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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58화 (59/201)

58화

‘어, 그가 왜 여기에?’

진 로이슈덴이었다.

말없이 로엔을 바라보던 진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의 움직임에 로엔은 바짝 긴장했다. 소리 없이 움직이는 그의 모습이 마치 사냥 직전의 맹수처럼 느른해 보여서다.

“어, 로이슈덴 공작님?”

꽉 막힌 목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듯 진을 불렀다.

진은 대답 대신 나무로 걸어갔다. 그리곤 손을 뻗어 나뭇가지에 걸려 있던 모자를 빼냈다.

“이걸 찾는 건가?”

또다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로엔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갤 끄덕였다.

‘봤을까? 내 얼굴을…….’

로엔은 그가 건네는 모자를 받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였다.

제발, 아니기를.

로엔은 간절한 마음으로 감정이 담기지 않은 서늘한 은청색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초조했다.

“어엇?”

그래서였을까? 그의 앞까지 걸어간 로엔이 손을 뻗어 모자를 받으려는 순간, 휘청하며 몸이 크게 흔들렸다. 실수로 드레스의 앞자락을 밟은 것이다.

이런 미친!

욕설이 목까지 치밀어 올랐다. 이건 마치 음유시인들이 읊어 대는 사랑 노래처럼 여자가 남자를 유혹할 때 쓰는 뻔한 술수였던 것이다.

“조심해.”

익숙한 사랑 노래의 클리셰처럼 진이 넘어지려는 로엔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순식간에 그의 품에 안긴 꼴이 된 로엔은 당혹감을 감추며 재빨리 그를 밀어냈다.

두근.

그의 체향이 콧속으로 스몄다.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그와 시선이 얽혔다 떨어졌다. 그리고 한순간이었지만, 그의 은청색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나는 걸 로엔은 똑똑히 보았다.

오해한 것 같았다. 제가 일부러 그에게 넘어져 이런 상황을 연출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실수였습니다.”

“그렇겠지.”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로엔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들고 있던 모자를 써 얼굴을 감추려 하자, 진이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제지했다.

“난 상관 안 해.”

대체 뭘?

뜬금없는 말에 당황한 것도 잠시, 그에게 손이 잡혀 있단 사실에 심장이 무섭게 뛰었다.

“아, 미안. 일부러 잡으려 했던 건 아니었어.”

진이 손을 거둬들였다.

“오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 무슨 말씀을 하신 건지,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갑갑하잖아.”

진이 무심한 투로 말했다. 그리곤 검은 베일에 가려진 로엔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 지금 당장 머리에 쓸 필요 없다는 뜻이었어. 전쟁터에서 그보다 더 끔찍한 흉터도 셀 수 없이 많이 봤거든.”

아, 내 흉터.

그제야 로엔은 진이 흉터 따위 상관없으니 답답하면 모자를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배려 감사합니다.”

로엔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로엔은 조심스럽게 모자를 썼다.

“이건 남들 때문에 쓰는 것도 있지만, 절 보호하기 위해서 쓰는 거라.”

진이 눈을 가늘게 뜨곤 로엔을 보았다. 한 번도 그런 건 염두에 둔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 줄 몰랐다. 보호하기 위해 그런 게 필요할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거든.”

“뭐든 상대적인 법이니까요. 하지만 감사합니다, 로이슈덴 공작님. 누군가에게 흉터 따위 상관없으니 가릴 필요 없다는 말을 들어 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로엔이 그를 지나쳐 조금 전 진이 앉아 있던 바위 위에 자릴 잡고 앉았다.

돌아갈까도 했지만, 잠깐의 휴식을 포기하기 싫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과 단둘이 있을 기회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그 말이 얼마나 따뜻한 건지 깨달았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로이슈덴 공작님.”

진이 저를 향해 고갤 숙인 로엔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진 역시 그의 휴식을 방해한 자가 호수에 나타났을 때, 당장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다. 특히나 검은색 일색의 옷을 입은 여인이 누구인지 알기에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바꿨다.

