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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63화 (64/201)

63화

‘다신 보고 싶지 않아. 내 앞에서 사람이 죽어 가는 건.’

여기가 로열 에스콧이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사고 현장과 가까워서, 그래서 진 로이슈덴을 구하려는 무모한 행동을 하려는 것뿐이었다.

로엔은 숨을 고른 후, 다시 켈피를 보았다. 그러다 진의 심장 부근을 관통한 화살이 등 쪽으로 삐져나와 있는 게 보였다.

‘설마, 저건.’

붉은 피가 잔뜩 엉겨 붙어 있었지만, 화살촉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로엔은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에드윈은 뭘 확인하려 했던 걸까?’

물의 정령이라고 알려진 켈피를 단숨에 죽일 수 있는 건, 만년설로 제련한 화살촉이었다.

화살을 바라보는 로엔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분명 금기된 주술이야.’

드래건의 심장과 혈독화처럼 신성한 피를 가진 존재를 죽이기 위해 만년설을 제련해 만든 무기 역시 지금은 사장된 금기 주술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에드윈이 알고 있는 걸까?’

사장된 금기 주술은 록스버그 공작 외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비밀이었다.

‘그런데 존더부르크 황실 역시도 알고 있었다니.’

로엔은 검은 베일 안에서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금기된 주술을 에드윈이 알고 있다는 건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200년 전 라딘이 록스버그 공작가를 찾아와 숨겨진 또 다른 예언을 전한 사실을 존더부르크 황실이 알고 있느냐가 가장 중요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이내 로엔이 고갤 가로저었다. 만약 존더부르크 황실에서 숨겨진 예언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록스버그 공작가에서 태어난 여아들을 그냥 둘 리 없었다.

‘그래. 적어도 라딘의 예언을 모두 아는 건 아니야. 아마 그 일부만 전해 들었을 게 분명해.’

로엔은 식은땀이 베어나는 손을 꽉 움켜쥐며, 피로 얼룩진 진의 등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인간의 뜨거운 피에 녹아내리는 만년설을 보자, 무섭게 뛰던 심장이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이럴 시간이 없었다. 진을 공격한 암살자의 증거가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엔은 서둘러 암살의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진의 등에 손을 뻗었다.

파사삭, 파삭!

‘이런, 너무 성급했던 걸까?’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로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제길, 너무 경솔했다.

분명 금서에는 주술에 개입되지 않은 제3의 존재가 만년설로 제련된 화살촉에 손을 대는 순간, 주술이 깨어져 사라진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성급하게 손을 뻗다니.

눈앞에서 은빛 가루가 되어 공기 중으로 허무하게 사라지는 만년설을 보며, 로엔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멍해 있는 의식을 일깨우듯 알렉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위험합니다, 공작님!”

다행히 본능이 먼저 반응했다. 위험을 감지한 몸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서자, 순식간에 제가 서 있던 자리가 켈피의 말굽으로 짓이겨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로엔의 등줄기에 오소소 소름이 끼쳤다.

아차 하는 순간,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것이다.

‘만용이었나?’

켈피를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잘못된 판단이었던 모양이다. 제 주인을 태운 켈피는 여전히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날뛰고 있었다.

로엔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다시 한 번 켈피를 어르듯 낮게 속삭였다.

“켈피, 진정해. 널 헤치려는 게 아니야. 네 주인을 다치게 하려는 것도 아니고.”

여전히 불안으로 흔들리는 켈피의 검은 눈동자를 보며, 로엔은 흔들림 없는 시선을 보냈다.

“네 주인을 구할 거야. 그러니 안심해.”

여기서 포기할 순 없었다. 제 판단이 만용이라 할지라도, 진을 구하기 위해선 뭐든 해야 했다. 그러다 문득 뭔가 떠올라 알렉을 돌아보았다.

“손에 묶어 놓은 손수건, 공작님 건가요?”

“그렇습니다.”

“지금 저에게 주시겠어요? 잠깐 빌릴게요.”

알렉이 재빨리 손목에 묶인 손수건을 풀었다. 그 역시 로엔의 의도를 눈치챈 듯했다.

“손수건으로 켈피의 눈을 가릴 거예요. 공작님의 체향이 묻어 있으니, 안정시키는 데 효과가 있을 테고요.”

“예민해진 상태니 조심하십시오, 공작님.”

로엔이 뒤를 돌아보자, 처음으로 알렉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걱정 말아요. 우린 무사히 빠져나갈 테니까. 대신 내가 켈피를 진정시킬 때까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 줘요.”

로엔의 시선이 경마장의 입구로 행했다.

어느새 특별관람석에서 경마장으로 내려온 에드윈이 시종장과 얘길 나누고 있었다. 그 뒤로, 황실 근위대의 정복을 입은 기사들이 보였다.

서둘러야 했다. 에드윈과 귀족들이 도착하기 전에 켈피를 진정시키고 진을 구해야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흥분한 켈피가 예민함을 드러내며 거칠게 콧김을 뿜어냈다.

“켈피, 도와줘. 네 주인이 위험해질 수도 있어.”

