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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59화 (60/201)

59화

로엔은 베일 너머 보이는 진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미동도 없는 그의 표정에선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거절하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손을 거둬들이려는 순간, 진이 허릴 숙여 왔다. 그리곤 그녀의 손가락 끝을 마주 잡더니 손등에 입을 맞췄다.

뜨거운 숨결이 손등 위를 간질였다. 그녀를 향해 고개 숙인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사락사락 흔들렸다.

‘보는 것만큼이나 부드러울까?’

순간 로엔은 그의 머리카락을 만져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당황한 로엔이 화들짝, 그에게 붙잡힌 손을 빼냈다.

어이없는 감정에 로엔은 너무도 당혹스러웠다. 얼굴이 홧홧해질 만큼.

정말 미친 모양이다.

아니면, 누군가 억지로 그녀의 심장을 터뜨리려 움켜쥐었거나.

진이 숙였던 허릴 펴곤 로엔을 응시했다. 혼란스러운 로엔과는 달리 진의 모습은 태연했다. 은청색의 눈동자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았다.

“흠, 흠!”

민망해 괜스레 헛기침을 했다. 진은 그녀의 부산스러운 행동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아니, 오히려 뭔가 생각에 잠긴 듯 멍하니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무슨 생각인 거지? 설마 날…….’

긴장으로 마른침을 삼키는데, 진이 갑자기 몸을 돌렸다. 그리곤 어디로 가는 것인지 묻기도 전에 펨부르크 호수를 빠져나갔다.

“하아, 후우―.”

참고 있던 숨을 내쉬며 로엔은 손을 뻗어 모자에 달린 검은 베일을 들어 올렸다. 얼굴을 가렸던 천이 사라지자 청량한 나무 향이 느껴졌다.

“다행이야. 날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았어.”

한순간 의심이 들기도 했지만 별말 않고 자릴 뜬 건 그가 제 비밀을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일 터였다.

하지만 의외였다. 진 로이슈덴 공작이 괴물 공작의 호의를 의심 없이 순순히 받아들이다니. 남녀 간에 오가는 핑크빛 호의는 아니었지만, 긍정적인 감정임엔 분명했다.

“어떤 감정이든, 나에겐 다행인 거지.”

그와 친분을 쌓기 위해 가식으로 높고 높은 탑을 쌓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로엔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5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애프터눈 티타임도 슬슬 끝나 갈 테니, 이제 다시 경마장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특별관람석에 도착하자마자 로엔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보다 먼저 출발한 진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여기에 온 게 아니었나?’

진이 관람석에서 보이지 않자, 실망감이 밀려들었다.

혹시 마구간에 간 건가?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여물통에서 독초가 발견됐다고 했으니 마지막까지 경계를 늦출 수 없을 터였다.

그때,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에드윈을 비롯해 귀족들이 하나둘 관람석으로 돌아오는 게 보였다.

“주인님, 준비해 둔 차입니다.”

스미스 역시 로엔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걸 보곤 서둘러 차가 담긴 트레이를 들고 다가왔다.

“고마워, 스미스. 그렇지 않아도 목이 마르던 참이었어.”

갈증을 느낀 로엔은 베일 안으로 찻잔을 넣어 한 모금 마셨다. 냉차였다. 스미스가 마시기 쉽게 얼음을 넣어 차게 식힌 모양이었다.

“폐하는 별말씀 없으셨고?”

황제가 주관하는 티타임에 참석하지 않았으니 분명 귀족들 사이에서 뒷말이 나왔을 터였다.

“크게 개의치 않으신 듯 보였습니다. 캠벨 후작님께서 공작님의 편을 드신 게 큰 듯합니다.”

“켐벨 후작님께서 내 편을 들었다고?”

뜻밖이었다. 켐벨 후작이 나서서 저를 변호하다니. 후작가의 파티에서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그것들이 후작이 제 편이 될 정도의 깊이는 아니었다.

의아해하는 사이, 스미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티룸에 캔싱턴 백작과 그 영애도 있었습니다. 분위기가 좋지 않았고요.”

아, 그렇다면 상황이 조금 이해가 됐다. 그러고 보면, 캔싱턴 백작도 낯짝이 참 두꺼웠다. 아버지고 딸이고, 캠벨 후작과 영애에 대해 그런 소문까지 내 놓고는 뻔뻔하게 같이 차를 마시려 하다니.

“캔싱턴 백작이 내 불손함을 폐하께 간언한 모양이군.”

베일 사이로 로엔의 입가가 냉소로 비틀렸다.

‘로이슈덴 공작부인의 자릴 두고, 본격적으로 날 견제하려는 것이겠지.’

로엔은 천천히 냉차를 마셨다. 시원한 차가 갈증으로 바짝 마른 입안을 적시자, 들끓던 마음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차 고마워. 수고했고.”

다 마신 찻잔을 스미스에게 건넸다. 그리곤 경기장 쪽으로 고갤 돌리다 캐서린과 눈이 마주쳤다. 특별관람석 주변으로 시선이 분주히 움직이는 걸로 보아 진을 찾는 모양이었다.

이제 곧 시합이 시작될 텐데, 진은 아직 오지 않고 있었다. 분명 에드윈에게도 진이 로열 에스콧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전해졌을 터였다.

