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진은 경마장 안으로 들어서며, 낯선 분위기에 흥분하려는 켈피를 진정시키느라 바빴다. 혈통 좋은 말답게 윤기가 흐르는 갈기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곤 괜찮다고 속삭이는 목소리는 연인을 달래듯 달콤했다.
“주인님,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경마장의 입구에 서서 불안한 듯 서성대는 알렉이 눈에 들어왔다.
“걱정할 것 없대도. 너는 가서 저택으로 돌아갈 마차를 대기시켜 놔. 바로 갈 수 있게.”
진의 단호한 태도에도 알렉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갑작스럽게 마구간을 방문했던 록스버그 공작이 돌아간 후, 여물통에서 말들의 흥분제라고 알려진 독초가 발견되었다.
만약 독초를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서 켈피가 그것을 먹기라도 했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터였다. 켈피의 위에 올라탄 기수가 문제가 아니라, 경마장에서 날뛰는 통에 시합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물론 안에 있던 말들까지 얽혀 들며 대형 사고가 일어났을 게 분명했다.
“또 다른 문제라도 생기면 어쩌시려고요. 그냥 기권하고 돌아가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지금이라도 기권을 하면 말 많은 사교계에서 뒷말은 좀 있겠지만, 위험하진 않았다.
“날 믿고 기다려. 아무 일 없을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진은 알렉에게서 등을 돌렸다. 말고삐를 쥐고 출발선이 있는 곳으로 향하며, 진은 특별관람석 쪽을 응시했다.
“설마 날 알아본 건가?”
에드윈이야 시종장을 통해 그가 켈피를 타고 경기에 출전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으니 당연히 알 터였다. 하지만 로엔 록스버그 공작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조금 전 검은 베일 사이로 시선이 마주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착각이 아닌가?”
진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는 록스버그 공작을 보며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묘하게 즐거웠다. 펨부르크 호수에서 바람에 날리던 모자를 쫓아 뛰어오던 모습을 보았을 때부터 이상스레 눈이 갔다.
당혹스러움을 감추며 얼굴의 상처를 검은 베일로 감출 때도 예의상 고갤 돌려야 했지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묘하게 익숙했다. 황금빛 머리카락하며, 당황해서 달려오던 모습이. 아니, 사실 어떤 점이 익숙한지 꼭 집어 말할 수 없었지만 그랬다.
아마 그를 대하는 록스버그 공작의 자연스러운 태도 때문인지도 몰랐다. 경계심 없이 말을 건네는 그녀의 행동이 마치 오랫동안 만나 온 지인인 것처럼 친숙했다.
“성격인 건가? 오지랖을 부리는 것과 과하게 친근한 태도는?”
진은 일부러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똑바로 응시했다. 황제인 에드윈이 눈치챌 만큼.
그의 바람대로, 멀리서도 에드윈의 낯빛이 어두워지는 게 보였다. 감추려 하고 있었지만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리곤 불만 어린 표정으로 록스버그 공작에게 뭔가를 말하는 게 보였다.
바람난 연인을 단속하듯 날 선 모습이었지만, 록스버그 공작은 아무런 내색도 없이 공손하게 예를 갖출 뿐이었다.
에드윈이 테이블 위에 1번 번호표를 올려놓는 게 보였다. 본격적인 베팅이 시작된 모양이다. 뒤이어 귀족들의 베팅이 이어지는 모습을 보며, 진은 록스버그 공작을 바라보았다.
정말 켈피에게 돈을 걸까?
그 답은 바로 알 수 있었다. 록스버그 공작이 켈피의 등에 붙어 있는 7번 번호표와 함께 테이블에 상자를 올려놓은 것이다.
“미쳤군. 저 많은 금액을 켈피에게 베팅하다니.”
멀리서도 상자에 든 것이 호리우스의 눈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저 정도면 광산과 함께 웬만한 영지 하나는 무난히 살 수 있는 액수였다.
‘유명 신문에 공개 구혼을 했다더니, 정말 돈으로 내 마음이라도 사려는 건가?’
어이없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상하다. 경계해야 할 여인을 두고 즐겁다는 듯 웃는 제가 낯설었다.
“나에게 원하는 게 있었군.”
그것이 공개 구혼의 형태를 띤 정략혼인지, 아니면 말 그대로 계약에 의한 갑을관계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의도는 분명했다.
‘재미있어. 정략혼이 진심이었다니.’
시모네타 외에 그의 흥미를 끄는 여인은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두 여인에 대한 감정이 같은 건 아니었다. 차지하는 형태와 깊이 역시 달랐다.
록스버그 공작에겐 불행한 과거에서 비롯된 동정심이라면, 시모네타는…….
정말, 뭘까?
진은 정의 내리지 못하는 감정에 심장이 일렁였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새로 돋아난 드래건의 비늘이 간질거렸다. 마치 감정에 반응하듯이.
“저건 또 뭐지?”
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 록스버그 공작 주변에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사교계의 중심인물이라도 된 눈치였다.
‘사람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군.’
진은 검은 베일을 뒤집어쓴 가녀린 여인을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응시했다.
