기만 기다리면 돼. 그래서 돌아온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더는 없어서.”
“암살이라니. 그곳에 황제 폐하와 귀족들도 함께 있었던 것 아닌가요? 분명 로열 에스콧을 지키는 기사단이 있었을 텐데. 어쩌다가요?”
두려움으로 입술이 떨리는 게 보였다. 지금껏 로엔이 암살 위협을 끊임없이 받아 온 터라, 말만 들어도 무서운 모양이었다.
“그러게. 어쩌다가 그런 곳에 암살자가 들어올 수 있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 누군가 눈감아 준 게 아니라면.”
사실 눈감아 준 게 아니라, 계획한 게 아니냐는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대상이 무려 황제 에드윈이었다.
“간도 크네요. 하지만 다행이에요. 주인님이 아니라서요. 욕해도 상관없어요. 로이슈덴 공작님이 암살 사건에 휘말린 건 안타깝긴 하지만, 저에겐 주인님이 더 중요하니까요. 이건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주인님을 노리려다 로이슈덴 공작님으로 바뀐 건 아니겠죠?”
세실의 물음에 로엔이 고갤 가로저었다.
“처음부터 그들이 노린 건 로이슈덴 공작이었어. 내가 아니라.”
세실이 고갤 끄덕였다.
“피곤하실 텐데 얼른 올라가요. 그런데 로이슈덴 공작가 사람들이 순순히 주인님 명령을 듣던가요?”
“어쩔 수 없었을 테지. 내가 공작님을 구해 줬거든. 폐하에게서.”
거기다 치료까지 해 주었다. 그러니 그들이 로엔을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폐하에게서요? 설마 암살자가…….”
세실이 창백해진 얼굴로 서둘러 입을 다 물었다. 그리곤 제 말을 누가 듣기라도 할까 두렵다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