설마 알렉이 여물통에서 독초를 발견했다는 것 역시 알려진 건 아니겠지?

문득 떠오른 생각에 괜스레 불안해졌다.

“록스버그 공작, 왜 차를 마시러 오지 않았지? 기다렸는데 말이야.”

특별관람석으로 돌아온 에드윈이 로엔을 발견하곤 서운함을 드러냈다. 그 모습에 로엔은 혀를 내둘렀다.

‘배우를 하면 대박을 터뜨릴 사람이 또 있었네.’

정말 어딜 가나 본심을 가려 줄 가면 한두 개쯤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차고도 넘치는 것 같았다. 사교계란 게 다 이런 것이라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사실 나부터가 속내를 숨길 다양한 얼굴의 가면을 갖고 있으니 말 다 한 거지.’

그러니 배신이라도 당한 듯 속상해할 이유도 없었다.

“불쾌감을 드리고 싶지 않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불쾌감? 혹시 그대의 흉터를 내 앞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될까?”

“좋은 자리에서 내보일 모습이 아니라. 그로 인해 폐하를 서운하게 해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니다. 날 배려한 행동이었는데 그대를 꾸짖을 수야 없지. 그런데 계속 여기에 있었던 건가?”

에드윈의 물음에 로엔은 긴장했다. 또 의심병이 고갤 쳐드는 모양이다.

“아닙니다, 폐하. 잠시 산책을 다녀왔습니다. 펨부르크 호수는 처음이라 꼭 보고 싶었습니다.”

“펨부르크 호수가 아름답긴 하지. 하지만 호수 안쪽까진 허락 없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게 흠이지. 나 역시 펨부르크 호수 안까진 들어가 보지 못했거든.”

로엔이 눈을 가늘게 뜨곤 에드윈을 응시했다.

‘허락 없이는 펨부르그 호수의 안쪽까지 들어갈 수 없다고? 하지만 분명…….’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로엔이 이유를 물으려는 순간, 시종장이 빠르게 걸어왔다. 그리곤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에드윈에게 귓속말을 했다. 단조롭던 에드윈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롭게 변하더니, 입가 역시 냉소로 비틀렸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에드윈이 귀찮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손짓을 했다. 그러자 한 발짝 뒤로 물러선 시종장이 초조한 얼굴로 되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우선은 가 봐.”

“그럼 계획은…….”

“바꿀 생각 없다. 그대로 진행해.”

차가운 목소리에 시종장이 재빨리 자릴 떴다.

“공작, 무슨 말을 하려 했지?”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폐하.”

로엔이 재빨리 뒤로 물러서듯 대화를 마무리했다. 에드윈이 다그쳐 물으려는 듯 입을 달싹이려는 순간, 캠벨 후작이 눈치 빠르게 말을 건넸다.

“폐하, 이제 곧 마지막 경기가 시작되려는 모양입니다.”

그제야 에드윈이 불쾌한 감정을 갈무리하곤 아무 일 없다는 듯 경기장 쪽으로 고갤 돌렸다.

“기대되는군. 어떤 말이 우승할지.”

웃고 있는 얼굴과는 달리 눈빛엔 잔혹함이 묻어 있었다. 로엔은 그 음산함에 등줄기가 오싹했다.

분명 뭔가 위험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뭔지 알 수가 없어 초조해졌다.

제발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부우웅, 부우웅!

지금까지와는 달리, 마지막 경기를 알리는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귀족들의 흥분에 찬 탄성에 로엔 역시 경기장 쪽으로 고갤 돌렸다.

강력한 우승 후보인 글로리아가 기수를 태우고 경기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뒤를 따라 마지막 경기에 출전할 말들이 속속 들어왔다.

로엔의 시선은 검은 말에 못 박혀 있었다. 다행히 낯선 기수를 태웠지만 흥분한 기색은…….

‘어?’

순간 로엔이 놀란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말도 안 돼. 대체 무슨 생각으로…….’

진이었다. 켈피의 등에 탄 진은 다른 기수들처럼 출발선으로 유유히 말을 몰고 있었다.

‘시종장이 에드윈에게 급하게 전했던 게 바로 이것이었나?’

로엔은 에드윈이 왜 그렇게 차가운 표정을 지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뻔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면서, 위험의 한복판으로 뛰어들다니. 로엔은 진의 행동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다. 돈이든 이기심이든, 누군가 내게 호의를 보인 건 그대가 처음이니까.」

「내게 호의를 베푼 이에게 손해를 보게 할 순 없지.」

쓸데없이 진이 펨부르크 호수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로엔은 눈살을 찌푸렸다. 절대 그럴 리 없었다. 호의를 갚기 위해 위험한 줄 뻔히 아는 경마 시합에 출전하다니.

지나친 억측이라고 생각하는 한편, 묘하게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괜한 짓을 해서는……. 사람 불편하게.’

로엔은 장갑을 낀 손을 드레스 자락에 문질렀다. 덥지도 않은데, 식은땀이 베어 나와서다.

지금이라도 경기장으로 내려가서 당장 멈추라고 해야 하는 건가?

아니, 그러기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분명 제 행동을 에드윈이 의심할 테고, 귀족들 역시 이상하게 생각할 터다.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려 해도 괜스레 속만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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