그는 경마장으로 가는 대신, 로엔과 조금 떨어진 바위에 앉았다. 그리곤 로엔이 그렇듯 펨부르크 호수를 응시했다.

지금까지 타인과 같은 공간에서 휴식을 취한다는 건, 진에겐 용납되지 않는 것 중의 하나였다.

이곳이 전쟁터였다면,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죽였을 터였다.

그것이 누구든.

하지만 이상도하지.

‘저에게 공개 구혼을 한, 가장 껄끄러운 상대와 함께 있다니.’

진이 호수 위에 뿌려진 금빛 파문을 보며 피식 웃었다. 어이가 없어서다.

사락사락.

바람은 진의 속도 모르고 로엔이 쓰고 있는 검은 베일을 깃털처럼 날렸다. 코끝에 스미는 짙은 체향이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다. 달빛을 머금은 이슬의 향 같기도 하고, 햇살을 품은 달콤한 꽃향과 닮은. 그래서 묘하게 심장 주위가 간질거렸다.

순간 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 지금, 며칠 전 티룸에서 재미 삼아 봤던 찻잎점이 떠오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두 명의 여인. 그리고 각자의 손에 들려 있던 왕관과 단검.

시모네타가 뭐라고 했더라?

어쩌면 두 명의 여인이 한 명일지도 모른다는…….

‘미쳤군. 신탁이나 대신관이 예언도 아닌, 그저 상인의 말을 귀담아듣고 곱씹기까지 하다니.’

진은 제 변화가 낯설어 얼굴을 굳혔다.

그러고 보니 궁금하긴 했다. 록스버그 공작가의 주인이 왜 잘 알지도 못한 제게 공개 구혼을 한 건지.

귀족들이 떠들어 대는 것처럼, 첫눈에 반했다는 그런 하찮은 이유는 아닐 터다. 만약 그랬다면 켐벨 후작가에서는 물론 지금도 서슴없이 유혹의 페로몬을 뿌려 댔을 테니까.

하지만 조금 전 검은 베일을 벗고 눈이 마주쳤을 때에도, 그녀의 눈동자엔 당혹감과 호기심 외엔 담기지 않았었다. 그러니 다른 목적이 있는 게 분명했다.

대체 뭘까? 공개 구혼이란 스캔들까지 일으키며 내게 접근한 이유가.

“초대는 언제 가능하지? 그날 이후 그대가 불러 주길 기다리고 있는데 말이 없어서.”

순간 로엔은 눈을 가늘게 뜨곤 진을 응시했다.

‘왜 또 이러지? 듣는 사람 무섭게?’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표정과 목소리로 연인에게나 할 법한 달달한 말을 서슴없이 뱉어 내다니. 속셈이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얼굴이 잘생겨서 그런가? 차갑고 무뚝뚝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무섭기는커녕 오히려 심장이 녹아내릴 듯 달달하게 느껴졌다.

미쳤어. 경계를 해야 할 판에, 얼굴에 홀려서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있으니.

로엔은 헛기침을 하며 재빨리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곤 최대한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만간 사람을 보낼 생각이었답니다. 그런데 좀 놀랐네요. 그냥 예의상 한 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죠?”

“내일은 어때?”

로엔의 마지막 질문을 못들은 척하며 기다렸다는 듯 약속 시간을 물어 왔다. 어떤 상황에서건 느긋하게 행동하던 진이었기에 그 모습이 조금 낯설었다.

‘긴히 전할 중요한 용건이 있는 건가?’

그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적극적으로 만나려 할 이유가 없었다.

어디 한번 가볍게 튕겨 봐? 어떻게 반응할지 보게?

“유감스럽게도 내일은 제가 약속이 있습니다. 일주일 후 점심 식사는 어떨까요? 그때쯤이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일주일 후라니. 너무 먼 것 같은데?”

진이 불만인 듯 낮게 읊조렸다. 하지만 로엔은 다시 한 번 그때 외엔 시간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쉬운 사람이 우물을 파는 법이니, 어쩔 수 없지. 그럼 일주일 후에 보도록 하지.”

