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록스버그 공작, 이제야 보는군.”
특별관람석 쪽으로 향하던 로엔은 에드윈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곤 재빨리 예를 갖췄다. 조금 늦은 모양이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미리 도착했던 것 같은데, 어딜 그리 급히 다녀오는 건지 모르겠군.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은밀히 만날 사람이라도 있었나?”
뾰족한 말투하며, 특별관람석에 있는 집사 스미스에게 닿았다 다시 로엔에게 향하는 에드윈의 시선에 불안감이 차오른다.
그가 한 말을 떠올리며 로엔은 헛웃음을 지을 뻔했다.
누가 들으면 바람난 연인을 타박하는 줄 알겠네.
‘은밀히 만날 사람이라니. 내가 제 연인도 아니고.’
운 나쁘게도 하필.
‘지랄 맞은 의심병이 또 도진 모양이군.’
뭐가 그의 심기를 건드린 걸까? 이렇게 뾰족하게 날을 세울 만큼. 혹시 소문을 들은 건가?
캠벨 후작가에서 진 로이슈덴이 로엔에게 기사의 예를 갖췄다는 말이 에드윈에게 전해진 모양이다. 거기다 사교계의 꽃인 캐서린을 냉정하게 쳐냈다는 말이 양념처럼 뿌려졌다면, 분명 에드윈의 지랄 맞은 의심에도 기름을 뿌린 격이었을 테고.
그러니 신중해야 했다. 만에 하나 이 상황에서 쓸데없이 에드윈의 신경을 거슬렀다간 일이 잘못될 수도 있었다.
진실을 말하되 교묘히 속내를 감추는 것. 이것이 사교계에서 살아남는 처세술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연극은 필수였다.
로엔은 빤히 읽히는 에드윈의 속내를 모르는 척했다. 그리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구간에 다녀왔습니다.”
“그대가 마구간에 갔었다는 건가?”
“네. 경마장엔 처음이라 베팅을 하기 전에 직접 말의 상태를 봐야 할 것 같아서요. 제가 오늘 큰돈을 쓸 생각이라.”
로엔의 대답에 에드윈의 시선이 다시 스미스에게 향했다. 그리고 스미스 옆에 높다랗게 쌓여 있는 상자를 발견하곤 눈을 가늘게 떴다.
“록스버그 공작이 경마에 관심이 있었는지 몰랐군.”
“경마엔 관심이 없지만, 돈을 버는 덴 관심이 많아서요.”
에드윈이 알 만하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말레 상단이 타란 대륙의 모든 자금을 쥐락펴락한다지?”
“소문이 좀 과장됐을 뿐 그 정도까진 아닙니다, 폐하.”
“굉장히 겸손하군, 공작. 내가 본 것만 해도 이익이 장난이 아니던데.”
진 로이슈덴과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는 딜을 하러 황궁에 갔을 때, 제가 건넸던 것들을 두고 하는 말인 모양이다.
욕심은 한도 끝도 없다니까.
“다 폐하께서 보살펴 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항상 감사하게 여기고 있답니다. 그래서 오늘 그 감사의 의미로 제가 베팅한 금액 모두를 황실에 기부할 생각입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대체 얼마나 베팅할 생각이기에 황실에 기부한다는 말을 꺼내는지 흥미가 돋아서였다.
“베팅금 전부를 황실에 기부한다라. 록스버그 공작은 언제나 날 놀라게 만드는군.”
가식적인 미소에 로엔 역시 황송하다는 듯 고갤 숙였다.
“폐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비해선 하찮은 것이라, 부끄럽습니다.”
“그래, 마구간에 갔다고 하니 보았겠군. 오늘 경마 시합에서 어떤 말이 우승할지.”
“…….”
에드윈의 물음에 로엔은 대답 대신 잠시 뜸을 들였다. 마치 선택이 망설여진다는 듯이.
