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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62화 (63/201)

62화

무슨 생각으로 관람석을 나와, 경기장의 입구로 향했는지 알지 못했다.

에드윈의 의심 어린 눈빛도, 그와 한 맹세도 진이 화살에 맞는 모습을 본 순간 먼지처럼 사라졌다. 그저 본능이 그에게 가야 한다고 말했다.

제길!

하지만 재개 움직여야 하는 발이 제 발 같지 않았다. 온몸에 식은땀이 비 오듯이 흘러내렸다.

한순간 눈앞이 새까맣게 전멸하더니, 낯선 장면이 떠올랐다. 거친 숨을 내쉬며 피를 흘리는 부모님의 모습과, 제 피가 멈추지 않아 공포로 떨며 울부짖는 어린 자신의 모습이.

“헉!”

막혔던 숨을 내쉬며 눈을 뜨자, 환영처럼 보였던 과거의 편린이 사라졌다. 여긴 10년 전 사고가 있었던 마차 안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로엔은 화살에 심장을 관통당한 진에게 가고 있었다.

그제야 무섭게 뛰던 심장이 잠잠해졌고, 흐릿하던 시야가 확 밝아졌다.

“알렉, 알렉. 정신 차려요.”

경기장의 입구에 도착한 로엔은 정신 줄을 놓은 듯 멍하니 서 있는 알렉을 흔들었다. 그러자 초점 잃은 검은 눈동자가 로엔에게 향하는 가 싶더니, 훅! 하고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사고를 목격한 충격으로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모양이었다.

“록스버그 공작님.”

“그래요. 내가 누군지 알았으니 됐어요.”

“우리 주인님이, 주인님이…….”

“알아요. 나도 봤으니까. 사고의 충격으로 정신이 없겠지만, 지금부터가 중요해요. 그러니 똑바로 정신 차리고 내 말 들어요. 알겠어요?”

“피가, 켈피가…….”

“진정해요. 제발. 로이슈덴 공작님을 무사히 공작저로 모실 분은 알렉뿐이에요. 내 말 알아들었어요? 알아들었으면 고갤 끄덕여요.”

로엔이 다시 한 번 날카로운 목소리로 알렉의 정신을 깨웠다. 그제야 알렉이 충격에서 조금 벗어난 듯 고갤 끄덕였다.

“좋아요. 알렉, 당신도 알고 있죠? 공작님의 상태를 다른 사람에게 들켜선 안 된다는 걸요.”

신중하게 말을 고르고 싶었다. 로이슈덴 공작이 드래건의 심장을 삼켰다는 비밀을 알고 있고, 그걸 다른 사람에게 알릴 생각 같은 건 없다고 침착하게 말해야 했다.

하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진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당장에라도 뛰어가고 싶었지만, 그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걸 어떻게…….”

알렉의 얼굴이 창백했다. 두려움과 의심으로 점철된 눈동자가 로엔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건 나중에 말할게요.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걸 숨기는 것이에요. 공작님은 심장에 화살을 맞았지만, 죽진 않을 거예요. 그 이유를 알렉도 잘 알고 있을 테고,”

알렉이 마른침을 삼키며 초조한 듯 고갤 끄덕였다. 로엔의 말에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지만, 제 주인은 심장에 화살이 관통했어도 죽지 않는다는 말만이 그를 제정신인 채로 서 있게 했다.

“스미스, 이리 와서 인사해.”

“록스버그 공작가의 집사, 스미스입니다.”

로엔의 부름에 옆에서 그림자처럼 서 있던 스미스가 인사를 건넸다.

“알렉입니다. 로이슈덴 공작가의 집사입니다.”

“알렉, 스미스가 마차를 대기시킬 거예요.”

“아, 네.”

“그리고 우린 귀족들과 폐하가 경기장으로 내려오기 전에 공작님을 들것에 실어 마차로 갈 것이고요.”

“네.”

“하지만 난 로이슈덴 공작님과 아무 사이도 아니라, 아무런 권리가 없어요. 그러니 알렉이 좀 도와줘야 해요.”

“뭘 도와 드리면 되겠습니까?”

“우선 공작님께 가요. 가면서 말할게요. 따라와요.”

로엔이 서둘러 경마장 안으로 들어가자, 발이 묶인 듯 서 있던 알렉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이제 말씀해 주십시오, 공작님. 제가 뭘 해야 하는지.”

“별것 아니에요. 그저 내 명령을 따르면 돼요.”

“명령이라면 어떤……?”

로엔은 뒤따라 붙는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곤, 알렉만 들을 수 있도록 낮게 속삭였다.

“로이슈덴 공작님이 저와 비공식적으로 약혼을 하기로 했고, 약혼녀인 제가 공작님을 돕는 건 의무라고 말하면 돼요. 폐하와 귀족들 앞에서요.”

“…….”

빠르게 걸음을 옮기던 알렉이 난처한 얼굴을 했다. 로엔은 그가 뭘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때문에 재빨리 말을 이었다.

“진짜 약혼이 아니라,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거짓말이이에요. 공작님이 무사히 빠져나가면 없던 일로 하면 되고요. 어차피 내 평판이야, 공작님께 공개 구혼을 한 순간부터 바닥이었으니 그건 염려할 것 없어요.”

“아, 어…….”

로엔이 아무렇지 않게 공개 구혼에 대해 말하자, 알렉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저는 일개 고용인일 뿐입니다. 고귀하신 분의 일에 제가 상관할 권리도 없고요.”

서둘러 표정을 갈무리하는 알렉을 보며 로엔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그제야 안심이 되는 듯 알렉이 고갤 끄덕였다.

