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대체 내가 왜 이러는 건지.”
복도를 따라 걷는 발길이 급했다. 마음 역시도 발걸음만큼이나 조급하다.
머뭇거리는 사이 로엔을 태운 마차가 출발하기라도 했다면…….
그 생각이 든 순간 조급증이 밀려와 뛰기 시작했다.
다급한 발소리가 복도를 울렸고, 뒤이어 벌컥 문이 열렸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다행히 마차에 오르기 직전의 로엔이 보였다.
“잠깐 기다려.”
생각을 고를 시간도 없이,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급작스러운 진의 목소리에 마차에 오르려던 로엔이 무슨 일이냐는 듯 돌아섰다.
그 순간 진은 주위의 모든 소음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그리곤 홀린 듯 로엔을 바라보았다.
오후의 햇살을 후광처럼 받고 서 있는 로엔은 절로 숨을 삼킬 만큼 아름다웠다.
갈증이 났다. 조금 전까지 차를 마셨는데도, 열이 오른 듯 입안이 바짝 말랐다.
“공작님?”
그 모습이 이상했는지, 로엔의 긴 속눈썹이 빠르게 깜짝였다.
단 세 걸음 안에 그녀가 있다.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거리에.
그런데 움직일 수가 없다. 결계에 발이 묶인 듯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시간의 흐름이 멈춘 것처럼, 모든 게 느리게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윽, 또다. 심장 부근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간질거렸다. 확인하지 않아도, 얼마 전 새로 돋아나기 시작한 드래건의 비늘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요즘 들어 이상했다.
5년 전 드래건의 비늘이 돋아나기 시작한 이후, 지독한 고통 외에 다른 게 느껴졌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찾아드는 이유 없는 갈증에 목이 탔다.
진은 혼란스러웠다.
제가 로엔에게 느끼는 감정이 동료애와는 다르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렇다면 대체 뭘까?
이 혼란스럽고 복잡한 느낌은. 단순히 욕망인 건가?
아니면…… 다른 어떤 것?
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으로썬 뭐라 꼬집어 명확히 말할 수 없어서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렇게 돌려보내고 싶지 않아.’
밀려드는 강렬한 감각이 순식간에 그를 집어삼켰다.
“공작님?”
결국 참다못한 로엔이 그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공작님, 하실 말씀이라도…….”
로엔이 손을 뻗어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고, 그 순간 그를 묶고 있던 결계가 풀리듯 진이 로엔의 손목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 절박하게.
“어엇!”
놀라 커진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진을 향했다.
“공작님?”
숨을 삼키듯 속삭이는 목소리가 진의 귓가를 간질였다.
“…….”
하지만 진은 입을 꾹 다문 채, 로엔을 바라볼 뿐이다.
이제 당황한 사람은 로엔이었다.
그의 은청색의 눈동자가 집요하게 제 얼굴에 닿아 있었다.
그에게 붙잡힌 손목 역시 불에 덴 듯 뜨겁다.
당장 도망치고 싶었다.
손이 붙잡힌 것뿐인데, 더 거대한 뭔가에 사로잡힌 기분이었다.
그래서인지 고갤 돌릴 수가 없었다.
위험을 감지한 초식동물처럼, 시선을 피한다면 맹수의 날카로운 이가 제 목을 단박에 물어뜯을 것 같았다.
‘무서워. 도망쳐야 할 것 같아.’
숨 막히는 긴장감이 사슬처럼 두 사람을 얽었다.
“아직 주지 않은 것 같아서.”
진이 어렵사리 꺼낸 말을, 로엔은 이해하지 못했다.
“네? 뭘……?”
“찻잎점에 대한 대가. 그걸 주기로 약속한 것 같아서.”
“아, 그렇죠. 기억나요.”
그제야 진이 왜 저를 불러 세웠는지 깨달았다.
찻잎점의 점괘에 대한 대가를 줄 모양이었다.
“따라와.”
“네?”
“지금 주겠다.”
진이 로엔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어딜 가시는 거죠? 여기서 주시면 안 되는 건가요?”
앞장서던 진이 걸음을 멈추곤 로엔을 돌아보았다.
“난 아무 데나 상관없는데, 넌 아닐 것 같아서. 그러니 따라오는 게 좋을 거야.”
대놓고 따라오라고 하는 걸로 봐서 협박……인 건가?
로엔은 잠시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대가를 준다고 했는데…….
‘대체 뭘 주려고 이러는 거지?’
사람 불안하게.
로엔이 습관적으로 입술을 감쳐물고는 잘근잘근 씹었다. 생각을 할 때 나오는 습관이었다.
“또 그러는군. 습관인 건가?”
눈살을 찌푸리며 툭 던진 말이 불퉁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아 있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로엔은 감쳐물었던 입술을 놓았다.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입술을 괴롭히는 제 습관이 화를 낼 만큼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이래선 ‘여기서도 괜찮다.’는 말을 섣불리 할 수조차 없었다.
“따라갈 테니, 손 좀…….”
그에게 붙잡힌 손목만이라도 빼려 하자,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 진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하는 수 없이 로엔은 그에게 손목을 붙잡힌 채 그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현관 앞에서 놀란 표정으로 서 있는 알렉과 눈이 마주쳤다.
아아, 민망했다.
진에게 손목을 붙잡혔다는 사실이 더 의식됐다.
알렉의 시선에 귓불이 뜨거워졌다. 마치 보이고 싶지 않은 뭔가를 들킨 양.
대체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 알 수도 없었다.
그때, 알렉이 입술을 움직여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로엔은 모르겠다는 듯 고갤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다.
진 역시도 알렉을 보았을 텐데도, 일언반구도 없이 그를 지나친다.