“왜? 정하지 못할 이유라도 있나? 그것도 아니면 마구간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거나.”
에드윈의 시선이 탐색하듯 로엔의 얼굴 주위를 배회했다.
지금, 떠보려는 건가?
아니면 벌써 제가 로이슈덴 공작가의 말을 보고 왔다는 정보가 에드윈에게 전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게, 조금 무섭게 생긴 말을 봐서. 가까이 갔더니 사납게 날뛰는 바람에 짓밟힐 것 같아 무서웠거든요. 아직도 심장이…….”
로엔이 두려움에 떨며 심장 부근을 지그시 눌렀다. 마치 떠올리기도 싫다는 듯.
에드윈이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다행히 제 변명을 믿는 눈치였다. 그렇다는 건, 마구간에서 있었던 일이 구체적으로 에드윈에게 전해지진 않은 모양이었다.
“말을 두려워하는 레이디들이 있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그대가 해당되는 줄은 몰랐군.”
“10년 전 사고의 트라우마로 난폭한 말은 두렵습니다.”
로엔의 대답에, 순간 에드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제야 에드윈 역시 10년 마차 사고가 로열 에스콧을 향하던 길에 벌어진 일이란 걸 떠올린 모양이다.
“아, 그럴 수 있겠군. 그때 마차 사고 장소가 이 근처였던가? 너무 오래돼서 가물가물하군.”
“네.”
감정을 삼키듯 힘없이 떨리는 목소리였다. 다행히 그 목소리에 에드윈의 눈동자에 떠올랐던 의심이 어느 정도 사라지는 게 보였다.
“안됐군. 정말 유감이다, 록스버그 공작. 하지만 말들이 다 난폭한 건 아니지. 분명 순종적이고 얌전한 말들도 있으니 너무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위로 감사합니다, 폐하.”
“그나저나 무슨 말을 보고 왔기에 과거의 트라우마가 떠올랐는지 모르겠군.”
뻔히 다 알면서 모르는 척 떠보는 에드윈의 태도에 헛웃음이 새어 나오려 했다.
“……로이슈덴 공작가의 말이었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에드윈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켈피를 보고 온 모양이군.”
“말을 돌보던 자의 말론, 그런 이름이라고 하더군요.”
떨리는 목소리로 말끝을 흐리며, 두 손을 꼭 마주 잡았다. 몸의 떨림을 멈추려는 듯이.
“약한 모습을 보여 죄송합니다, 폐하. 하지만 하아, 그렇게 악마처럼 검고 사나운 말은 처음이라……. 부모님께서 돌아가셨던 장면이 떠올라 무서웠답니다.”
로엔은 꺼질 듯 한숨까지 내쉬었다. 지금이 극적인 연극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주인님?”
언제 왔는지 타이밍 좋게 스미스가 휘청거리는 로엔을 부축해 왔다. 로엔이 스미스에게 몸을 기댄 채 고갤 끄덕였다.
“이런, 운도 없지. 하필 켈피의 특성을 고스란히 가진 놈을 보다니. 보지 않아도 오늘 경마 시합에 나올 켈피는 다른 말들보다 야생성이 더 강한 놈인 모양이군.”
켈피에 대해 언급하는 에드윈의 목소리가 과한 걱정을 담고 관람석을 울렸다. 귀족들이 빠짐없이 들을 수 있을 만큼. 마치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밑밥이라도 깔듯, 굉장히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치밀하게 계산된 행동까지. 정말 작정을 한 모양이네.’
“제가 보기엔 위험해 보였습니다. 그런 공격성이 강한 말에 탔다간, 바닥에 떨어져 말발굽에 밟힐 것 같았거든요. 폐하께서 그 말을 시합에 내보내지 말라고 명하셔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였습니다.”
로엔의 말속에 담긴 뜻을 분명히 읽었을 텐데도 에드윈은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나며, 입가에 나른한 미소까지 떠올랐다.