에드윈은 로열 에스콧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들을 통제하려 들었지만, 정작 이 상황을 통제하고 마음껏 주무르고 있는 건 다름 아니라 록스버그 공작이었다. 따지고 보면 진 역시 록스버그 공작 때문에 켈피를 타고 경기에 출전하게 된 것이었으니까.
그 순간, 경기의 시작을 알리듯 두 번째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부우웅, 부우웅웅!
출발선에 선 진은 고삐를 당겨 잡고는 앞을 응시했다.
“주인님!”
정적 사이로 알렉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진의 시선이 입구로 향했다. 사색이 된 알렉의 뒤에 시종장이 서 있었다.
시종장이 왜 저기에 있지?
진이 눈살을 찌푸리는 사이, 알렉이 안 된다는 듯 고갤 가로젓는 게 보였다.
‘대체 뭘 말하려는 건지 모르겠군.’
진이 무슨 일이냐는 듯 입술을 달싹이는 사이 출발을 알리는 검은 깃발이 내려갔다.
“제길, 늦었군.”
출발선에 서 있던 말들이 결승점을 향해 빠르게 달려 나갔다. 켈피 역시 주인을 태우고 어떤 말보다 빠르게 달려 나갔다.
바람이 검은 회오리를 일으켰다. 경기를 관람하던 관중석에선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물의 정령이 말의 모습으로 변한 게 바로 전설의 켈피였다. 인간을 유혹해 물속에 빠뜨려 죽음에 이르게 하는 존재였지만, 강력한 힘을 지닌 인간의 왕에게 길들여지면 세상에서 다시없는 명마가 되었다.
“전설이 사실인 겁니까? 내 눈으로 보고도 도저히 믿기가 힘드네요.”
경외로 가득 찬 탄성에 귀족들 역시 동의하듯 켈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착각은 아니겠죠? 모래 땅이 분명한데, 제 눈엔 호수 위를 달리는 것처럼 보이다니.”
검은 말이 질주하며 일으킨 모래 먼지가 마치 파도의 포말처럼 일렁였다. 경기장의 레일엔 일곱 마리의 말이 달리고 있었지만, 관람석에 있는 모두의 눈을 사로잡은 건 단 한 마리의 말이었다.
“켈피에 탄 사람은 누굴까요? 켈피를 길들였다던 전설의 왕처럼…….”
생각 없이 말을 뱉던 귀족이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특별관람석 쪽을 곁눈질했다. 제 말이 황제에게 들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눈치였다.
“훌륭한 말이군. 기수 역시 뛰어나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 실존하지 않는 것에 환상을 품는 건 어리석은 자들이나 하는 짓이지.”
에드윈이 평소처럼 여상하게 말했다. 하지만 켈피와 켈피 위에 타고 있는 기수를 쏘아보는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로엔은 에드윈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감추려 하고 있었지만 심기가 잔뜩 뒤틀린 게 눈에 보여서다.
‘그나저나 사실일까? 켈피가 물의 정령의 후손이란 게.’
로엔은 전설의 켈피를 직접 눈을 봤다는 고양감보단, 불안감에 손을 꽉 쥐었다. 진을 쏘아보던 에드윈이 입구 쪽을 향해 고갤 끄덕이는 게 보였다.
‘입구 쪽에 누가 있는 거지?’
불길한 예감에 로엔은 베일 속에서 재빨리 에드윈의 시선을 좇아 움직였다.
시종장이었다.
시종장이 왜 저기에 있는 거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시종장이 결승선 쪽을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대체 뭘 하려는 거지?
에드윈에 이어 시종장의 행동에 로엔은 재빨리 결승선 쪽을 응시했다. 하지만 경마장 안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선두를 달리는 켈피가 결승선을 향해 폭풍처럼 달려가고 있었고, 관람석은 흥분된 감정에 일렁이고 있었다.
그래서 더 초조했다. 평온함 속에 숨은 지독한 덫이 아귀를 벌리고 바로 코앞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챙!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상자 안에 있던 호리우스의 눈이 날카로운 빛을 뿜어냈다.
호리우스의 눈 쪽으로 시선을 돌리려는 순간, 팽팽하게 긴장된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본능적으로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갤 돌렸고, 그 순간 로엔은 경악으로 그대로 몸을 굳혔다.
활을 든 궁수가 보였다. 그리고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 공기를 가르며 켈피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고 있었다.
“위험…….”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한 말이 목구멍 속으로 삼켜졌다.
“아악!”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화살에 맞았어요!”
“켈피가…… 피가.”
문장이 되지 못한 말들이 끊기듯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죽었나 봐요.”
“심장에 화살이 박…….”
“암살자! 암살자다!”
비명처럼 쏟아 낸 말과 함께, 관람석은 물론 경마장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에드윈을 제외한 귀족들은 암살자의 표적이 되지 않기 위해 테이블 아래로 몸을 숨겼다.
자리에서 일어선 로엔은 빠르게 관람석을 빠져나갔다.
충격과 공포 속에서 로열 에스콧을 비추는 오후의 태양이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