달래듯 속삭이는 목소리에 투레질을 하던 켈피가 한 순간이지만 움직임을 멈췄다. 로엔은 쓰고 있던 검은 베일을 걷고는 먹물처럼 새까만 켈피의 순한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리고 그 순간 로엔의 에메랄드빛 눈동자 안에 황금빛으로 빛나는 반지 모양이 떠올랐다. 눈동자에 박힌 황금빛 반지는 금환일식 아래 태어난 아이라는 상징이었다.

에메랄드빛 눈동자 속에 침잠된 황금빛 반지는 매혹적인 빛을 뿜어냈다. 숨을 삼킬 만큼 신비롭고 숭고한 광경이었지만, 불행히도 그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로엔의 눈동자 속에 감춰진 금환은 혈독화처럼 절대 들켜선 안 되는 비밀이다.

그런데 지금, 로엔은 진을 구하기 위해 숨기고 있던 제 힘을 드러내고 있었다. 들킬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고서.

로엔은 숨을 고름 후 지금은 사라진 아드리안의 고대어로 언령을 부렸다.

《신성한 피를 가진 자, 금환의 힘을 지닌 내게 복종하라.》

그러자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던 공기가 켈피를 감쌌다.

로엔은 켈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손수건으로 켈피의 눈을 가렸다. 그러자 거친 숨을 토해 내며 발버둥 치던 켈피의 행동이 눈에 띄게 잠잠해졌다.

“잘했어. 이제 괜찮으니 진정해.”

로엔은 조심스럽게 켈피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제 주인의 익숙한 체향 때문인지 경련하듯 떨던 켈피가 움직임을 멈추곤 순종하듯 고갤 숙였다.

“알렉! 서둘러요.”

이를 지켜보던 알렉이 서둘러 말의 등자위에서 진을 끌어 내렸다.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알렉이 필사적으로 진을 끌어안은 채 그의 상태를 살피려 했다. 하지만 의식을 잃은 진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공작님을 들것에 옮겨요. 서둘러요.”

로엔의 목소리에 알렉이 정신이 든 듯 서둘러 진을 들것에 눕혔다. 그리곤 로엔에게 켈피의 고삐를 받아 든다.

“주인님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공작님. 도와줄 분이 공작님밖에 없습니다.”

진을 살릴 유일한 생명줄이라도 된 듯 로엔을 보는 알렉의 표정이 절박했다. 로엔은 알렉을 향해 고갤 끄덕인 후, 진 앞에 무릎을 꿇고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다행히 화살은 심장을 비껴갔다. 하지만 만년설로 된 화살의 날카로운 끝이 이제 막 돋아나는 드래건의 비늘을 찢어 놓았다. 진이 느낄 고통이 만만치 않을 터였다.

“그건 공작새의 눈물이군요.”

로엔이 병 속에서 물건을 꺼내자 그것을 알아본 알렉이 확인하듯 물었다. 알렉 역시 지금 진에게 필요한 게 뭔지 알고 있는 눈치였다.

“이걸 먹여야 해요. 하지만 삼킬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의식이 없는 상태라 공작새의 눈물을 삼키는 게 가능할 것 같지 않아서다. 그렇다고 공작새의 눈물을 삼킬 수 있게 도와줄 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당장 먹어야 하는데…….”

초조함이 조급함을 만들었다. 로엔은 화살이 박힌 진의 상처 부위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새빨간 피가 멈추지 않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드래건의 심장을 삼키고도 살아남은 자이니 죽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이 상태로 계속 방치된다면, 진의 의식 밑바닥에서 잠들어 있는 드래건의 힘이 각성할지도 몰랐다.

‘어떻게 하지? 공작새의 눈물을 삼키게 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로엔이 초조한 듯 고갤 들었다.

‘정말 미치겠네.’

그때까지 시종장과 얘길 나누고 있던 에드윈이 진이 켈피에게서 구해진 걸 보곤 경마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최악의 경우 에드윈 앞에서 드래건의 힘이 깨어날 수도…….

안 돼.

그런 일이 벌어지게 놓아 둘 수는 없었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삼키게 해야 하는데…….”

입술을 깨물며 초조하게 방법을 생각하던 중,

‘아, 맞다.’

방법이 있었다. 공작새의 눈물을 삼키지 않아도 그의 몸속에서 깨어나려 하는 드래건의 힘을 억누를 방법이.

로엔은 입술을 깨물었다.

‘미치겠네. 하필 이 순간, 그와 했던 계약이 떠오르다니.’

지금 진에게 필요한 건 그녀의 체액을 그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체액을 나눠 주는 행위는 당연히 입술을…….

망설이는 사이, 발자국 소리와 함께 귀족들의 웅성거림이 멀리서 들려왔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알렉, 고갤 돌려줄래요?”

“네?”

“부탁할게요. 날 믿고 제발 내 말을 따라 줘요.”

“아, 네, 공작님.”

알렉이 서둘러 주위에 있던 사람들을 멀찍이 물렸다. 그리곤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두 사람을 지키려는 듯 몸으로 장벽을 쌓다. 로엔은 에드윈의 시선에서 벗어나자 재빨리 고갤 숙였다.

‘계약을 이행하려는 것뿐이야. 위험한 순간에 서로를 돕기로 했고, 지금이 그 순간인 거야.’

정작 계약의 당사자인 진은 의식이 없었지만, 로엔은 본능적으로 지금이 위기에 직면한 순간임을 알았다.

“공작님, 계약의 첫 번째 약속이에요.”

로엔이 꼭 다물린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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