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황실 경마장인 로열 에스콧은 타란 대륙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이름난 펨부르크 호수를 끼고 있었다.
금원인 황실 사냥터의 서쪽 끝과 맞닿아 있어, 1년에 두 번 황실 주최의 경마 시합이 열릴 때만 귀족들에게 개방되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귀족들은 금원만큼은 아니었지만, 로열 에스콧에서 열리는 경마 시합에 열광했다. 관람석이 200석으로 한정되어 있는 관계로 관람표을 얻기 위해 웃돈을 얹어 줄 정도였고, 운 좋게 관람표를 구매한 귀족들은 경마 시합을 본다는 핑계로 펨부르크의 호수 주변에서 오전 내내 피크닉을 즐겼다.
사실 펨부르크 호수 역시 요정의 땅이라 알려진 신성한 곳이라, 함부로 호수에 들어갈 수 없었다. 다만, 신비롭고 아름다운 펨부르크 호수를 직접 봤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다음 경기가 열리는 6개월 동안 으스댈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 로열 에스콧으로 향하는 귀족들은 조금 다른 이유로 분주했다.
황제의 입을 통해 경마 시합에 로이슈덴 공작과 록스버그 공작의 참석 사실이 알려지며, 때아닌 관람석의 자리 경쟁에 불이 붙어서였다.
로열 에스콧의 관람석은 다른 경마장과는 달리 특별관람석이 존재했는데, 그 특별관람석엔 황제가 인정한 다섯 가문만이 앉을 수 있었다.
불행히도 사교계의 최고의 관심사인 로이슈덴 공작과 록스버그 공작은 황제가 인정한 다섯 가문 중의 하나였고, 특별관람석에서 경기를 즐길 수 있는 귀족이었다.
그래서 아드리안의 귀족들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들을 보기 위해 특별관람석 주변의 좌석을 차지하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결혼 적령기가 된 딸이 있는 귀족가는 진 로이슈덴 공작의 눈에 한 번 띄겠다고 웃돈에 웃돈까지 지불한 이도 있을 정도였다.
그런 이유로 시합이 시작되는 정오가 한참이나 남아 있었지만, 이례적이게도 로열 에스콧의 관람석은 특별관람석을 제외하곤 모두 꽉 찬 상태였다. 뒤늦게 경마장에 도착한 귀족들은 표를 얻지 못해, 아쉬움을 뒤로하곤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주인님, 로열 에스콧에 도착했습니다.”
로엔을 태운 마차가 경마장 앞에 멈추자, 집사 스미스가 문을 열었다.
“고마워, 스미스.”
로엔은 흘러내린 검은 베일을 정리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요정들의 땅이라고 하더니, 생각보다 더 아름답네.”
로엔은 챙이 넓은 모자에 달린 검은 베일 사이로,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펨부르크 호수를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로열 에스콧은 처음이시군요.”
스미스 역시 새삼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래.”
10년 전 마차 사고가 있었던 날, 로엔과 록스버그 공작 부처는 로열 에스콧에서 열리는 경마 시합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중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잘 달리던 마차가 갑자기 멈췄고, 사고가 일어났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날에 대한 기억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고의 잔상을 떠올리기 싫어 의식적으로 로열 에스콧엔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었다.
그런데 결국 황제의 초대로 다시 로열 에스콧에 발을 디밀게 된 것이다.
장갑을 낀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긴장감에 목덜미가 빳빳했다. 하지만 로엔은 최대한 내색하지 않은 채,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도회도 어쩔 수 없이 참석한 건데, 여기까지 와서 사람들 눈요기는 되고 싶지 않았거든.”
정말 에드윈이 진을 미끼로 경마장에 초대하지 않았다면 절대 오지 않았을 터였다.
로엔의 대답에 스미스의 얼굴이 급격이 어두워졌다. 그제야 10년 전 마차 사고가 로열 에스콧으로 가던 길에 일어났다는 게 생각난 모양이었다.
“걱정할 것 없어. 벌써 10년 전인데. 다 잊었어.”
하지만 스미스를 속일 순 없는 모양이었다. 안심하라고 한 말이었는데, 오히려 스미스의 얼굴이 더 어두워진 걸 보면.
“원치 않으시면 지금이라도 돌아가시는 게…….”
“그럴 필요 없대도. 말했잖아. 오늘은 마음껏 돈지랄을 할 생각이라고. 세실이 말 안 해?”
“전해 듣긴 했습니다. 로이슈덴 공작가의 말에게 베팅하실 거라고.”
“맞아. 어마어마한 금액을 쏟아부을 생각이야. 로이슈덴 공작이 괴물 공작의 돈에 넘어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로엔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우승할까요?”
“상관없어. 내 목적은 돈을 따는 게 아니니까. 그러니 난 경기장에 가기 전에 마구간에 가 봐야겠어. 아무리 대놓고 돈지랄을 할 생각이라도, 내가 걸 말의 상태도 보지 않는 건 말이 안 돼서.”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니, 혼자 움직이는 게 편해. 가서 좀 알아볼 것도 있고. 그러니 넌 걱정 말고 내 자리에 가서 대기하고 있어. 귀족들에게 내가 왔다는 걸 미리 알려야 하잖아.”
“알겠습니다, 주인님.”
스미스가 뒤로 한 발짝 물러서자, 로엔은 경마장에서 조금 떨어진 마구간으로 향했다.
