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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66화 (67/201)

66화

진은 낮게 신음을 삼켰다. 심장이 타는 듯 뜨겁다.

결승선을 향해 달리던 동안 들려왔던 주위의 소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의 눈동자엔 검은 침묵 속에서 활을 든 궁수가 활시위를 당기는 모습만이 선명했다.

날아드는 화살을 피하기 위해 고삐를 당기려는 순간, 미동도 없던 그의 미간이 여지없이 구겨졌다.

제길!

빌어먹게도 만년설로 제련된 화살이었다.

물의 정령의 혈족인 켈피를 소멸시킬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자, 제 심장 안에 꿈틀거리는 드래건의 힘을 깨울 열쇠이기도 했다.

화살이 날아오는 그 짧은 순간, 진은 선택해야 했다. 켈피를 살릴 것인지, 아니면 제 몸 속에 잠든 드래건의 힘을 소환할 것인지를.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성보다 본능이 먼저 움직였다.

고삐를 힘껏 당긴 진은 켈피의 심장을 향해 날아드는 화살을 온몸으로 막아 냈다. 살과 뼈를 뚫는 지독한 고통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정신을 잃기 전, 진의 시선이 에드윈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의 입가에 어린 잔혹한 미소를 보며 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에드윈이, 황제가 알고 있다.

제가 켈피에게 선택된 주인이며, 더 나아가 존더부르크 황실을 위협할 존재라는 걸.

200년 전 아드리안 제국이 세워질 당시, 대신전에 새로운 신탁이 내려졌었다. 그 사실을 아는 이는 단 세 명이었다. 신탁을 받은 대신관과 존더부르크 1세, 그리고 제1대 로이슈덴 공작이었다.

비록 존더부르크 1세에 의해 대예언가인 라딘의 예언이 귀족들과 제국민들에게 빠르게 퍼져 나가며 그날 받은 신탁의 내용이 흐려지긴 했지만, 신탁은 엄연히 존재했다.

그리고 신탁을 증명하는 예가 바로, 켈피였다.

「위대한 왕이 신성한 피를 가진 짐승을 길들인다. 곧 그것이 시작이며 아드리안 제국의 영광이 될 것이다.」

지금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신탁의 내용이었으며, 은밀하게 로이슈덴 공작가에서만 비서를 통해 전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날 내려진 신탁으로 인해, 황제의 자릴 꿈꾸던 아버지는 진에게 드래건의 심장을 삼키게 했다.

선대 공작이었던 아버지의 행위는 신탁 이전에 명백한 반역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황제가 된 에드윈은 진을 죽이고 싶어 했다. 오늘은 비록 그 대상이 켈피였지만, 결국 마지막 대상은 진 로이슈덴이 될 터였다.

어쩌면 예견된 싸움일지도 모른다. 200년 전 신탁이 내려지고, 그가 드래건의 심장을 삼킨 그 순간부터.

그가 선택한 게 아니었지만, 운명이란 제 의지와 선택만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피곤했다. 잠들고 싶었다. 다 그만두고, 심장을 관통하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눈이 저절로 감겼다. 전쟁터에서도 살이 찢기고 심장이 너덜너덜해지는 중에서도 의식만은 또렷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편히 잠들 수 있을 만큼 의식이 멀어져 갔다.

햇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짙은 어둠이 그를 잠식했다. 그리고 진 역시 순순히 의식의 끈을 놓았다.

욱신!

그때였다. 등줄기가 선뜩한 고통과 함께 누군가 그의 심장을 꽉 움켜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침몰하던 의식이 빠르게 제자릴 찾는다.

간절한 목소리로 누군가 저를 부른다.

바짝 말라붙어 침을 삼키기도 힘든 버석한 입술에 습기가 스몄다. 이슬을 품은 꽃잎이 위로하듯 제 입술을 부드럽게 쓴다.

마치 제 암컷이 상처를 핥듯 가냘프고 숨길 수 없는 다정함에 왈칵 심장에 뜨거운 것이 솟아났다.

