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55화 (56/201)

55화

당황한 알렉이 숨을 삼켰다. 긴장감과 함께 이유를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해일처럼 그를 집어삼켰기 때문이다.

“괜찮아요. 전 뭐든 길들일 생각은 없어서. 난, 모든 것들은 그 나름의 속성과 성질을 품고 있어야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사람 역시 예외는 아니라.”

“…….”

알렉의 얼굴이 붉어졌다. 제 치졸한 오지랖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알렉. 그런데 이 말의 이름이 뭔지 물어도 될까요? 내가 서둘러 오느라 시합에 출전하는 말들에 대한 정보를 받질 못해서.”

“켈피입니다.”

“켈피요? 다른 이름 없이 그냥 켈피라는 건가요?”

“네. 로이슈덴 공작가의 말은 모두 하나의 이름을 갖습니다. 그것이 전통입니다.”

“하나의 이름이라. 신기하네요. 전통일 정도면 특별한 이유가 있겠죠?”

“그럴 겁니다. 하지만 전 그 기원이 뭔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제가 처음으로 켈피를 보았을 때부터, 로이슈덴 공작가의 마구간에 있는 모든 말들의 이름은 하나였습니다.”

로엔이 고갤 끄덕였다.

“흥미롭네요. 그렇다면 더 망설일 것도 없이 베팅을 해야겠어요. 전설의 말이 내 눈앞에서 전력질주를 하는 것일 테니까요.”

로엔이 홀린 듯 켈피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몸 전체가 검은색 일색인 말은 저와 닮아 있었다.

“조심하십시오. 말이 사나워 다치실…… 어?”

순간, 알렉은 입을 다물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이 믿기지 않아서였다.

지금껏 켈피는 진 로이슈덴 공작이 아니면, 제 터럭 하나에도 손이 닿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그건 알렉을 비롯해 로이슈덴 공작가의 마구간지기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도 알렉은 켈피를 진정시키기 위해, 진의 체향이 묻어 있는 손수건을 손목에 묶고 있으니 말 다 했다.

그런데 켈피가 여인의 손길에 순종하듯 얌전히 있었다.

“생각보다 순한데요?”

언제 벗었는지, 장갑을 벗은 새하얀 손가락이 켈피의 콧등을 문지르고 있었다.

가끔 너무 믿기지 않은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면, 그것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고 환영처럼 보이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알렉은 멍하니 로엔을 보며 쓸데없이 멍청한 질문을 해 댔다.

“괜찮으십니까?”

“네. 기분이 좋아요. 신기한 느낌이기도 하고. 그런데 조금 전에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로엔이 말을 쓰다듬는 손길을 멈추지 않은 채 알렉 쪽으로 고갤 돌렸다.

“그러니까, 제가 드리려 했던 말은…….”

알렉은 입술만 달싹이다 이내 고갤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켈피가 로이슈덴 공작님 외에 누군가를 따르는 것은 처음 봐서 조금 놀랐던 것뿐입니다.”

“그랬나요? 아마 절 제 혈육으로 착각한 모양이에요. 제가 온통 검은색이라서.”

알렉이 로엔을 응시했다. 그녀의 말처럼 그녀의 의상은 온통 검은색이었다. 챙이 넓은 모자에 달린 검은 베일을 비롯해, 드레스며 장갑까지 모두.

마치 전설의 켈피처럼.

정말 그런 건가? 모두 검은색이라 착각을…….

알렉은 말도 안 되는 생각에 고갤 가로저었다.

켈피는 야생성이 강한 만큼, 모든 것에 예민했다. 그리고 굉장히 영리했다. 검은색 일색의 옷을 입었다고 해서, 사람을 제 혈육이라고 착각할 리 없었다. 다른 이유가 있다면 모를까.

“로이슈덴 공작님은 언제 오시죠?”

만약 다른 이가 똑같은 질문을 했다면, 모른다고 잡아뗐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눈앞에 있는 록스버그 공작에겐 거짓말로 대충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오늘 경마장엔 참석하지 않으십니다.”

“안 온다고요?”

“네. 제가 아는 한 그렇습니다.”

“폐하께서 직접 초대장을 보냈다던데? 소문이 사실이 아니었던 모양이군요.”

“초대장을 보내신 건 사실입니다.”

알렉이 조금 난처한 듯 말했다. 그러나 제 주인의 성정이 황제의 명이라고 해도 원치 않으면 무시하는 게 태반이었다. 때론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무모하기까지 했다.

“폐하께서 서운해하시겠네요. 로이슈덴 공작님에게 황실 마구간의 말들이 얼마나 훌륭한지 보여 줄 기회를 놓치셔서.”

로엔의 여상한 말투에 알렉은 순간 제가 잘못들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게 무슨……?”

“혹시 켈피의 출전이 마지막 순서인가요?”

“그렇습니다.”

“오늘 마지막 시합에 폐하께서 아끼는 글로리아가 출전한다고 했거든요. 그러니 의도는 뻔하지 않겠어요? 폐하께선 귀족들 앞에서 자랑하고 싶으신 거죠. 황실의 말이 로이슈덴 공작가의 말을 이겨, 더 훌륭하다는 것을요.”

