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로이슈덴 공작가의 만찬장에 불이 꺼졌다.
손님들이 돌아간 로이슈덴 공작가엔 다시 고요가 찾아들었다.
근 20년 만이었다.
아쉽게도 저녁 만찬에 초대되었던 로엔은 약속이 있어 참석하지 못했지만, 라우렐 데칸과 세이지가 자릴 메워 그나마 다행이었다.
“오늘 정말 즐겁지 않나요, 집사님? 티타임도 다시 열고, 저녁 만찬까지 준비하다니.”
하루 종일 바쁘게 뛰어다니던 하녀장 메리언은 힘들지도 않은지 연신 들뜬 모습이었다.
“하지만 시모네타 님이 참석하지 못한 건 아쉬웠어요. 다음엔 꼭 참석하셨으면 좋겠어요.”
테이블을 치우며 메리언은 아쉬움을 표했다. 그러나 여전히 기분이 좋은 모양인지 콧노래까지 불렀다.
하지만 만찬 내내 불을 밝히던 화려한 촛대의 불을 끄고 있는 집사인 알렉은 어두운 표정이었다.
“집사님, 무슨 일 있으세요? 혹시 경마 시합에 내보낼 말들의 상태가 별로인 건가요?”
로엔이 돌아간 후 유독 말이 없어진 알렉이 이상했는지, 결국 메리언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건 문제없이 준비 중이니 걱정할 것 없어.”
“그럼 왜 그렇게 어두운 표정이신데요?”
모든 게 순조로웠다. 5년 동안 전쟁터에 있었던 주인이 돌아왔고, 손님들도 저택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이제 머지않아 로이슈덴 공작가의 연회장에도 불이 켜질 것을 생각하자 가슴이 벅차기까지 했다.
그런데 집사인 알렉이 재라도 뿌리는 얼굴로 울상이라, 속이 상했다.
“휴우.”
알렉은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며 메리언을 보았다. 그리고 아주 잠깐 고민했다.
제 주인과 상점을 운영하는 여인 사이에 감돌던 묘한 분위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어서다.
“메리언, 만약에 말이야. 신분에 맞지 않는 사람들이 연정을 품게 되면, 그러니까,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람들이 서로 좋아하게 되면…….”
“당연히 비극이 일어나지 않겠어요? 특히 신분 차이는 아드리안 제국에선 국법으로 다스려지는 중죄잖요.”
메리언이 아직도 그걸 모르고 있었냐는 듯 혀를 찼다.
“설마하니 집사님이 돈 많은 미망인에게 혹했을 리 없고. 누군데요? 그런 미치고 팔짝 뛸, 불행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하아, 알렉은 한숨만 내쉴 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미치고 팔짝 뛸 일을 벌일지도 모르는 사람이 제 주인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면, 메리언 역시 더는 한심한 표정을 짓지 못할 터였다.
이를 어쩐다?
분명 진이 로엔의 손목을 잡아끌며 도서관으로 향하던 모습은 딱 정분나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둔한 그 역시도 눈치챌 정도였다.
아니, 그것보다 냉정하고 잔혹한 제 주인의 성격을 너무도 잘 알아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혹시 세이지 님이신가요?”
갑자기 툭 튀어나온 이름에 알렉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태도를 오해한 메리언이 한숨을 내쉬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어쩐지. 이상하다고 했어요. 오후 내내 부엌에서 차를 마시면서 자꾸 이상한 걸 물을 때부터 딱 하고 감이 왔다니까요.”
“이상한 걸 물었다고? 그게 뭔데?”
“뭐긴요? 연애 문제죠. 말 들어 보니까, 세이지 님이 그 레이디에게 홀딱 빠진 눈치더라니까요. 세상에, 말 좀 섞고 조금 쳐다봤다고 옆에 있던 남자를 쫓아냈다고 하면 말 다 한 거죠.”
“말 다 하긴, 뭘 다 했다는 건지 모르겠군.”
“아휴, 정말 답답해서는. 이러니까 남자들이 여자들의 마음을 모른다고 구박을 받는 거라니까요. 그게 뭐겠어요? 질투지.”
메리언이 한숨까지 내쉬며 답을 입안으로 떠먹여 줬다.
그러고 보면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질투가 심하다며 구시렁거리기까지 한다.
그 말에 알렉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메리언에게 확인 사살까지 받으니, 이젠 제 주인인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고 말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국법에 중죄라니.
이제 제 주인이 죄인이 되어 감옥에 가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하아, 이를 어쩐담?”
“어쩌긴 뭘 어째요? 마음이 더 커지기 전에 포기해야죠. 다 버리고 도망칠 용기가 있다면 모를까, 아드리안에선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뭐, 조금 로맨틱하긴 하네요. 세이지 님 같은 분이 금단의 사랑에 빠지다니. 그렇게 안 봤는데.”
남의 속도 모르고 즐거워하는 메리언을 보며, 알렉은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결국 벙어리 냉가슴 앓듯 털어놓지 못하는 답답함에 알렉은 만찬장을 나왔다.
제 주인에게 넌지시 암시라도 줘야 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메리언이 그를 뒤쫓아오며 행선지를 묻는다.
“어딜 가는데요? 설마 세이지 님에게 조금 전 얘길 하려는 건 아니죠?”
“하면 안 될까? 미리 경고라도 해 드려야 마음을 접을 것 아니야.”
“쯧쯧,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당연히 안 되죠.”
