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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50화 (51/201)

50화

그럴 리 없다. 지나친 억측이다.

하지만 그것으로밖엔 설명되지 않는다.

“오해야.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거야.”

그가 그런 감정을 가질 만큼, 진과 그녀 사이엔 특별한 일 같은 게 없었다.

남들이 말하는 사랑에 빠질 순간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동료애밖에 없었다.

세이지에게 이제 막 사귄 친구를 빼앗길 것 같아 경계하는, 그런 종류의 질투심.

그리고 그가 내보인 소유욕 역시 같은 맥락일 뿐이었다.

남녀 사이라 연정이라고 착각한 거지, 친구 사이엔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는 감정이었다.

“따지고 보면 나 역시 그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있잖아. 같은 감정인 거지.”

그제야 밤새 그녀를 괴롭혔던 고민이 순식간에 해결된 것 같아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그나저나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그가 저를 상대로 동료애를 느끼다니. 신기했다.

그리고 ‘언제부터?’라는 의문이 자꾸만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황제인 에드워드와 밤 사냥을 하고 상점을 들렀을 때인가?

그날 로엔 역시도 그에게 인간적인 애틋함을 느꼈으니, 그 역시 마찬가지였을 터다.

“그가 날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니, 다행이야. 이제 경계하지 않는다는 거니까.”

덕분에 훨씬 수월하게 계획을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 고민할 필요도 없이 저에겐 유리한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그가 말했었다.

찻잎점의 대가로 제 입술이 필요하면 언제든 사용해도 좋다고.

그러니 그를 이용하는 일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어떻게 할지 결정되자 로엔은 안도했다.

하지만 이상하다. 안도감과 함께 다른 감정이 밑바닥에서부터 일렁인다.

아직 형태가 불분명하지만,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대체 이 감정은 뭘까?’

밤새 뒤척이는 동안 낯선 감정이 자꾸만 뒷덜미를 잡아챘다.

불안과도 닮았고 나른하게 들뜬 감정과도 비슷했지만, 뭐라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감정들이 정체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형체도 없이 바스러지는 느낌이었다.

실망인 건가.

그래, 이건 분명 기대했던 뭔가가 어그러진 데서 오는 아쉬움이었다.

기대에서 오는 실망이라니.

‘설마, 내가 기대라는 걸 했던 건가?’

그렇다면 대체 뭘 기대 한 걸까?

「줄게. 네가 원할 때마다. 계약과는 상관없이.」

로엔은 낮게 속삭이던 그의 목소리를 외면하려는 듯 고갤 가로저었다.

위험하다.

진 로이슈덴은 칼라일의 레이디들뿐만 아니라, 이제 그녀에게도 위협적인 존재다.

그에게 현혹되면, 끝이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그에게 빠져 록스버그의 저주는 물론 그녀의 목숨까지도 바칠 판이었다.

사랑에 빠진 어리석은 연인들처럼.

‘한심해. 남자 하나에 이렇게 흔들리다니.’

로엔은 혼란스러운 감정을 재빨리 갈무리했다.

감정적 사치는 그녀에겐 무용하다. 더는 그녀를 흔들지 못하게, 작은 싹부터 냉정하게 끊어 내는 게 맞았다.

똑똑!

“주인님, 세실이에요. 일어나셨어요?”

다행히 세실의 등장으로 로엔은 머릿속에 들끓던 상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응, 들어와.”

한결 가벼운 목소리였다.

방으로 들어오던 세실이 세수까지 끝마친 로엔을 발견하곤 눈을 크게 떴다.

“벌써 일어나신 거예요?”

“상점에 일찍 나가 봐야 하잖아. 지난번에 실수로 만들지 못했던 묘약도 만들어야 하고.”

“그렇긴 하죠. 아 참, 오늘 오후의 티타임이 있는 건 아시죠?”

“응, 알고 있어.”

드레스 룸으로 향하는 로엔의 뒤를 따르며 세실이 중요한 일과를 읊기 시작했다.

“내일은 폐하께서 주최하시는 경마 시합에 참석하셔야 하고요.”

“오늘은 정신없이 바쁘겠네.”

