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그럼요. 얼마든지 말씀하셔도 된답니다, 시모네타 님.”
헤이즐이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흔쾌히 대답했다.
“사교계의 일이라 조금 조심스럽지만, 레이디 캐서린의 말도 일리는 있는 것 같아서요.”
“네? 제가 이해가 좀 되지 않아서 그러는데, 이유를 말씀해 주시겠어요, 시모네타 님?”
캐서린의 말에 동조하고 나서는 게 뜻밖이었는지 헤이즐이 미간을 찌푸렸다.
“캠벨 후작가의 일은 레이디 캐서린에게 굉장히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여기 계시는 레이디들껜 좋은 일인 것 같아서요.”
“무슨 말씀이신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네요.”
루시 역시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고갤 갸웃거렸다.
“한마디로 레이디 캐서린은 희생양이었던 거죠. 로이슈덴 공작님의 마음을 사기 위해선 직접적인 접근보단, 다른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었으니까요.”
순간 캐서린이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제 의견에 동조하는 척하더니, 결국 저를 비웃고 있었다.
“그러니 비난하기보단,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요?”
로엔의 말에 헤이즐을 비롯해 그곳에 있는 레이디들이 웃음을 참으려는 듯 입술을 꾹 다무는 게 보였다.
캐서린의 옆에 앉아 있던 제인 역시도 허벅지까지 꼬집으며 웃음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게 보였다.
“불쾌하군요, 시모네타 님!”
“무례했다면 용서해 주세요, 레이디 캐서린. 하지만 사실을 말해야 레이디 캐서린에 대한 비난 여론이 사라질 것 같아서요. 그러니 제 말에 너무 마음 상해 하지 마세요. 저는 레이디 캐서린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습니다.”
로엔은 캐서린에게 선선히 사과했다.
그 태도가 캐서린을 더 불쾌하게 만든 듯했다.
여유롭게만 보이던 캐서린의 도도하고 거만한 얼굴이 눈에 띄게 무너진 게 그 예였다.
그리고 그 모습에 레이디들은 대리 만족 하는 눈치였다.
“시모네타 님의 말이 맞는 것 같군요. 저희가 너무 옹졸했어요. 이제부터 레이디 캐서린을 비난하기보단 고마워들 하세요. 경쟁자 한 명이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그럼, 전 그만 가 봐야겠네요. 정말 유익한 티타임이었어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모네타 님.”
헤이즐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얼굴 가리개에 대한 값을 세실에게 지불했다.
“잘 쓸게요. 제 생각엔 이것, 사교계에서 대유행을 할 것 같군요.”
“감사합니다, 레이디 헤이즐. 조심히 들어가세요.”
헤이즐을 시작으로 티룸에 있던 레이디들이 하나둘 자릴 떴다.
어느새 방 안에 로엔과 캐서린, 그리고 제인만이 남았다.
“레이디 캐서린, 우리도 가야 하지 않을까요?”
제인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로엔을 죽일 듯 쏘아보고 있던 캐서린이 불쾌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레이디 캐서린,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로엔이 그런 캐서린을 상냥한 목소리로 불러 세웠다.
이건 뭐,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친근하게 말을 건네는 로엔을 보며, 캐서린은 속이 부글부글 끓는 걸 참아 내느라 주먹을 꽉 쥐었다.
감히, 일개 상인 주제에…….
“무슨 일이죠?”
“조금 전 제 무례를 사과하고 싶어서요.”
여전히 냉랭한 표정을 짓고 있는 캐서린을 회유하려는 듯 로엔이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뭐죠? 받고 싶지 않군요.”
“그러지 말고 열어 보세요.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미심쩍은 표정으로 상자를 받아 든 캐서린이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뚜껑을 열자, 짙은 꽃 향과 함께 섬세하게 세공된 브로치가 보였다.
“어, 이 향은…… 묘약 아닌가요?”
제인이 먼저 향을 알아채곤 눈을 빛냈다.
“브로치에 박힌 보석을 눌러 보세요, 레이디 캐서린.”
로엔의 말에 따라 캐서린이 보석을 누르자, 달칵하고 뚜껑이 열렸다.
그러자 향이 순식간에 짙게 퍼지며, 한껏 들뜬 기분이 들었다.
“사향과 묘약을 섞어 고체 형태의 향수를 만들어 넣었답니다. 기존의 일회성 묘약과는 달리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죠.”
“세상에나, 이런 귀한 걸. 혹시 저도 구매할 수 없을까요, 시모네타 님?”
제인이 부러운 듯 브로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레이디 제인. 몇 개밖에 만들지 않은 특별 한정품이라. 그리고 이건 정말 레이디 캐서린에게 미안한 마음에 드리는 선물이랍니다.”
로엔의 설명에 잔뜩 찌푸려져 있던 캐서린의 얼굴이 조금 누그러졌다.
입가에도 미세하지만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뭐,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캐서린은 향이 날아갈세라 서둘러 뚜껑을 닫고는 상자 안에 브로치를 넣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레이디 캐서린. 그리고 앞으로 저에게 부탁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오세요. 성심성의껏 돕겠습니다.”
로엔의 제안이 마음에 들었는지 캐서린이 고갤 끄덕였다.
“그럼 다음에 뵙죠.”
캐서린과 제인이 방을 나서자, 로엔 역시도 따라 나왔다.
상점의 입구로 걸어가는 두 사람을 보며 로엔은 소리 없이 웃음을 삼켰다.
태세 전환이 빠른 건 타고난 성품인 모양이었다.
“어엇?”
문을 나서려던 제인이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뭐야? 부딪힐 뻔했네. 눈을 달고 있는 거야? 조심해야지.”
