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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57화 (58/201)

57화

“그는 마음에 대한 보답을 모르는 자이니, 너무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진심으로 동정한다는 듯 낮게 속삭이기까지 했다. 그리곤 볼일 끝났다는 듯이 다른 귀족들 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그제야 로엔은 에드윈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귀족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무시한 채, 로엔은 특별관람석으로 향했다. 초조한 눈빛으로 로엔의 뒤를 따르며 스미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괜찮으십니까, 주인님?”

“응, 걱정 마. 내 예상에서 한 치도 어긋남이 없으니까.”

로엔은 귀족들과 담소를 나누는 에드윈을 보며 픽 하고 웃었다.

‘제 속내도 제대로 감추지 못하면서, 욕심은 많아서는.’

로엔은 냉소를 머금곤 앞을 주시했다. 경마 시합이 시작되려는지, 경기장 안으로 말을 탄 기수들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알렉의 말처럼, 진 로이슈덴은 경마장에 나타나지 않을 모양이었다.

“벌써 정온데 늦는군요. 설마 오시지 않으려는 걸까요?”

진을 기다리는 건 로엔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조금 떨어져 있는 귀족들의 관람석에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늦는다는 이가, 진 로이슈덴인 건 의심의 여지도 없었다.

“폐하께서 직접 초대장을 보내셨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긴 한데, 워낙 제멋대로인 분이라. 지난번 캠벨 후작가에서도 보셨잖아요. 예의라곤…….”

뒷말은 듣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다들 입방아를 찧지 못해 안달들이군.’

로엔은 모자에 달린 검은 베일을 정리하는 척하며 캐서린을 찾았다. 오른쪽 관람석에 제인과 함께 앉아 있는 캐서린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엔 캔싱턴 백작이 자리하고 있었다.

‘황제의 약혼이 결정된 후 한동안 보이지 않더니, 다시 모습을 보였다는 건…….’

이번엔 캐서린을 황후가 아니라, 공작부인으로 만들 작정인 듯했다.

황제의 약혼녀를 정할 때도, 캔싱턴 백작은 캠벨 후작의 평판을 떨어뜨리기 위해 돈과 사교계의 소문을 이용해 온갖 더러운 술수를 부렸다.

결국 그 소문이 거짓이었다는 게 밝혀지면서 그의 술수 또한 허무하게 끝이 났다. 그 결과 그리젤라 켐벨이 황제의 약혼녀가 된 것이고.

머리가 나쁘면 욕심이라도 버릴 것이지. 하지만 어딜 가나 탐욕에 눈이 먼 자들은 있는 법이었다.

로엔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듯 캔싱턴 백작이 고갤 돌렸다. 베일 사이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로엔은 눈을 가늘게 뜨곤, 백작을 응시했다.

“스미스, 캔싱턴 백작의 영지가 어디였지?”

“웨이즈 남쪽입니다. 2년 전 저희가 매수한 광산의 경계 지역입니다.”

2년 전 웨이즈 남쪽에 매수한 광산이라면, 아드리안 제국에서 호리우스의 눈의 매장량이 가장 많은 곳이기도 했다.

“혹시 우리가 광산을 매수할 때 접촉해 온 귀족가 중에 캔싱턴이 있었나?”

“그러고 보니, 캔싱턴 백작이 광산이 관심이 있다며 연락을 해 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땐 우리가 사들인 광산에 호리우스의 눈이 묻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전이라, 몇 번 접촉해 온 게 다여서 주인님껜 보고드리지 않았고요. 아마 라이칸이 이 일에 관해선 더 자세히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스미스의 말에 로엔이 고갤 끄덕였다.

“그래. 라이칸에게 물어보면 알겠지.”

“혹시 무슨 문제라도?”

“문제는 없어, 아직은.”

다만 조금 전 마주친 캔싱턴 백작의 눈빛이 심상치 않을 만큼 살벌했다. 원수라도 진 듯이.

‘그래, 분명 적의였어.’

이해가 되지 않은 감정이라, 로엔은 더 마음에 걸렸다.

“주인님, 시합이 시작되려는 모양입니다.”

스미스의 말에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리자, 말을 탄 기수들이 빠른 속도로 달리는 게 보였다.

여기저기 터져 나오는 환호성과 아쉬움이 묻어 있는 탄성이 섞여 들려왔다. 그리고 내기를 건 자들의 승부에 대한 긴장감이 경기장 안을 빠르게 장악했다.

“우린 느긋하게 기다리면 돼. 마지막 경주 때, 베팅을 할 생각이니까.”

그 외엔 관심 없었다. 로엔은 느긋하게 의자에 기댔다. 그리곤 때를 기다리는 맹수처럼 경마시합을 관람하기 시작했다.

* * *

다섯 번째 시합이 끝나자, 경마 시합에 열중하던 귀족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지 보기 위해 주위를 살피다,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4시였다. 그러고 보니, 애프터눈 티타임이 열리는 시간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경마장에서 애프터눈 티타임이라도 가질 모양이었다.

“주인님, 폐하의 시종장이 연락을 해 왔습니다. 건물 안에 티룸이 있으니, 들어오시라고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예상대로 스미스가 말을 건넸다.

“혹시 폐하의 명이라고 했어?”

“아니요, 딱히 그런 첨언은 없었습니다.”

“그래? 그럼 난 여기에 있는 게 좋겠어. 들어가 봤자 차도 마시지 못할 텐데.”

“그럼 레이디들을 위한 파우더룸에라도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알아보니 그런 곳도 있는 모양입니다.”