의외였다. 가볍게 밀었더니, 그가 밀렸다. 고집을 부려 약속 시간을 앞당길 줄 알았는데.

“네. 그럼 그 전에 다시 한 번 저택으로 전갈을 보내겠습니다.”

로엔이 흔쾌히 대답했다.

“기다리지. 그런데 조금 전에 알렉에게 이상한 소릴 했다지?”

예고도 없이 불쑥 뱉어 내는 말에 로엔의 고개가 휙 하고 돌아갔다.

“아, 그건……. 죄송합니다. 괜한 참견을 해서는.”

“그대를 의심하는 게 아니야. 여물통 밑바닥에 있던 독초를 그대가 놓아 둔 것 아니냐고 추궁하려는 건 더더욱 아니고. 나 역시 거기까지 예상했었으니까.”

진의 여상한 대답에 의문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그럼 대체 왜 그 얘길 꺼내는 거지? 그저 모르는 척하면 될 텐데.

“너와 같은 이유야.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면 될 일인데, 궁금해졌거든. 알렉에게 왜 그런 얘길 해 줬는지. 사실 백번 생각해도 그대에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일인데 말이야.”

진의 입꼬리가 나른하게 비틀렸다. 반박할 수 있으면 해 보란 듯이.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누가 그러던가요?”

예상 밖의 대답에 진의 은청색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그럼 도움이 된다는 건가?”

“보세요. 벌써 공작님의 신뢰를 이만큼이나 얻었잖아요. 다음 만날 약속도 정했고요.”

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내 서늘한 은청색의 눈동자에 경계심이 떠오르는가 싶더니, 그럴 리 없다는 듯 고갤 가로저었다.

“그런 것치곤 알렉에게 전했던 말들이 너무 감정적이어서. 켈피를 걱정했다던데. 아닌가?”

“맞아요.”

“동정심이었다는 건가?”

“비슷해요. 하지만 알렉이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빠뜨린 모양이네요.”

“빠뜨려?”

“네. 제가 켈피에게 베팅할 계획이요. 경주에서 우승해 제게 돈을 긁어모아 줄 말인데, 당연히 위험하면 안 되잖아요.”

동정심보단 돈 때문에 그런 것뿐이라고 못을 박았다.

“굉장히 재미있군.”

진이 픽 하고 웃었다. 웃는 것과는 달리 그의 눈빛은 너무도 차가웠다.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이다.

사실 로엔이 동정심 때문이었다고 했다면, 재고의 여지도 없이 이 자릴 떴을 터였다. 거짓말일 테니까.

그리고 다음 약속도 더는 없었다. 록스버그 공작이 가진 의도가 뭔지 궁금하긴 했지만, 거짓말쟁이완 거래 따위 할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그런 면에서 돈 때문이라며 무심하게 말하는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그 대답은 그의 발을 묶어 놓았다. 별것 아닌 말이 족쇄가 된 것이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다. 돈이든 이기심이든, 누군가 내게 호의를 보인 건 그대가 처음이니까.”

록스버그 괴물 공작이 제 상처 따윈 상관없다는 말을 처음 들었듯, 진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홀로 비밀을 품고 외롭게 살아온 두 사람에게, 처음으로 받은 호의는 무모할 정도로 큰 힘을 발휘했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을 할 만큼.

진이 더는 할 말 없다는 듯 자릴 털고 일어섰다. 오후의 햇살을 등지고 선 진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내게 호의를 베푼 이에게 손해를 보게 할 순 없지.”

안타깝게도 역광 때문에 그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하고 싶은 말은 입안을 맴돌 뿐, 밖으로 새어 나오지 못했다. 대신 로엔은 자리에 앉은 채로 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켐벨 후작가의 파티에서 했던 것처럼.

내밀어진 로엔의 손을 본 진의 입가가 느른하게 비틀렸다. 어이가 없는 모양이다.

“마음에 들었거든요. 그날 보여 주신 기사의 예가.”

과연 그가 또 제 손등에 입을 맞추며 예를 표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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