걸음을 옮기자 기다렸다는 듯 바람이 불어왔다. 바다 향이 묻어 있는 해풍과는 다른 청량한 바람이었다.
“펨부르크 호수 때문인 건가?”
기분 좋은 바람에 검은 베일이 흔들렸다. 마치 날아오르는 검은 나비의 날갯짓처럼 경쾌하기까지 했다.
로엔은 입가에 미소까지 지은 채로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마구간으로 가는 동안 마주치는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의 귀족들이 관람석에 자릴 잡고 황실이 마련한 다과를 즐기는 모양이었다.
“분명 로이슈덴 공작가가 사용하는 마구간이 여기쯤 있을 텐데…….”
아주 잠깐, ‘황실에서 기르는 말들도 좀 살펴볼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긴 했다.
하지만 그 생각 역시 그리 길지 않았다. 로엔의 눈에 로이슈덴 공작가의 집사인 알렉의 모습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알렉이 직접 여기까지 온 모양이네.’
말을 돌보는 알렉을 발견하자, 로엔은 기쁜 마음에 한달음에 달려 그의 앞에 섰다.
“이렇게 아름다운 말은 처음 보는군요. 알렉이 자부심을 느낄 만하겠어요.”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말의 갈기를 손질하던 알렉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다 제 앞에 서 있는 이가 록스버그 공작이란 사실을 깨닫곤 재빨리 허릴 굽혔다.
“록스버그 공작님.”
아, 맞다.
그제야 로엔은 제 실수를 깨달았다. 지금 그녀는 만물상점을 운영하는 시모네타가 아니라, 괴물 공작인 록스버그였다.
로엔은 서둘러 당혹감을 감추곤 능숙하게 상황을 수습했다.
“내가 방해를 한 모양이네요. 마구간을 둘러보다 너무 멋진 말을 봐서 흥분을 했나 봐요.”
알렉이 공작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허릴 폈다. 소문과는 달리, 상냥한 목소리에 조금 놀랐다.
그런 알렉을 보며 로엔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대체 제 소문이 얼마나 더러운 건지, 표정 관리 잘하는 알렉조차도 창백해진 얼굴을 숨기지 못하는 걸 보니 씁쓸해서였다.
“방해라니, 당치 않습니다. 그저 너무 이른 시각이라 사람이 있을 것이라곤 생각지 못해서. 저 역시 불쾌하게 해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록스버그 공작님.”
“아니에요. 인기척도 없이 나타나 놀라게 한 내가 더 미안하지. 그런데 이 말, 로이슈덴 공작님이 타셨던 말과 닮은 것 같네요.”
알렉이 긍정하듯 고갤 끄덕였다.
“나도 봤거든요. 유리엘라 광장을 지나시던 공작님을.”
“그러셨군요.”
고갤 든 알렉의 얼굴엔 제 주인에 대한 자부심과 경애로 가득했다. 그래서인지 긴장으로 굳어져 있던 그의 표정 역시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좀 더 가까이에서 말을 살펴봐도 될까요? 오늘 내가 베팅할 말을 이 말로 정해서.”
“경마 시합에 처음 출전하는 말인데, 베팅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알렉은 로엔이 출전 경험도 없는 말에 베팅을 했다가 돈을 잃을까 걱정인 모양이었다.
“말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로이슈덴 공작가의 말에 대해선 좀 알고 있어요. 켈피(물의 정령, 모습은 말과 같으며 사람을 물에 빠뜨리는 장난을 자주하지만 길들이면 최고의 명마)라죠? 이 말의 선조가.”
“제가 알기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200년이란 시간이 흐르며, 그 혈통이 흐려져 기대하셨던 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알렉의 말에 로엔은 상관없다는 듯 어깰 으쓱했다.
“그것 역시 알고 있어요. 켈피는 야생성이 강해서 말을 길들인 주인 외엔 탈 수조차 없다는 것도요.”
“그럼, 이 말에 베팅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알렉의 말에 로엔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비밀을 누설해도 되는 건가요? 그러면 안 되는 것 아닌가요?”
로엔이 놀리듯 말하자, 알렉은 제 실수를 깨닫곤 당황한 듯 얼굴을 붉혔다.
걱정이 돼서 베팅하지 말란 뜻으로 한 말이었는데, 오늘 켈피를 탈 기수가 로이슈덴 공작이 아니란 사실도 말해 버린 것이다.
“어, 그게 그러니까…….”
“걱정 말아요. 비밀은 지킬 테니까. 하지만 그래도 전 이 말에 베팅할 생각이에요. 가끔 무모한 것에 전부를 거는 게 내 즐거움이라.”
알렉은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레이트 모먼트지를 통해 알렉 역시 록스버그 공작이 제 주인에게 공개 구혼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제 주인은 록스버그 공작의 공개 구혼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도 눈앞의 여인은 아무렇지 않은 듯 그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아무리 시간과 애정을 들여도 길들여지지 않는 것이 있답니다. 그게 바로, 이 말이더군요.”
알렉이 말의 갈기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제 말의 뜻을 알아들었을까?’
진 로이슈덴 공작은 록스버그 공작에게 관심 없으니, 헛물켜지 말라는 경고를.
알렉이 상황을 보기 위해 고갤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검은 베일 사이로 로엔과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