거기다 야생성이 남아 있는 켈피가 익숙하지 않는 낯선 기수를 태우고 달리다 사고라도 난다면 더 좋을 테고.

“알렉, 시합이 시작되기 전까지 켈피에게서 눈을 떼지 말아야 할 거예요. 먹이도 알렉 외엔 주지 못하게 해요. 켈피가 무사히 시합을 마치고 로이슈덴 공작가의 마구간으로 돌아가길 바란다면요.”

로엔이 켈피를 마지막으로 쓰다듬은 다음 손을 뗐다.

“저는 무슨 말씀이신지…….”

“알잖아요? 오늘 경마 시합에서 우승해야 할 말은 켈피가 아니라, 다른 말이란 것쯤은.”

그리곤 언제 그랬냐는 듯 장갑을 끼곤 마구간을 나갔다.

알렉은 멍하니 마구간을 나가는 로엔을 응시했다. 잠시 후 충격이 가시자, 알렉의 표정이 새파랗게 변했다. 초조해졌다.

제 주인이 없는 상황에서 무슨 문제라도 생긴다면…….

알렉은 주위를 경계하며 고갤 들었다. 마치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말하던 록스버그 공작의 모습을 다시 한 번 곱씹었다.

거짓말일 확률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켈피가 그녀를 따르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알렉은 옆에 놓여 있는 여물통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여물통 바닥에 깔려 있는 독초를 발견하곤, 새파랗게 질렸다.

‘잠깐, 그러고 보니 내 이름을 어떻게 안 거지?’

알렉은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에 쥐고 있던 독초를 더욱 꽉 움켜쥐었다.

한 번 시작된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었다.

* * *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을까?’

마구간을 나와 경마장으로 가는 동안 로엔은 미간을 찌푸렸다. 알렉에게 괜한 오지랖을 부린 것 같아 후회가 됐다.

“분명 이상하게 생각했을 테지.”

그리고 제 경고를 믿는 대신 의심할지도 몰랐다. 당연했다. 알렉에게 록스버그 공작은 제 주인에게 공개 구혼을 한 낯짝 두껍고 이상한 귀족일 뿐일 테니까. 상인인 시모네타처럼 그에게 믿음을 주는 존재가 아니었다.

“하아, 대체 왜 그런 말을 한 건지…….”

로엔은 제 행동이 믿기지 않아 더 혼란스러웠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부려서는 안 되는 위험한 오지랖이었다.

“손을 뻗지 말았어야 했어.”

아니, 마구간에 가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으면 그 검고 순한 눈동자를 마주할 일도 없었을 테고, 제가 그런 말을 알렉에게 할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로엔은 순순한 눈으로 제 손에 콧등을 비벼 오던 켈피를 떠올렸다.

분명 알렉은 켈피가 사납다고 주의를 주려 했다. 하지만 그의 말과는 달리, 켈피는 제 소유의 말처럼 순종적이었다.

콧김을 뿜어내며 제 손의 체향을 맡고 얼굴을 맡기는 모습이 너무도 예뻤다. 동물 특유의 맹목적인 순종이 기분 좋았다.

그래서였다. 충동이 그녀를 뒤흔드는 걸 가만히 내버려 둔 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무시한 것도.

그녀에게 순종하는 이 순순하고 예쁜 말이 무사히 로이슈덴 공작가로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기도 했다.

오늘 새벽, 랑케의 정보원이 황제 에드윈이 은밀히 말을 흥분시키는 독초를 구했다는 말을 전해 왔다. 그 순간, 로엔은 에드윈이 뭘 꾸미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경마 시합에서의 우승 때문인지, 아니면 눈엣가시 같던 로이슈덴 공작가의 마구간을 폐쇄하기 위해서인지 알 수 는 없었다.

‘뭐,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집착은 그렇게 더럽고 잔혹한 법이니까.’

에드윈의 의도가 뭐가 되었든, 분명한 사실은 오늘 경마 시합에 나온 켈피는 무사히 로이슈덴 공작가의 마구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에드윈은 켈피가 경마장 안에서 난동을 일으키게 만들 테고, 그것을 빌미로 황제는 켈피를 궁지로 몰아넣을 터였다.

강제로 빼앗든, 그것도 아니라면 죽이겠지.

“후자일 가능성이 크겠어.”

일순 두통으로 머리가 욱신거렸다.

“하필 그런 소리를 들어선.”

알렉의 말을 듣는 순간, 벌어질 수 있는 모든 가능성 중 최악의 결과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시합 중에 흥분해서 날뛰는 켈피를 진정시킬 사람이 아무도 없을 테고, 결국 황제의 계획을 막을 이도 없다는 뜻이 된다.

‘알렉이 내 경고를 허투루 듣지 않아야 하는데.’

로엔은 걸음을 멈추곤 뒤를 돌아보았다.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주의를 줘야 하는지 고민이 돼서다.

하지만 잠깐의 망설임은 단호한 속삭임에 부서졌다.

‘더는 안 돼.’

딱 여기까지가 적정선이었다. 감정이 실리지 않고,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냉정해진 로엔은 서둘러 경마장으로 향했다. 황제인 에드윈이 곧 도착할 시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