“네. 하루 종일 묘약을 만드느라 정신도 없을 테고요. 그나저나 어제 로이슈덴 공작가에 갔었던 일은 잘되셨어요? 공작님께 책을 가져다 드린다고 하셨잖아요. 마음에 들어 하시긴 했고요?”

로엔이 옷을 갈아입다 말곤, 거울을 통해 세실을 보았다.

세실에겐 진이 티타임에 초대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가 주문한 책이 도착해 가져다주는 걸로 대충 얼버무린 것이다.

세실에게 왜 그런 사소한 거짓말을 한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오히려 지금은 다행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 쪽으로 눈치가 빠른 세실이 제 이상한 태도를 눈치채고 추궁이라도 하면, 쓸데없는 것까지 말해 버릴 것 같아서다.

“좋아하셨어. 하지만 내 생각과는 달리 라딘의 서의 원본에 대한 정보는 갖고 있지 않는 눈치였어. 대신 내일 있을 경마 시합에 로이슈덴 가문의 말이 참가한다는 정보는 얻었지. 그리고 난 그 말에게 돈을 걸 생각이고.”

“경마 시합에 로이슈덴 가문의 말도 참가한대요?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드레스의 단추를 잠가 주던 세실이 의아한 듯 물었다.

“폐하께서 직접 요청한 모양이야. 그리고 이따금 명문가에서 제 말들을 자랑할 목적으로 가문 소속의 말을 경마 시합에 참가시키기도 하니까, 그리 특이한 일은 아니지.”

“아, 그렇기도 하는 모양이네요.”

“응. 알렉의 말을 들어 보니, 폐하께서 로이슈덴 공작가의 마구간을 몹시도 탐내는 모양이야. 시합에 출전한 적도 없는 경험 없는 말을 바로 경주에 내보내라고 명할 걸 보면 빌미를 만들려는 것 같거든.”

“음흉한 속셈이 있다는 건가요?”

“경마 시합에서 우승한 말은 황제 폐하의 권한으로 소유할 특권을 갖게 되거든. 장담컨대, 내일 경기에 출전할 로이슈덴 공작가의 말이 시합에서 우승할 거야.”

로엔은 유리엘라 광장에서 진이 탔던 말을 떠올렸다.

햇빛을 받아 윤기가 흐르는 검을 갈기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특히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성이 그대로 살아 있는 검은 눈동자가 제 주인인 진 로이슈덴 공작과 닮아 있었다.

황제인 에드윈이 왜 그렇게 로이슈덴 가문의 말을 갖고 싶어 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 말에 난 내기 돈을 올인할 생각이야.”

“당장 집사님에게 말해 놓아야겠네요. 은행에서 미리 어음을 발행해 놓으라고요.”

“아니, 어음보단 호리우스의 눈이 좋겠어.”

“호리우스의 눈이요?”

“응. 내가 내일 그곳에서 아주 대놓고 록스버그 가문의 재력을 자랑할 생각이거든.”

로엔이 드레스 자락을 정리하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세실 역시 덩달아 긴장한 듯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니까 이게 소위 말하는 돈지랄인 거죠? 귀족들의 콧대는 물론, 기를 팍 죽이는.”

“맞아. 그러니 확실하게 준비하라고 해. 그 누구도 록스버그 가문의 재력 앞에서 날 깔볼 수 없도록.”

캠벨 후작가의 파티를 통해 최근 귀족들의 태도가 조금씩 바뀌고 있음을 느꼈다.

아마 그레이트 모먼트의 특별판이 일으킨 여론이 한몫한 덕분도 있었지만, 로이슈덴 공작이 사교계의 꽃인 캐서린 대신 괴물 공작에게 호의를 보인 사건 때문이었다.

누구 덕분이든 로엔은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뭐, 어찌 되었든 로엔의 최종 계획은 살벌한 사교계에서 살아남아, 진 로이슈덴 공작과 결혼하는 것이었다.

가장 어마어마한 정략혼이 되겠지만.

* * *

오후의 티타임이 시작되는 4시가 가까워지자, 칼라일의 중심가에 위치한 시모네타의 만물상점 앞에 화려하게 꾸민 마차들이 속속 도착했다.

“어머, 저건 캔싱턴 백작가의 문장 아닌가요?”

