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허튼짓했다간 심장을 내놓아야 할 판이네요.”
“맞아. 분명한 경고니까 잊지 마. 뭐, 그래도 눈치는 빠른 것 같아 다행이네.”
세이지가 손을 내리곤 여상하게 말했다.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있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찼다.
“그나저나 어떻게 홀렸어? 우리 대장이 절대 여자한테 흔들릴 사람이 아니거든. 어제 보고 놀랐잖아. 엉큼하게 집으로 불러서 차도 마시고 저녁도 먹고. 이건 뭐, 대놓고 작업을 거는 거랑 똑같아서.”
“홀린 적 없는데요.”
“그럼 우리 대장이 홀린 적도 없는 상대한테 자발적으로 코가 꿰었다는 거야? 에이, 그건 말도 안 된다. 우리 대장이 파렐 수도원의 수도사거든. 여자한텐 관심도 없는.”
세이지가 있을 수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러니 당장 이실직고하라는 듯이.
“뭔가 오해를 한 모양이네요. 공작님과 전 남녀 사이에 있을 법한 그런 관계가 아니라, 사업 파트너에 가깝거든요. 그래서…….”
“오해는 시모네타 님이 한 것 같은데? 우리 대장은 누구랑 사업 파트너 같은 걸 할 성격이 못 돼. 겪어 봐서 알잖아. 누구를 참고 봐주는 것도 싫어하지만, 귀찮게 하는 걸 제일 못 견뎌 하는 걸.”
로엔은 세이지의 말에 백번 수긍하듯 고갤 끄덕였다.
“그렇긴 하더군요. 처음 만났을 때 제 목을 조르셨거든요. 어찌나 성급하신지 인내심이라곤 전혀 없는 모습이었죠.”
“처음 봤을 때 우리 대장이 목을 졸랐다고? 그런데 살아남은 거야?”
세이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로엔을 보았다.
“네. 제가 계약을 제안했더니 생각해 보신다면서 놓아주셨어요.”
여상하게 대꾸하는 로엔을 보며, 세이지가 눈을 가늘게 떴다. 마치 큰 사건이라도 일어난 것 같은 태도였다.
대체 어떤 부분에서 놀라는 건지 로엔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세이지의 태도로만 보자면, 진 로이슈덴이 눈만 마주쳐도 사람을 죽이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맞아, 우리 대장은 눈만 마주쳐도 사람을 죽여.”
로엔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세이지가 거침없이 대답했다.
“…….”
지금까지 진 로이슈덴은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걸까? 최측근인 세이지조차도 서슴없이 그의 잔혹성을 언급하다니.
로엔은 놀라움을 숨기기 위해 숨을 골랐다.
“사실 지금껏 대장이 죽이려다 살려 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거든. 그게 적이든, 아군이든 상관없이.”
냉정하고 잔혹한 성격만 본다면 세이지의 말이 백번 타당했다. 하지만 아군인데도 상관하지 않고 죽인다는 말은 믿기가 힘들었다.
“또 믿지 않는 모양인데, 사실이야. 이 말에 내 목숨을 걸 수도 있어.”
로엔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하찮은 일에 목숨까지 걸 일인가?
그리곤 뭔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자, 세이지가 불쑥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런 걸로 거짓말 같은 건 안 해. 내가 왜 그러겠어?”
불퉁한 아이처럼 인상을 쓰고 있는 세이지를 보며, 로엔은 그를 달래기 시작했다.
“의심한 적 없어요. 그냥 좀 놀라서. 그럼 앞으로도 긴장을 늦추면 안 되겠네요. 공작님 눈 밖에 나면, 언제든 제 목이 날아갈 수 있으니까요.”
그제야 세이지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렇긴 한데…… 잘 생각해 보니 시모네타 님은 예외일 수도 있겠어.”
예외라고? 대체 어디가?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살아남았잖아. 죽이려던 상대였는데도.”
세이지는 그 말이 법이라도 된다는 듯 말했지만, 로엔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 번 죽이려고 했다가 살아남은 자는 다신 안 건드린다는 규칙이라도 있다는 건가?’
오히려 죽이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였으니, 언제든 마음이 바뀔 것 같았다. 한 번 밉상은 영원한 밉상인 법이니까.
그런데 세이지는 반대라고 외치고 있었다.
뭐, 진을 잘 아는 세이지가 그렇다니 그런 것이겠지.