“알렉. 날 믿어야 할지 의심이 되겠지만, 공작님이 죽지 않기를 바라는 건 진심이에요. 켈피에게 그랬던 것처럼요.”

알렉의 검은색 눈동자가 로엔이 쓰고 있는 검은 베일을 뚫고 날아들었다. 그녀가 뱉어 내는 말 속에 담긴 진실을 가름하려는 듯이.

“덕분에 켈피가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인사는 나중에 해요. 지금도 너무 지체했어요.”

로엔은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는데, 고작 5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아참, 들것은?”

로엔이 뒤를 돌아보자, 눈에 익은 하인들이 들것과 모포를 들고 경마장 안으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 스미스가 상황을 파악하고 보낸 모양이었다.

“다행히 저기 오네요. 제 사람들이니 걱정할 것 없어요.”

로엔은 알렉을 다시 한 번 안심시키곤, 켈피의 몸에 엎드린 채 정신을 잃은 진에게 다가갔다.

그 주위엔 사고가 일어난 후 화살에 맞은 진을 구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다가가려 할 때마다 켈피가 사납게 날뛰는 바람에 근처에도 가지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알렉, 걱정할 것 없어요. 알고 있겠지만 공작님은 죽지 않아요.”

로엔의 말에 알렉이 고갤 끄덕였다.

“하지만 다행이에요. 켈피가 공작님을 지키기 위해 난동을 부린 덕에 아무도 공작님의 심장에 돋아난 것을 보지 못했을 테니까요.”

날카로운 화살촉에 옷이 찢겨 살이 드러났을 테지만, 말 위로 엎드린 덕분에 드래건의 비늘을 감출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무사히 진을 구해 내는 것은 물론, 그의 몸을 아무도 보지 못하게 숨겨야 했다.

“침착해요. 우린 지금부터 연극을 해야 하니까.”

긴장으로 알렉의 얼굴이 굳어졌다. 시합이 시작되기 직전, 시종장이 결승전에 있는 누군가를 향해 고갤 끄덕이는 걸 보았다. 그리고 분명하진 않았지만, 누군가 있었다.

‘말렸어야 했는데. 목숨을 걸고서라도 주인님을…….’

제 바보 같은 행동 때문에 진이 위험에 빠졌다. 암살자에게 고스란히 노출된 것이다. 그리고 제 주인의 피 냄새에 잔뜩 흥분한 켈피는 접근하는 자들을 짓밟을 듯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켈피를 진정시켜야 합니다.”

최대한 빨리 진정시키지 않으면 말 등 위에서 정신을 잃은 진이 바닥에 떨어져 켈피의 발에 밟힐 수도 있었다. 그리고 만에 하나 누군가 진의 몸을 본다면.

‘제발, 무사히 경마장을 빠져나가야 할 텐데…….’

20년 동안 숨겨 온 로이슈덴 공작가의 비밀이 들어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알렉은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드래건의 심장을 삼킨 자는 아드리안 제국의 국법상, 반역자였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그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중죄였다. 당장 교수시켜도 될 만큼.

“알렉, 켈피를 진정시킬 수 있겠어요?”

로엔의 물음에 알렉은 회의적인 얼굴로 고갤 가로저었다. 얌전할 때도 진의 체향이 묻어 있는 손수건으로 켈피를 진정시킨 다음에야 돌보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예민해진 상황에선 거의 불가능했다.

“그럼 제가 할게요.”

“위험합니다. 켈피는 주인님 외엔 절대로…….”

“그래도 해 봐야죠.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그리고 마구간에서 봤잖아요. 내가 만졌을 때 얌전하게 복종했던 걸요.”

“그렇긴 하지만…… 만에 하나 최악의 상황이 오면…….”

“그래도 최선을 다해 볼게요. 죽지 않게. 그러니 내가 켈피를 진정시키는 동안 공작님을 부탁해요.”

대답을 해야 했지만 알렉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구간에서 켈피가 록스버그 공작에게 얌전하게 구는 걸 봤을 땐 정말 놀랐다. 하지만 어쩌면 그건 켈피의 변덕일지도 몰랐다. 그러니 당연히 안 된다고, 위험하니 하지 말라고 말려야 했다.

“공작님, 제가 먼저…….”

제가 먼저 시도해 보겠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로엔이 켈피에게 다가갔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켈피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며, 주위에 있던 남자가 그녀를 말리려는 듯 팔을 뻗었다.

“떨어져.”

로엔의 냉정한 목소리에 남자가 흠칫 몸을 떨더니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저건 록스버그 공작 아닌가요?”

“공작님이 왜 저기에 계시는지 모르겠네요. 저러다 미쳐 날뛰는 말에게 짓밟혀 죽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에요.”

관중석에서 이를 지켜보던 귀족들이 로엔의 등장에 놀라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엔은 귀족들의 소음을 무시한 채 침착한 태도로 켈피에게 다가섰다.

“켈피, 나야. 기억나?”

히이이잉, 히잉!

낯선 목소리에 켈피가 다시 흥분한 듯 앞발을 들어 올리며 위협적인 태도를 보였다. 로엔은 금방이라도 저를 덮칠 듯 날뛰는 켈피를 보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괜찮아. 진정시킬 수 있어.’

두렵지 않다면 거짓이었다. 무엇보다 켈피를 진정시킬 수 있을지, 확신도 하지 못했다.

미친 짓이 분명했다. 진 로이슈덴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이런 위험을 자초하는 그녀의 행동이.

하지만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고, 결국 로엔의 시선은 말 위에 정신을 잃고 있는 진에게 향했다.

‘다신 보고 싶지 않아. 내 앞에서 사람이 죽어 가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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