‘아, 내가 원하던 게 이것이었나?’

뜻밖의 감정은 바로, 위로였다. 그를 온전히 걱정하고, 생을 놓지 않길 원하는 간절한 바람.

알지 못했었다. 지금껏 제가 누군가의 온전한 걱정과 위로를 원했다는 걸.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깃털 같은 온기가 제 입술에 닿는 순간 그제야 진은 원하던 감정이 뭔지를 알았다.

‘시모네타, 너인가?’

본능적으로 입술을 열었다. 위험한 순간 그의 의식 속으로 파고든 감각에 이끌려, 진은 물기를 가득 품은 여린 입술에 매달렸다. 메마른 땅에 단비가 내렸다.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던 갈증이 마구잡이로 그를 흔들었다.

‘안 돼. 가지 마.’

안타까움과 밀려드는 조급증에 손을 뻗어 시모네타를 잡고 싶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대신 멀어져 간 입술을 아쉬워하는 동안, 그의 심장에 따뜻한 온기가 닿았다.

신기했다. 욱신거리던 고통이, 몸속에서 요동치던 드래건의 힘이 어두운 의식 밑바닥으로 다시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정말 그녀였다. 몸속에서 날뛰는 드래건의 힘을 통제해, 그를 온전히 진 로이슈덴으로 있게 하는 존재는 시모네타뿐이었다.

진은 처음 만났을 때 달빛을 품고 요요히 빛나던 시모네타를 떠올렸다. 그러자 건조하던 심장이 물기로 촉촉이 젖어 들었다.

당돌하고 겁 없이 그를 쏘아보며 계약을 원하던, 그래서 그의 심장을 움켜 쥔 유일한 사람인 시모네타가 보고 싶었다.

“공작님?”

펨부르크 호수의 잔물결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를 부른다. 그 목소리에 진은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처럼, 목소리도 낼 수 없었다.

가만히 심장 위에 놓여 있던 손이 무게를 품기 시작했다.

‘윽.’

피가 멈추는지 지독한 아픔 뒤에, 믿기지 않게도 고통이 사라졌다. 은둔자의 숲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지독한 통증으로 뿌옇던 머릿속이 맑아진다.

‘어쩌지? 말려야 하는데. 피가 손에 묻을 텐데.’

이상했다. 제가 피를 흘리는 건 상관없었지만, 가늘고 새하얗던 시모네타의 손에 피가 묻는 건 싫었다. 특히 제 피가 묻는 건 더더욱.

그녀의 손을 밀어내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다시 입술에 뜨겁고 말캉한 게 닿았다. 망설이며 조심스럽게 파고들던 조금 전과는 달리, 거침없이 입술을 열고 안으로 뭔가를 밀어 넣었다.

절박하기까지 한 그 움직임에 진은 입을 열어 밀고 들어오는 것을 꽉 붙들었다. 습윤한 숨결에서 시모네타의 향이 났다. 새벽이슬처럼 맑고 심장이 녹을 것처럼 달아 계속 삼키고 싶었다.

어느새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려 했다.

집요하게 안으로 침입해 들어온 젖은 살덩이를 힘껏 안으로 빨아 당기며, 도망치지 못하게 결박했다. 그리곤 모든 걸 삼키려는 듯 침입자에게 매달렸다.

어느새 습기를 품고 입 안쪽을 끈질기게 핥는 감각에 느른한 열기가 치밀었다.

‘더, 더 원해. 더 갖고 싶다. 완전히 내 것이 될 수 있게, 으스러뜨리고 싶어.’

갑작스럽게 치민 소유욕과 지독한 파괴욕에 심장이 들끓었다. 해갈되지 못한 갈증에 괴로워, 안으로 밀려드는 숨결을 생명줄인 양 느른하게 삼켰다.

꿀꺽, 뭔가가 목구멍을 타고 안으로 넘어갔다. 그러자 그의 혀에 짓이겨진 여린 살덩이가 그를 달래듯 천천히 얽혀 왔다.

