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살리고 싶었다라. 그대가 마치 로이슈덴 공작 부인이라도 된 것 같은 발언이군. 진도 동의한 일인가?”
에드윈의 입가가 냉소로 비틀리며 비난이 쏟아졌다.
“폐하, 그게…… 그러니까 돕고 싶어서…….”
“그러니까, 그대가 왜? 무슨 권리로.”
자격과 이유를 묻는 발언에 로엔은 난처한 듯 입술만 달싹였다. 그녀의 반응에 에드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강도 높은 비난을 이어 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군. 그대가 왜 진을 돕고 싶어 하는지 말이야. 막말로 여기엔 황실 의원도 있는데. 설마, 내 밑에서 일하는 황실 의원을 믿지 못한 건 아닐 테지?”
에드윈의 차가운 목소리에 로엔은 표정을 굳혔다. 그리곤 고갤 들어 에드윈과 눈을 마주쳤다. 날아드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이건 명백한 미끼야. 신중해야 해.’
황실 의원을 믿지 못하느냐는 말은 진을 공격한 암살자가 황제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건 아니냐는 물음이 담겨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 말에 수긍한다면, 제 스스로 황제를 의심하고 있다고 말하는 꼴과 다름없었다.
로엔이 재빨리 에드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닙니다, 폐하. 제가 감히 그런 의심을. 사실 여기엔 말씀드릴 수 없는 사정이 있습니다.”
“사정?”
에드윈의 입꼬리가 냉소로 비틀렸다.
“설마 그 사정이란 게 그대가 로이슈덴 공작의 연인이라도 된다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여기저기서 귀족들의 비웃음이 들려왔다. 에드윈의 말속엔 주제도 모르고 로이슈덴 공작을 탐내냐는 비난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폐하, 연인이십니다.”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주위에 정적이 흘렀다. 로엔을 비웃던 에드윈이 표정을 굳히더니, 이내 로엔 옆에 무릎을 꿇고 있는 알렉을 내려다보았다.
귀족들 역시 제가 조금 전 들은 말에 경악한 듯 입도 뻥긋 못 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연인이라니. 록스버그 공작이 네 주인의 연인이라도 된다는 것이냐?”
“제가 알기론 그렇습니다, 폐하.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분명 두 분께서 연인이십니다. 그리고 결혼을 약조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숨을 쉬는 걸 잊은 듯 침묵하던 귀족들이 밭은 숨을 뱉듯 경악의 말들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맙소사, 두 사람이 결혼을 약조했다니. 연인이라니. 믿을 수가 없군요.”
귀족들의 목소리가 소음처럼 윙윙거렸다. 로엔은 얼굴 가리개 안에서 웃음을 삼켰다.
알렉의 말은 그녀를 비웃는 자들을 향해 날린 통렬한 한 방이었다.
알렉에게 부탁했을 때만 해도, 이런 통쾌함을 느낄 줄은 몰랐다. 그런데 당혹감으로 물든 에드윈과 귀족들의 얼굴을 보자 간만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록스버그 공작,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이자가 하는 말이 사실인가?”
따져 묻는 에드윈의 표정이 살벌했다. 잇새로 새어 나오는 목소리가 화를 간신히 참고 있는 눈치였다. 그의 눈동자엔 의구심과 함께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짙게 혼재되어 있었다.
로엔이 재빨리 고갤 숙이곤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폐하. 지금은 아무런 말씀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왜 말할 수 없다는 거지? ‘네, 아니요.’라고 한 마디면 끝날 일을.”
불같이 화를 내는 에드윈과는 달리 로엔의 태도는 차분하기만 했다.
“로이슈덴 공작님이 의식을 잃은 상황에서 저 혼자 인정하는 건…….”
로엔이 몹시도 난처하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그리곤 고심하듯 몇 번이나 고갤 가로젓더니, 결국 곤란한 표정으로 고갤 숙였다.
“죄송합니다, 폐하.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아닌 것 같아서요. 그래서 기다려 주셨으면 합니다, 폐하. 공작님이 깨어나시면 조만간 폐하를 찾아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에드윈의 턱이 불쾌한 듯 꽉 다물리더니,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로엔이 로열 에스콧에 오자마자 로이슈덴 공작가의 마구간으로 향했다는 말은 시종장에게 전해 들었다. 그냥 우연히 마주친 줄 알았다. 로엔 역시 그렇게 말했었고.
그런데 아닌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연인이 될 만큼 가까워졌다면, 처음부터 계획된 만남이었다는 뜻이었다.
‘감히 날 속이다니.’
손 안에 쥐고 있다고 생각했던 장기 말이 이미 그의 손을 벗어난 후라는 사실을 깨닫자 화가 치밀었다.