“세이지 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우선은 안심이네요. 그럼 이제 저에 대한 경고는 끝난 건가요?”
“응. 아마 내가 시모네타 님을 향해 검을 들 일은 없을 거야. 오히려 실수로라도 털 끝 하나 건드렸다간 대장한테 죽을 것 같거든.”
“네? 그건 또 왜?”
“어제 못 봤어? 차 좀 얻어 마시고 말 좀 걸었다고 쫓아내는 거? 진짜, 우리 대장이지만 내가 치사해서 죽는 줄 알았다니까. 그리고 저녁 식사 내내 얼마나 째려보는지. 밥 먹다 체해 죽는 줄 알았다니까. 내가 쫓아낸 것도 아닌데.”
세이지가 다시 생각해도 억울한 듯 분통을 터뜨렸다.
“쳇, 여자한텐 관심도 없는 파렐 수도원의 수도사인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었어.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랑케에서 봤던 페이라스모스랑도 키스까지 했었지?”
그때 일이 떠올랐는지 불쑥 입에 올렸다. 그러다 제 말에 조금 놀란 듯 재빨리 입을 다물곤, 로엔의 눈치를 슬슬 본다.
풋, 귀엽네.
그리고 의외였다. 진 로이슈덴 앞에서도 눈치는 밥 말아 먹은 것처럼 행동하던 세이지가 제 눈치를 보는 게.
그나저나 파렐 수도원의 수도사란 게 무슨 뜻이지?
세이지가 상점에 들어온 후로 두 번이나 들은 말이라 그게 무슨 말인지 궁금했다. 나중에 친해지면 슬쩍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랑케의 페이라스모스와 공작님이 키스를 하셨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사실이었던 모양이네요.”
로엔이 여상하게 물었다. 그러자 세이지의 얼굴에 처음으로 난처한 기색이 떠올랐다. 이건 뭐, 주인의 불륜을 주인마님에게 실수로 흘린 표정이었다. 말도 안 되긴 하지만.
“그러긴 했는데, 아마 대장은 별생각 없는 것 같았어. 그러니 시모네타 님은 안심해. 무엇보다 시모네타 님은 대장이 죽이려다 살려 준 유일한 사람이잖아. 그 랑케의 페이라스모스와는 비교도 안 되지.”
마치 그것이 큰 벼슬이라도 되는 양 세이지가 몇 번이나 강조했다. 정말 그의 말처럼 진 로이슈덴이 사람을 죽이려다 마는 일이 흔치 않은 건 분명한 모양이었다.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공작님과는 저는 공적인 관계라 계약만 어그러지지 않으면 됩니다. 공작님이 누구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신데도, 저와는…….”
“진심이야?”
세이지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네. 사실이에요. 그런 일에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고요. 무엇보다 공작님과 전 신분의 차이가 크기도 하고. 한마디로 국법을 어기면서까지 그런 쪽으로 연관 짓고 싶지 않습니다.”
로엔은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그가 더는 오해하지 않게.
“뭐, 그렇지.”
다행스럽게도 세이지 역시 수긍했다.
“하지만 세상일이 다 뜻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잖아? 특히 사람 마음이란 건 더더욱 그렇지.”
“저는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으니까요.”
세이지는 희미하게 미소 짓는 로엔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무 걱정 없이 살아온 것처럼 보였는데, 찰나간 스쳐 지나간 표정에서 뭔가 사연이 있는 듯 보였다.
세이지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청초하게만 보이던 얼굴에 단호함이 서리자,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거역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세이지는 묘한 기시감에 몸을 떨었다. 진 로이슈덴을 전쟁터에서 처음 보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이것 참, 곤란한데.”
“뭐가 곤란하다는 건지 모르겠네요.”
“우리 대장 말이야. 정말 대장한테 관심 없어? 시모네타 님이 말하는 공적인 것 말고, 사적으로.”
“네. 관심 없어요.”
“왜? 우리 대장, 잘생겼잖아. 몸도 좋고. 돈도 많고. 좀 무뚝뚝하고 까칠해서 그렇지, 다른 쪽으론 썩 괜찮을걸? 내가 목욕하다가 봤는데, 가운데도 튼실한 데다 아침마다 아주아주 기운차더라고.”
순간, 세이지가 말하는 다른 쪽이란 게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 순식간에 로엔의 귓불이 뜨거워졌다.