“유감스럽지만 시합이 곧이라 취소할 순 없겠군. 하지만 로이슈덴 공작이 오면 한 소리 해야겠어. 제대로 훈련되지도 않는 말을 경기에 내보냈으니 말이야.”
에드윈은 자리에도 없는 진 로이슈덴을 나무라는 듯 큰소리로 말했다. 주위의 귀족들이 모두 들을 수 있게.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사실 그녀의 제안에 단박에 그러겠노라 대답할 것이라곤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에드윈의 뜻대로 돌아가는 꼴을 잠자코 지켜보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당장은 딱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의심을 완벽하게 없애는 것 외엔.
“저기, 폐하?”
“뭐지, 록스버그 공작?”
“그러니까, 로이슈덴 공작님께는 제가 켈피에 대해서 나쁘게 말했다고는…….”
로엔이 말끝을 흐렸다. 그 모습이 뭘 의미하는지 뻔히 보여, 에드윈이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걱정할 것 없다. 비밀로 해 줄 테니. 하지만 의외군. 록스버그 공작도 사내 앞에선 한없이 여린 존재였다는 게 말이야.”
로엔이 민망한 듯 고갤 숙이자, 에드윈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가 그린 체스 판 위의 말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제 손아귀에 움켜쥐었다고 생각했는지, 애드윈에게선 숨길 수 없는 여유가 느껴졌다.
“그럼 화제를 돌려서 처음 그대에게 했던 질문을 다시 하지. 록스버그 공작, 그대는 오늘 경마 시합에 어떤 말이 우승할 것이라 생각하지?”
“폐하, 제가 본 말 중에 오늘 경마 시합에서 우승할 말은 단 하나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전 우승할 말에 돈을 걸지 않을 생각이라, 그래서 폐하의 질문엔 대답은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로엔의 대답이 의외였는지 에드윈의 눈빛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우승할 말에 돈을 걸지 않겠다니. 내 생전 그런 황당한 말은 처음 들어 보는군. 그럼 록스버그 공작은 대놓고 돈을 잃겠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폐하. 지금 저에겐 돈보다 다른 게 더 중요해서요.”
“재미있군. 하지만 그대는 약속을 지킬 수는 없겠군. 베팅한 금액을 황실에 기부하겠다던 그 포부 넘치는 약속을 말이야.”
에드윈이 삐딱하게 지적하자, 베일 속에서 희미하지만 분명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웃는 건가, 공작?”
“죄송합니다, 폐하. 하지만 약속은 지켜질 겁니다.”
“어떻게?”
“오늘 경마 시합에서 우승할 말은 폐하께서 베팅하실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제가 돈을 잃게 된다면 제 돈은 모두 폐하의 것이 되겠지요.”
그리고 반대의 경우…….
“제가 건 말이 우승한다면, 그것 역시 기쁜 마음으로 황실에 기부할 생각입니다.”
뭐가 됐든, 에드윈에겐 손해는 아니었다.
로엔은 이제 막 사교계에 데뷔한 철없는 레이디처럼 수줍은 모습이었다. 잔뜩 들떠서는 당장에라도 사고라도 칠 기세였다.
“쯧쯧, 레이디들이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에드윈은 황당함을 넘어서 이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갤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기에 돈이 아니라, 다른 게 더 중요하다니. 딱 철없는 아이들이나 할 짓이잖아.’
정신 차리란 말이 혀끝까지 차올랐지만 에드윈은 말을 삼켰다. 대신 로엔을 동정이라도 하는 듯 다정하게 말했다.
“사랑에 눈이 머는 건 죄가 아니지만, 그대의 주머니를 가볍게 만드는 사내는 유죄일 것 같군.”
마치 진 로이슈덴의 무정함을 탓하는 것처럼.
그리곤 에드윈이 중요한 충고라도 하려는 듯 로엔 쪽으로 고갤 숙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