미리 상점에 도착해 있던 레이디들이 문 앞에 도착한 마차를 보곤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게요. 참 신기하네요. 레이디 캐서린은 절대 이런 곳엔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묘약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될 정도로 고매하시잖아요.”

악의적인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마 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나 보죠. 예를 들면, 누군가에게 대차게 거절을 당했거나.”

비웃음 섞인 농담에 레이디들이 또다시 웃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창문 밖으로 캐서린과 함께 제인이 내리는 걸 보며 한 레이디가 검지를 입으로 가져갔다.

“쉿!”

그것이 신호가 되어, 지금까지 캐서린을 비웃던 레이디들의 얼굴이 가면을 쓴 듯 바뀌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실은 고갤 절레절레 흔들며 로엔이 있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정말 꼴불견이라니까요. 손님만 아니면 당장 내쫓고 싶을 만큼요.”

세실이 투덜거리자, 서류를 살피던 로엔이 고갤 들었다.

“또 무슨 일인데? 누가 내 흉이라도 봤어?”

“아니요. 그건 아닌데, 레이디 캐서린이요. 신문 가십난에 난 그 레이디요.”

“레이디 캐서런이 왜?”

“지금 여기에 왔거든요. 오후의 티타임에 참석할 모양인지, 레이디 제인과 함께 왔더라고요.”

“두 사람이 여기에 왔다고?”

로엔은 의외라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세실을 통해 가끔 제인이 오후의 티타임에 참석한다는 얘긴 들었다.

사교계의 종달새라고 알려진 제인이 귀족들의 스캔들과 소문들을 입 싸게 가져다 나른다는 말도 그래서 알게 되었다.

하지만 직접 본 건 캠벨 후작가에서가 처음이었다.

시모네타의 만물상점에서 운영하는 오후의 티타임은 상점에서 출시된 새로운 물품들과 타란 대륙 각지에서 들어온 물건들을 선보이는 자리라, 로엔이 아니라 세실이 호스트였기 때문이다.

“네. 그레이트 모먼트에 실렸던 가십 때문인 모양이에요. 로이슈덴 공작님에게 거절당했으니 뭐라도 해야 하잖아요. 묘약을 받아 가려는 의도인 거죠. 쳇, 마음에 안 들어.”

세실이 조금 전 레이디들이 했던 말을 로엔에게 그대로 전했다.

“정말 묘약이라도 사러 왔다는 거야?”

“그렇지 않고선 이곳에 올 이유가 없잖아요.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 상점을 찾는 이유가 다 묘약 때문이긴 하죠. 장담컨대, 오늘 온 레이디들 중 대부분이 로이슈덴 공작님을 남편감으로 찍었을걸요?”

“뭐, 그거야 그렇지. 워낙에 신비주의인 데다, 매력적인 분이시니까.”

농담하듯 가볍게 대꾸하자 세실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농담할 때예요? 그러지 말고 오늘은 주인님도 티타임에 함께 들어가시는 건 어때요? 사실 레이디들이 주인님을 티타임에서 직접 뵙고 싶어 하거든요.”

“왜? 참석해서 내가 레이디들의 콧대를 꺾어 줬으면 하는 거야? 내 것이니까 넘볼 생각 말라고?”

“네. 제발 그렇게 해 주세요.”

장난삼아 한 말인데, 세실이 열렬히 반응하자 괜스레 멋쩍어졌다.

“귀찮아. 마녀의 사술 운운하며, 특별한 마법 약을 만들어 달라고 조르는 것도 질색이고. 너도 알고 있지? 내가 마녀들의 후손이라고 소문이 났다는 것 말이야.”

로엔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무엇보다 캠벨 후작가에서 반쪽이긴 하지만 제 얼굴을 캐서린과 제인이 보았다.

만에 하나, 비슷한 점이라도 발견한다면 지금껏 지켜 온 비밀이 탄로 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적을 알아야 이기는 법도 알죠. 제 촉으론 레이디 캐서린이야말로 주인님의 강력한 라이벌이 될 것 같거든요.”

관심 없다고 말하려다, 로엔은 생각을 바꿨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캐서린이 만물상점을 찾아왔는지 궁금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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