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아직 오해가 풀리지 않은 건가?’
괜스레 초조해졌다.
“그럼 저는 주방에 가 보겠습니다. 인원이 늘었다는 걸 제레미에게 말해 줘야 할 것 같아서요.”
숨이 막힐 것 같은 방의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제일 먼저 자릴 피한 건, 메리언이었다.
진은 목이 타는 듯 찻잔을 집어 들었다.
“어, 차가 식었는데…….”
로엔이 제지했지만, 진은 개의치 않는 듯 단숨에 마셨다.
그리곤 아직 갈증이 가시지 않는지 목까지 단정하게 채웠던 셔츠의 단추를 풀기까지 했다.
묘한 정적과 함께 방 안의 공기가 더 차갑게 가라앉았다.
“나도 목이 타네.”
세이지가 로엔 쪽과 가깝게 자릴 잡고 앉았다.
“세이지 님, 제가 차를 따라 드릴게요.”
마침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메리언이 가져온 트레이에서 티포트를 집어 들었다.
그리곤 세이지 앞에다 찻잔을 세팅한 뒤, 천천히 차를 따랐다.
“잘 마실게요, 시모네타 님.”
지금껏 님 자만 붙였지 반말 일색이던 세이지가 처음으로 정중하게 말했다.
그도 눈치가 있으니, 서슬 퍼런 진의 눈치를 살피며 꼬리를 내리는 듯했다.
‘미친개도 제 주인 눈치를 보는 마당에, 나도 조심해야겠어.’
그런 생각이 들자 난데없이 입꼬리가 미세하게 경련을 하며 말려 올라갈 것 같았다.
미친개라는 말이 세이지와 너무 잘 어울려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미쳤어. 제발! 웃지 마. 웃으면 안 돼.
“너, 저리 가.”
“네?”
로엔과 세이지가 동시에 고갤 들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진의 서늘한 눈빛이 향한 곳은 세이지였다.
찻잔을 들어 올리던 세이지 역시 놀란 듯 진을 보고 있었다.
“시끄러우니까 저쪽으로 가라고. 멀찍이 떨어져 앉아.”
세이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찻잔까지 들고 얌전히 자릴 옮겼다.
“여기면……?”
“더. 얼굴 보이지 않게 구석으로 가.”
어이없는 명령임에도 불구하고, 세이지는 구시렁거리며 진의 명령대로 구석으로 향했다.
그것도 두 사람과 가장 멀리 떨어진 테이블에 휴지처럼 구겨져 앉았다.
침울한 그 모습이 주인에게 버려진 개 같아, 불쌍해 보였다.
로엔은 난처했다. 그러지 말라고 진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했다간 더 큰 불똥이 튈 것 같았다.
“차 좀 더 드시겠어요, 공작님?”
“…….”
로엔의 권유에 진은 심통 난 아이처럼 로엔을 노려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거절하지 않은 걸 긍정으로 받아들인 로엔은 눈치 빠르게 진의 찻잔을 채웠다.
“제가 라딘의 서를 가져왔다고 했잖아요. 지금 저랑 함께 보실래요?”
로엔이 옆에 놓여 있던 라딘의 서를 꺼내, 두 사람 사이의 빈 공간에 펼쳤다.
“어, 너무 멀어서 자세히 볼 수가 없네요. 자릴 좀 옮길게요.”
로엔이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전 세이지가 앉았던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진과의 거리가 눈에 띄게 가까워졌다. 조금만 몸을 기울이면 서로의 팔이 닿을 거리였다.
“제가 재미있는 것 보여 드릴게요. 여기요. 여기 보시면, 라딘의 제자였던 타에라의 상징인 그믐달이 찍혀 있어요.”
로엔이 손끝으로 검은색의 손톱 달을 가리켰고, 진은 그것을 자세히 보기 위해 몸을 기울였다.