다시 한 번 목울대가 크게 움직일 만큼 욕심껏 그녀의 숨을 삼켰다.

“윽!”

나른한 신음이 들려왔다. 아릿한 아픔과 기쁨이 공존한 듯한 소리에 진은 거부할 수 없는 짙은 만족감을 느꼈다.

기뻐하고 있었다. 키스를 해 오는 시모네타가 그의 반응에 기쁨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리고 그 순간, 진은 다시 의식의 끈을 놓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눈을 떴을 때, 여전히 어둠이었다. 아니, 다르다. 얼굴과 몸을 덮은 천에선 익히 알고 있는 달콤한 향이 났다. 그리고 그 천 역시 눈에 익었다.

얼기설기 얽힌 섬세한 천 사이로, 투명한 햇살이 들어왔다. 그리고 알렉의 목소리와 여인의 것이 분명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하지만 몽롱한 의식 때문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바람이 불어왔다. 청량하고 상쾌한 펨부르크 호수에서 불러오는 바람이.

그리고 그를 덮고 있던 천이 흔들렸다.

검은 베일. 이건…….

‘록스버그 공작의 것인데. 왜 여기에…….’

하지만 의구심은 길지 못했다. 곧 그의 생각은 깊고 깊은 의식의 밑바닥으로 침잠해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또다시, 어둠이었다.

* * *

“지금 돌아가시는 겁니까?”

로엔이 진의 방을 나오자, 문 앞에서 대기 중이던 알렉이 다가왔다. 제 주인의 상태가 궁금할 텐데도, 무슨 생각인지 그녀가 이곳에 더 머물 것인지에 더 촉각을 곤두선 모습이다.

아, 맞다.

로이슈덴 공작가엔 의원도 치료사도 없었다. 그녀가 돌아가면, 진은 혼자서 고통을 견뎌야 했다. 그것이 이유인 모양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끝난 데다, 더 늦기 전에 돌아가야 할 것 같아서요.”

로엔이 검은 베일 사이로 알렉을 응시했다.

알렉 역시 록스버그 공작이 제 흉터를 감추기 위해 몸에서 한시도 떼지 않던 검은 베일을 바라보았다. 로열 에스콧에서 귀족들의 시선으로부터 제 주인의 비밀을 감췄던 물건이었다.

그래서인지 새삼스레 눈앞에 서 있는 이에 대한 고마움이 재차 일었다.

“가시기 전에 차를 대접하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알렉의 제안에 로엔은 말끄러미 그를 응시했다.

생각해 보니 로이슈덴 공작저에 도착한 이후 숨 돌릴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공작가의 의원에게 보이는 게 전통이란 말은 거짓이었고, 알렉을 통해 진이 드래건의 심장을 삼킨 후론 모두 내보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한마디로 진의 모든 치료는 로엔의 몫이었다. 그리고 그의 비밀을 아는 것 역시도.

“알렉, 비밀을 누설할까 걱정돼서 이러는 것이라면 그러지 않아도 돼요. 처음부터 그럴 생각 없다고 말했잖아요.”

“공작님,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알렉의 시선에 당혹감이 서렸다. 제 호의를 오해한 모양이었다.

사실 록스버그 공작에 대한 의심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제 주인의 상처를 돌보고, 치료를 하는 로엔을 보면서 한 순간이나마 그녀를 의심했다는 사실이 미안할 정도였다. 그만큼 치료에 지극정성이었다.

그리고 공작이 제 주인에게 했던 공개 구혼이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다 애잔해질 지경이었다.

“피로한 듯 보여 권한 것뿐입니다.”

알렉은 걱정을 담아 다시 한 번 말했다.

제 마음이 전해진 걸까?

검은 베일 안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온 것 같더니, 이내 고개가 끄덕여지는 게 보였다.

“그럼 부탁할게요.”

선선한 대답에 알렉의 표정 역시 한결 누그러졌다. 그리곤 앞장서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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