거기다 영악한 건지, 아니면 신중한 것인지 조금 전 내뱉는 허무맹랑한 말들의 진위 여부를 정신을 잃은 로이슈덴 공작에게 미루기까지 했다. 지금 당장 두 가문의 약혼 사실을 확인할 수조차 없게.
“폐하!”
끝날 것 같지 않던 무거운 침묵을 알렉이 깨뜨렸다.
“말하라, 로이슈덴 공작가의 집사.”
에드윈이 불쾌한 듯 알렉을 쏘아보며 명했다.
“제가 주인님을 모시고 로이슈덴 공작가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록스버그 공작님이 제 주인님께 공작새의 눈물을 먹이셨지만, 아직 몸에 박힌 화살을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생명이 위급하니, 서둘러 돌아가야 합니다.”
에드윈의 시선이 진이 누워 있는 곳으로 향했다. 로엔이 덮어 둔 검은 베일 아래로,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상처 치료라면 황실 의원에게 보이는 게 좋겠다.”
에드윈이 당장에라도 의원을 부르기라도 하려는 듯 고갤 돌렸다.
“죄송합니다, 폐하. 대대로 로이슈덴 공작가의 후계자의 치료는 공작가에 소속된 의원에게만 보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전통이라, 일개 집사인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알렉이 이마를 땅에 붙이곤 읍소했다.
에드윈이 마땅찮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 마음 같아선 황실 의원에게 보인다는 핑계로 진을 잡아 두고 싶었지만, 알렉이 내뱉은 말로 인해 그럴 수 없게 된 것이다.
목숨이 위급한 상황에서 알렉의 청을 수락하지 않는다면, 귀족들 사이에 황제가 로이슈덴 공작을 위험에 빠뜨리려 한다는 소문이 돌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귀족들의 입을 통해 암살이란 말이 나온 마당에, 그를 붙잡아 굳이 의심을 살 필요는 없었다.
제길, 기분 나쁘게도 일이 지독히도 꼬이고 있었다.
“가도 좋다. 내 사촌인 진이 무사했으면 좋겠군.”
일부러 로이슈덴 공작이 아니라 사촌이란 말을 강조하며, 그가 진을 걱정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감사합니다, 폐하.”
알렉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옆에 서 있는 하인들에게 고갤 끄덕이자, 두 사람이 조심스럽게 들것을 들어 올렸다.
“폐하, 저도 함께 돌아가겠습니다.”
로엔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에드윈에게 허락을 구했다.
“그대가 왜……?”
이유를 물으려다 에드윈은 입을 다물었다. 로엔이 진을 따라가려는 이유가 뻔해서다. 비공식적이지만 결혼을 약속한 사이니, 그 뒤를 따르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제길! 엿 같게도 마음대로 되는 게 없었다.
마음 같아선, 로엔을 붙잡고 무슨 속셈인 것인지 다그쳐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처음부터 록스버그 공작의 연극에 속은 건가?’
에드윈이 고갤 들어 로엔과 눈을 마주했다. 처음으로 황실의 티룸에서 로엔을 마주했을 때를 떠올리자, 에드윈의 입가에 음산한 미소가 떠올랐다.
‘생각보다 영악해. 뒤통수를 거하게 맞은 꼴이로군.’
에드윈은 어쩔 수 없이 로엔마저도 보내 줘야 했다.
“가 봐도 좋다, 록스버그 공작. 그대의 연인이 무사하길 빌겠다.”
에드윈은 씹어 뱉듯 두 사람의 사이를 인정했다. 주위에 있던 귀족들의 표정이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무너져 내리는 게 보였다.
“레이디 캐서린? 괜찮나요?”
충격으로 쓰러지려는 캐서린을 옆에 서 있던 제인이 붙들었고, 그 모습을 캔싱턴 백작이 마땅찮은 듯 쏘아보았다. 로엔의 시선 역시 캐서린에게 닿았다 다시 에드윈에게 향했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그리고 제가 베팅한 돈을 온전히 폐하께 기부할 수 있어 기쁘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로엔은 우아한 태도로 에드윈에게 예를 갖췄다. 그리곤 허릴 펴고 알렉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앞서가던 알렉이 눈치 빠르게 로엔의 곁에 서더니 공작 부인에게 하듯 깍듯이 예를 갖춘다.
에드윈은 멀어져 가는 로엔과 진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손에 다 쥐었다고 여겼는데, 모든 것이 한순간에 모래알처럼 손안을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뭔가 중요한 걸 놓친 것 같은 기분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멈춰 있던 바람이, 또 불어왔다.
이번엔 숲의 향을 품은 청량하고 산뜻한 바람이 아니라, 불길하고 지독한 열등감으로 점철된 바람이었다. 그리고 그 바람은 에드윈의 심장에 강한 의심을 심어 놓기에 충분했다.
지독한 소유욕과 비틀린 욕심 또한 에드윈의 마음에 움을 틔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