구불구불하게 연결된 저택의 복도를 지나 한참을 간 후에야 진이 걸음을 멈췄다.
“공작님, 이제 손을…….”
놓아 달라고 말했지만, 진은 로엔의 손을 놓는 대신 육중한 마호가니로 된 문을 밀었다.
끼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진을 따라 안으로 들어선 순간 로엔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도착한 곳은 뜻밖에도 로이슈덴 공작 소유의 도서관이었다.
‘나에게 책을 보여 주려던 거였나? 아니면, 선물로 주시려고?’
생각해 보니, 로엔 역시도 티타임에 초대해 준 답례로 ‘라딘의 서’를 가져왔었다.
분명 진은 그녀가 책에 흥미를 갖고 있다는 걸 알았을 테니, 찻잎점의 대가로 책을 주려는 모양이었다.
그제야 긴장으로 굳어졌던 로엔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여기가 로이슈덴 공작가의 비밀 도서관인 모양이네요. 혹시 공작님도 알고 계시나요? 200년 전 라딘의 예언이 적힌 원본이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는 걸요.”
도서관을 살펴볼 생각에 벌써부터 흥분이 됐다.
그래서 로엔은 그가 뿜어내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읽어 내지 못했다.
“사실 저는 그 예언서를 찾고 있었어요. 존더부르크 1세가 불태웠다던 그 책이요. 뭔가 비밀이 잔뜩 숨겨져 있을 것 같거든요. 하지만 아쉽게도 몇 가지 단서를 찾지 못……. 어엇!”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로엔의 등이 차갑고 딱딱한 벽에 닿았다.
그제야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 벽과 진 사이에 끼어 옴짝달싹못한 상태가 된 걸 알았다.
당황한 로엔이 고갤 들었다.
하지만 곧 후회했다. 깊은 심해와 같은 진의 은청색의 눈동자가 그녀를 담고 있어서다.
두근.
심장이 무섭게 뛰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시선이, 그가 뿜어내는 분위기가, 자꾸만 생각해 선 안 될 한 가지를 떠올리게 했다.
입……맞춤.
미, 미쳤다. 절대 그럴 리…….
그녀는 당혹감을 감추곤, 재빨리 진을 불렀다.
“공작님?”
미동도 않는 그를 당장 밀어내야 했다. 그런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꼼짝도 할 수 없다.
로엔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사로잡힌다는 뜻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위험했다.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고 이성이 자꾸만 경고한다.
“네 몸속의 맹독을 정화해 주겠다.”
“…….”
뭐, 지금 뭐라는 거지?
“내 체액이 네 몸속의 맹독을 해독시켜 준다고 했으니까.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그에게 시선을 붙잡힌 채 귓가에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심장 부근이 못 견디게 간지럽다.
그가 숨을 쉴 때마다 뺨에, 입가에 닿는 숨결 역시 뜨겁다.
훅 끼쳐든 청량한 나무 향에 로엔은 마른침을 삼켰다.
“어, 그럴 필요까진…….”
“점을 봤으니 대가를 지불해야지. 그리고 그 대가는 네게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이 좋을 테고.”
그래서 어렵사리 결정했노라고, 그러니 거절할 생각 말라는 것 같았다.
아니, 그것보다 최고의 해독제를 선물로 줄 테니 고마워하라는 말처럼 들렸다.
조금 황당했다.
이건 뭐, 잘하면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아니, 이게 아니지.
불여우, 아니 여우보다 더 무서운 늑대에게 홀려 잠시 나갔던 이성이 되돌아왔다.
로엔이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가 기다렸다는 듯 고갤 숙여 왔다.
“흣―!”
숨이 멋대로 삼켜졌다.
로엔의 코끝을 스치며 비스듬히 기울어진 그의 콧날이 눈에 들어온 순간, 입술에 부드럽고 말캉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가 입을 맞춘 것이다.
순식간에 두 사람을 감싸고 있던 공기가 그대로 멈췄다.
도서관 안을 부유하는 오래된 책 냄새며, 유리창으로 들어온 햇살이 그의 등 뒤에서 부서진다.
드레스 자락을 질끈 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숨을 쉬어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의 입술이 떨어졌다.
안도하며 거친 숨을 몰아쉰 찰나.
“이제 됐…… 흡!”
뒷말이 그의 입술에 다시 삼켜졌다. 이번엔 지그시 누르며 닿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뜨겁고 농밀한 열기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심장이 무섭게 뛴다. 타는 듯한 갈증에 숨이 막혔다.
로엔은 해갈을 바라는 사막의 모래처럼 입 안쪽으로 스며드는 숨결을 꿀꺽 삼켰다.
‘미쳤어. 내가 지금 뭘…….’
당혹감에 깜빡이는 눈꺼풀이 위험스럽게 팔딱였다.
에메랄드빛 눈동자 역시 혼란스러움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었다.
그때 진의 턱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더니, 마치 하나인 것처럼 깊숙이 맞물렸다.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고요히 내려앉았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거센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려왔다.
로엔은 깨달았다.
이건 치료가 아니었다. 바보라도 알 수 있을 만큼, 그의 행위엔 다른 감정이 실려 있었다.
호감. 그리고 지독한 소유욕.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는 로엔에게 소유욕을 드러내며 표식을 새기고 있었다.
맹수가 제 암컷하게 하듯.
그 의미를 뚜렷이 했다.
“줄게. 네가 원할 때마다. 계약과는 상관없이.”
살짝 겹쳐진 입술 새로 그의 숨결이 심장을 간질였다.
로엔이 고갤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나른하게 얽혔다.
“왜……?”
“찻잎점에 대한 내 보답이다.”
그는 의미 없이 본 찻잎점의 대가로 그의 입술을 허락했다.
과분한 대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