상점 안으로 들어오던 남자가 불쾌한 듯 인상을 쓰며, 제인에게 버럭 소릴 질렀다.
그 기세에 놀라 제인과 캐서린은 입도 뻥긋 하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어, 세이지 님?”
로엔이 먼저 남자를 알아보곤 알은체를 했다.
그제야 제인과 캐서린이 고갤 들어, 상점 안으로 들어오던 무례한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세이지란 이름은 라우렐 데칸만큼이나 유명했다.
진 로이슈덴의 최측근이라 알려진 기사였으니까.
“여긴 어떻게?”
로엔은 재빨리 벽시계의 시간을 확인했다. 5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지금 시각이라면 황실 기사단에 계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혹시 오늘도 배가 아파서 조퇴를 한 건 아닐 테고.”
로엔이 또 꾀병이 난 것 아니냐는 듯 장난스럽게 세이지를 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친밀함에 캐서린과 제인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이 떠올랐다.
“당연히 아니지. 오늘은 비번이거든. 집에 있자니 좀이 쑤시기도 하고, 상점을 운영한다기에 뭘 파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잠깐 들렀어. 그나저나 시모네타 님은 어제 잘 들어갔어?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갑자기 사라져서 황당했거든. 그 후로 대장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데다, 완전 넋이 나간 모습이었으니까.”
세이지가 다시 생각하기 싫다는 듯 고갤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모습에 로엔은 귓불이 홧홧해지려는 걸, 가까스로 참아 냈다.
“갑자기 예약이 있었다는 게 생각나서 돌아올 수밖에 없었어요. 세이지 님,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먼저 오셨던 손님들을 배웅하던 중이라…….”
로엔이 세이지에게 양해를 구하곤, 캐서린과 제인 쪽으로 고갤 돌렸다.
“아니요. 저흰 신경 쓰지 말고 얘기 나누세요, 시모네타 님. 그럼 다음에 연락드릴게요.”
캐서린이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태도로 로엔에게 살갑게 인사까지 건넸다.
그 모습에 로엔은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
역시, 계산 하나는 빠르다니까.
이번엔 에런 홈볼트 백작 대신 로엔을 진 로이슈덴에게 접근할 디딤돌로 쓸 모양이었다.
“연락 주세요. 레이디 캐서린.”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상점을 나가는 캐서린을 보며, 로엔이 서둘러 문을 닫았다.
그리곤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상점 안을 둘러보고 있는 세이지를 향해 돌아섰다.
“정말 상점의 물건들이 궁금해 구경하러 오신 건가요, 세이지 님?”
로엔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을 벗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답답해서였다.
레이디들은 로엔이 쓴 얼굴 가리개를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지만, 로엔은 얼굴에 뭔가를 쓴다는 자체가 싫었다.
그건 사고 후 어쩔 수 없이 쓰고 다니는 검은 베일 때문이었다.
“뭐, 겸사겸사해서. 좀 궁금한 것도 있고.”
세이지가 탐색하듯 로엔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경계 어린 태도에 로엔은 시선을 피하는 대신 마주 보았다.
세이지의 말투며 행동은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경박해 보였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예사롭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평민 신분이라도 무시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무엇보다 지금만 해도 로엔을 보며 웃고 있었지만, 그의 검은 눈동자는 웃음기라곤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날카로웠다.
로이슈덴 공작의 탐색견.
그녀를 살피는 세이지의 눈빛이 딱 그랬다.
“그럼 차를 마시는 게 좋겠네요.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까요. 세실! 차를 좀 준비해 주겠어?”
“누가 또 오셨어요?”
안을 정리하던 세실이 문 밖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그러다 세이지를 발견하곤 호기심으로 눈을 빛냈다.
“세이지 님이셔. 어제 로이슈덴 공작가에서 만났는데, 상점이 궁금해서 찾아오셨대.”
“아아, 네. 앉아 계세요. 제가 얼른 준비해서 나올게요. 그리고 창가에 있는 티 테이블이 좋겠어요. 이곳은 아직 정리가 안 끝나서.”
“부탁할게. 그럼 세이지 님, 이쪽으로.”
로엔이 창가 앞에 놓인 티 테이블로 세이지를 안내했다.
“설탕 범벅 같던 외관과는 조금 다르네? 사실 취향에 안 맞아 돌아갈까 망설였는데.”
자리에 앉은 세이지가 상점 안에 진열된 다양한 물건들을 눈으로 구경했다.
“이곳을 처음 방문하는 남성분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말씀을 하시더군요. 의외라고.”
“그럼 대장도 그랬어?”
“문을 열기 전, 몇 번이나 망설인 눈치였어요.”
상상이 된다는 듯 세이지가 기분 좋게 웃었다.
“그리고 뭘 했는데?”
“게르피온의 유명한 대장장이가 만든 단검에 흥미를 보이셨어요.”
“아아, 나도 본 적 있어. 그 대장장이 이름이 뭐였더라?”
“모리의 대장간.”
“맞다.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아. 내가 봐선 다 똑같은 검 같은데, 대장은 유독 모리의 대장간에서 만든 검들만 사용했거든. 목을 칠 때, 단번에 깨끗하게 잘라 낼 수 있다면서.”
로엔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세이지는 신이 나서 떠들었다.
“사실 사람 목을 벨 때, 단칼에 베어지지 않으면 난감하거든. 피도 여기저기 튀고. 그래서 난 목을 치는 대신 심장을 찔러. 정확하게, 딱 한 번만.”
세이지가 고갤 돌려 로엔을 응시했다.
그리곤 적의 심장을 검으로 찌르기라도 하듯, 로엔의 심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지금껏 호의를 내보이며 웃고 있던 세이지의 표정 역시 변해 있었다.
속을 알 수 없을 만큼 차갑게.
일종의 경고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