황실 소유의 경마장이라고 하더니, 경마 시합을 관람하러 온 게 아니라 황제가 주최하는 가든파티에 참석한 것 같았다.

뭐, 따지고 보면 귀족들이 참석하는 경마 시합은 넓은 의미에서 사교계의 연장이었다.

경주 말에게 돈을 걸며 내기에 참석하는 것도 재미였지만, 이곳에선 무도회와 파티처럼 격식을 따지지 않고 좀 더 자유롭게 남녀가 교류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심심치 않게 공개적으로 마음에 담고 있던 레이디들에게 연서를 전달하며 고백을 하는 남자들도 있었다.

“그것보단 산책을 하는 게 좋겠어.”

몇 시간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시합을 관람했더니 몸이 굳은 것 같았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좀 편히 쉬고 싶었다.

“그럼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아니야. 넌 여기서 이것들을 지켜야지. 잠깐 펨부르크 호수에 다녀올게. 애프터눈 티타임이 끝나기 전에 돌아올 테니 너무 걱정 마.”

“혼자서는 위험하지 않을까요?”

스미스가 뭘 걱정하는지 알기에 로엔은 안심하라는 듯 스미스의 어깨를 다독였다.

‘암살자의 급습.’

로엔 역시도 그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펨브루크 호수는 금원처럼 신성한 땅이야. 아무리 날 죽이고 싶어 정신이 나가 있는 암살자라도, 신성한 땅을 더럽히려 들진 않을 거야.”

로엔의 설명에도 스미스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신성한 땅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건 국법을 어기는 중죄잖아. 그러니 염려 마.”

덧붙인 설명에 그제야 스미스가 안심한 듯 고갤 끄덕였다.

“그래도 조심하십시오, 주인님.”

스미스의 당부에 로엔은 고갤 끄덕이곤 경마장을 빠져나왔다.

조금 걸어가자 펨부르크 호수로 이어지는 숲길이 나왔다. 벌써부터 꽃 향이 물씬 풍기는 걸 보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무엇보다 지금은 황제가 주최하는 애프터눈 티타임이라, 펨부르크 호수로 가는 길목엔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었다. 귀족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티룸으로 간 듯했다.

“나에겐 다행인 건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한 곳에서 편히 쉴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니까.

얼마나 걸었을까?

펨부르크 호수에 도착한 로엔은 걸음을 멈췄다. 일렁이는 베일 사이로 호수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워.”

아니, 이건 아름답다는 말론 다 표현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신비롭고 경외감이 깃든, 그런 아름다움이었다.

경마장에 앉아 있는 내내 팽팽하게 날이 섰던 신경이 누그러졌다. 나른한 고요에 로엔은 푸른 잔디에 얼굴을 묻고, 햇살 아래의 고양이처럼 잠들고 싶었다.

사락, 사락.

호수에서 불어온 바람이 로엔이 쓰고 있는 챙이 넓은 모자를 흔들었다. 바람에 모자가 날아갈세라, 로엔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엇!”

하지만 사고는 언제나 순식간에 일어나는 법이었다. 누군가의 짓궂은 장난처럼 손끝에 닿았던 모자가 바람과 함께 휘리릭 날아갔다.

“안 돼.”

몸이 먼저 움직였다. 누군가 모자를 벗은 로엔의 얼굴을 보기라도 한다면 낭패였다. 바람에 나비처럼 날아가는 야속한 모자를 따라 로엔은 호수의 깊고 깊은 안쪽을 향해 뛰었다.

그리고 그 순간, 펨부르크의 호수에 투명한 결계가 생겨났다.

잠들어 있던 호수의 주인이 로엔의 방문에 눈을 뜬 듯, 순식간에 호수의 수면 위로 금빛 오라가 일렁였다. 마치 로엔이 들키고 싶지 않은 제 모습을 숨겨 주기라도 하듯, 조심스럽고 은밀했다.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로엔은 바람에 날아가는 모자를 향해 손을 뻗을 뿐이었다.

“제발!”

그녀의 간절함을 알기라도 하듯 바람이 멈췄다. 그사이, 수풀 사이에 놓인 모자를 집기 위해 손을 뻗었다.

“아, 제길!”

하지만 또다시 바람은 그녀를 놀리기라도 하듯 재빨리 모자를 멀리 날려 버렸다. 마치 그녀를 정해진 어딘가로 이끄는 듯 보였다.

“하아, 하아.”

밭은 숨이 새어 나왔다. 더는 주위 따윈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무작정 모자만 바라보며 뛰어가던 로엔이 마침내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검은 모자가 커다란 나뭇가지에 걸려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었다.

그제야 안심이 됐다. 나뭇가지에 끼어 더는 도망치지 못할 터였다. 로엔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모자가 있는 커다란 나무를 향해 걸어갔다.

바스락!

바닥에 떨어진 마른 나뭇잎을 밟는 소리에 로엔이 걸음을 멈췄다. 신경이 예민해지며 본능적으로 주위의 인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누……구?

심장이 무섭게 뛰었다.

로엔은 본능적으로 주머니에서 검은 베일로 된 얼굴가리개를 꺼내 양쪽 귀에 걸었다. 경마장으로 출발하기 전, 세실이 유행에 뒤떨어지면 안 된다며 억지로 챙겨 준 것이었다.

‘다행이야.’

하지만 그것도 잠시, 로엔이 인기척이 나는 쪽으로 고갤 돌렸다. 그러자 짙은 그늘 속에서 익숙한 은청색의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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