상인의 신분으로 생활하면서, 산전수전 다 겪어 봐서 일상적으로 지껄이는 음담패설에 부끄러움을 느끼진 않았다. 하지만 그 대상이 진 로이슈덴이라고 생각하니 홧홧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는 튼실한 몸보단 지적인 쪽이 취향이라.”
“뭐야? 샌님 취향이었어? 쳇! 큰일이네.”
세이지가 표정까지 일그러뜨리며 낙담했다. 그 모습이 나라라도 잃은 것 같은 모양새라, 로엔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훗, 정말 재미있는 분이네요, 세이지 님은.”
“…….”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말끄러미 쳐다보는 세이지를 보곤, 로엔은 재빨리 미소를 지웠다.
“제 말이 불쾌하셨던 모양이네요. 사과드릴게요.”
로엔의 사과에 세이지가 그런 게 아니라는 듯 고갤 가로저었다.
“화나지 않았어. 그냥 신기해서. 나 보고 지금까지 재미있다고 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거든.”
“아, 그랬나요?”
“응. 그리고 우리 대장보고 귀엽다고 한 사람도 처음이었어. 어제 했던 말, 그것 나 아니고 우리 대장이지?”
속일 생각 말라는 듯 세이지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했다. 로엔 역시 더는 변명하지 않고 흔쾌히 고갤 끄덕였다.
“맞아요. 세이지 님이라고 했던 건, 공작님이 싫어하시는 것 같아서 돌려 말한 거예요.”
“그럴 줄 알았어.”
제 생각이 맞았다는 사실이 기쁜지 세이지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했다.
각자 생각에 잠긴 듯 상점 안은 고요했다.
“제가 좀 늦었죠. 이제야 티룸을 다 치웠지 뭐예요. 차 좀 드세요.”
잠깐의 공백을 깨고, 때마침 세실이 트레이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고마워, 세실. 드세요, 세이지 님.”
로엔이 세이지 앞에 놓인 찻잔에 차를 따랐다. 차를 마시는 동안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어색하거나 불편한 것이 아닌, 조용하고 편안한 침묵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대장이랑 몇 명이서 클럽으로 당구를 치러 간다고 하던데.”
“공작님도 당구를 칠 줄 아는 모양이네요.”
“라우렐이 그러는데, 아, 라우렐은 나랑 같이 황실 기사단에 있는 귀족이야. 우리 대장 오른 팔이기도 하고.”
“…….”
로엔이 대답 대신 고갤 끄덕였다.
“어쨌든 대장도 아카데미 시절에 취미로 쳤나 봐. 그래서 다시 치기로 했고. 혹시 시모네타 님은 당구 칠 줄 알아?”
“잘은 아니지만, 조금은 칠 줄 알아요.”
“그래? 그럼 그 때 시모네타 님도 올래?”
그는 마치 산책이라도 가자는 듯 여상한 태도로 그녀를 초대했다.
“저야 상관은 없지만, 함께 가기로 한 분들이 좋아할지 모르겠네요. 공작님도 그렇고요.”
“걱정 마. 대장은 시모네타 님이 온다면 무조건 환영할 테니까. 그리고 내 선생으로 왔다고 하면 별말 없을 거야. 사실 난 당구 같은 건 쳐 본 적도 없거든.”
“아아.”
“그날 와서 가르쳐 줘. 사실 라우렐이 가르쳐 준다고는 했는데 영 안 내켜서. 공 좀 친다고 내 앞에서 얼마나 거들먹거릴지 눈에 뻔히 보이거든. 이건 자랑인데, 내가 라우렐보단 검술 실력이 좀 더 좋아. 그것 때문에 질투가 장난 아냐.”
로엔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문득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안도감도 함께 들었다.
‘다행이네. 세이지나 라우렐이 있는 한 그가 외롭지는 않을 것 같아서.’
무의식적으로 진 로에슈덴은 그가 품은 비밀 때문에 주위에 사람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처럼. 경멸과 멸시의 대상일 것이라고 막연하게 추측했다.
하지만 의외로 따뜻하고 유쾌한 성격의 사람들이 그의 곁에 있었다.
“괜찮다면 가고 싶네요. 약속이 정해지면 연락 주세요, 세이지 님. 비루한 실력이지만 제가 열심히 가르쳐 드릴게요.”
로엔의 대답에 세이지가 만족스러운 듯 고갤 끄덕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소소한 얘길 나누며 차를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