“…….”
알렉이 또다시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메리언이 한심한 듯 바라보았다.
“원래 남이 말리면 더 불타오르는 게 사랑이에요. 물에 기름을 들이붓는 격이란 말이 딱 이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니, 세이지 님 앞에서 입도 뻥긋 마세요. 제풀에 알아서 나가떨어질 때까지요.”
메리언은 으름장을 놓듯 경고를 한 뒤, 서둘러 부엌으로 가 버렸다.
혼자 남겨진 알렉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하필 처음으로 마음을 주신 분이 귀족 가문의 레이디가 아니라 상인이라니.’
알렉은 너무도 안타까웠다.
다섯 살 어린 나이에 겪은 비극도 서러운데, 첫정마저…….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제 마음이 더 서러웠다.
알렉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는 목을 가다듬었다.
중죄면 어떻고, 범죄자면 어떠랴?
만약 로엔이 제 주인이 감추고 있는 엄청난 비밀까지 다 알고 난 후에도 같은 마음이라면, 알렉은 무슨 일이 있어도 두 사람을 지킬 생각이었다.
200년 동안 몸담아 온 로이슈덴 공작가 역시도.
“시모네타 님에 대해 좀 더 알아봐야겠어. 이번엔 주변 인물들까지 철저하게.”
알렉은 처음으로 로이슈덴 공작가가 가진 정보력을 움직여야겠다고 결심하며, 제 주인이 있는 서재로 향했다.
* * *
이른 새벽, 잠에서 깬 로엔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계를 확인하니 6시가 조금 안 되는 시간이었다.
결국 자릴 털고 일어나 가운을 몸에 걸쳤다.
밤새 잠을 설쳤더니 머리가 멍했다. 차라도 마셔야 할 것 같았다.
침대 옆에 설치된, 하녀 호출용 줄을 당기려다 그만뒀다. 마음이 심란한 상태에서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하기 싫어서였다.
“하아.”
또다시 땅이 꺼져라 한숨이 새어 나왔다.
“미치겠네.”
어제 오후 로이슈덴 공작가의 도서관에서 치료를 가장한 키스를 한 뒤, 그를 그곳에 남겨 둔 채 도망치듯 뛰쳐나왔다.
미로 같은 복도를 지나 현관을 나설 때 알렉을 본 것도 같았지만, 멈춰서 인사를 건넬 정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눈치 빠른 집사가 제 얼굴을 봤다면, 도서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치챌 게 뻔했다.
유능한 집사답게 모르는 척했겠지만.
“침착하게 행동했어야 했는데. 왜 그렇게 숙맥처럼 당황한 건지.”
뻔뻔하게 굴었어야 했다.
언제나 그렇듯 감정 따위 무표정한 가면에 숨기고 냉정하게 행동했어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어젠 그게 되지 않았다.
세이지가 티룸에서 고양이에 대해 언급한 순간부터 이성적인 사고가 되지 않았다.
특히 자꾸만 제 시선을 피하던 진을 마주한 순간 온몸이 홧홧했다.
결국 불편한 마음은 세이지를 티룸에서 쫓아낸 뒤, 함께 라딘의 서를 보던 순간에 최고치를 찍었다.
팔이 미세하게 스치고, 손끝이 닿는 순간 눈이 마주쳤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선 로엔은 저녁 만찬을 거절하고 티룸을 나와야 했다.
그때까진 괜찮았다. 조금 어색하고 난처한 기분이 들었을 뿐, 금방 털어 낼 수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진이 따라 나오기 전까진.
‘못 들은 척하고 마차를 타고 떠났어야 했어.’
그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제 이성이 위험하다고 신호를 보내던 그 순간 바로 저택을 떠났어야 했다.
아니면 대가를 주겠다며 그가 제 손목을 붙잡았던 그때 거절했어야 했다.
그것이 위험에서 벗어날 두 번째 기회였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
다음에 만났을 때, 그때 달라고 단호하게 말했어야 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의 손에 이끌려 로이슈덴 공작가의 도서관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그가 입술을 겹쳐 왔다. ‘네게 가장 필요한 걸 주겠다.’면서. 몸속에 흐르는 맹독을 정화해 주는 최고의 치료제라는 이유를 들어.
그러나 그건 분명 치료가 아니었다. 입술이 맞닿은 순간, 지금까지와는 다른 의미로 머릿속이 텅 빈 듯 하얗게 변했으니까.
“하아, 미쳤어. 그를 밀어내기는커녕 눈까지 감다니.”
로엔은 그 순간을 떠올리며 마른세수를 했다.
손바닥에 닿는 뺨이 아직도 열기로 뜨겁다.
입술의 감촉도, 짙게 뿜어져 나오던 청량한 나무 향도.
아직 그의 향기가 코끝에 맴도는 듯하다.
로엔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리곤 열기를 지우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차가운 물에 세수를 하자, 뜨겁게 달아올랐던 열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심장에서부터 들끓던 열이 가라앉자, 머릿속 역시 조금씩 냉정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곤 로이슈덴 공작가에서의 진의 반응과 행동을 하나하나 곱씹기 시작했다.
세이지의 등장과 함께 날이 섰던 진의 반응하며, 맹독을 정화시켜 주겠다는 명목으로 했던 입맞춤까지.
평소와 달랐던 그의 행동들 하나하나가 모두 질투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말도 안 돼. 설마 그가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