순간 두 사람의 팔이 슬쩍 닿았다. 그 찰나에 뜨거운 열감이 온몸으로 퍼지자, 두 사람은 재빨리 몸을 바로 했다.
“어, 죄송해요.”
로엔이 재빨리 사과했다. 그리곤 더 화를 내지 않을까 걱정하며 진의 안색을 살폈다.
뭐, 뭐야? 분명 조금 전까진 무섭게 화를 내더니.
지금은…….
진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려 있다. 화가 난 듯 치켜 올라갔던 눈썹도 제자리를 찾았고, 굳어 있던 입매 역시 내려와 있었다.
세이지가 오기 전, 그녀와 얘길 나눌 때처럼.
다행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화가 누그러진 모양이다.
“나 차를 더 마셨으면 좋겠는데?”
불쑥 끼어든 세이지의 목소리와 함께 구석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식간에 진의 표정이 무섭게 찌푸려졌다. 그리곤 세이지를 향해 날카롭게 명령했다.
“당장 꺼져. 차를 마시려면, 주방으로 가.”
또다시 찬물을 끼얹은 듯 방 안에 냉기가 가득했다.
이로써, 진을 화나게 한 원인이 세이지란 걸 알 수 있었다.
결국 세이지가 한숨을 내쉬며 불퉁하게 말했다.
“치사하게. 알았다고요. 더는 방해 하지 않을 테니 잘해 보시든가요.”
세이지가 찻잔을 들고 문으로 향했다. 그러다 뭔가 생각 난 듯 걸음을 멈췄다.
“아, 참! 라우렐이 그러던데, 대장이 고양이를 키운다면서요? 그런데 그 고양이는 어디에 있어요?”
“그게 무슨 소리지?”
“고양이요. 말하는 고양이를 키운다고 하던데? 그리고 그 고양이가 대장에게 그랬다면서요. 페로몬 덩어리에다, 여인을 홀라당 잡아먹을 만큼 위험하다고.”
“대체 무슨 헛소릴 하는 거야! 당장 꺼져!”
진이 평정심을 잃고 버럭 소리치자, 세이지의 입가에 장난스런 미소가 걸렸다.
“알았다고요. 알았어.”
세이지가 진이 부서뜨릴 듯 잡고 있는 찻잔을 보고는, 제발 던지지 말라는 양 손을 내보이며 도망치듯 티룸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잔을 꽉 잡고 있던 진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두 사람만 남겨진 티룸 안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누구 하나 먼저 말을 꺼내는 사람 없이 두 사람은 침묵 속에 차를 마셨다.
홀짝, 호로록. 소리만이 가득했다.
두 사람의 시선은 자꾸 어색한 듯 어긋났고, 팽팽하게 날 선 긴장감 속에 봄바람을 실은 숲의 향기처럼 나른함이 섞여 들었다.
“저기, 공작님. 저는 그만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결국 침묵을 견디다 못한 로엔이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입이 바짝 말라, 혀로 몇 번씩 마른 입술을 축여야 했다.
“왜? 식사를 못 하게 된 이유가 있을 것 아니야.”
“어, 그게, 식사 초대에 들떠서 저녁에 예약이 있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어요. 티타임에만 참석할 생각으로 저녁에 약속을 잡은 거라…….”
사실은 약속이 있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하지만 계속 이런 침묵 속에 저녁까지 먹는다면 숨이 막혀 죽어 버릴 것 같았다.
“약속이 있다니, 어쩔 수 없지. 가는 게 좋겠군.”
진 역시 그게 좋겠다는 듯 에둘러 말했다.
로엔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나오지 않으셔도 돼요. 세이지 님에겐 먼저 가서 미안하다고 전해 주시고요. 메리언과 제레미에게도요.”
세이지란 말에 슬쩍 미간을 찌푸리기도 했지만, 진은 알았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로엔은 재빨리 티룸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어, 알렉이었군요. 마구간에 갔던 일은 벌써 끝난 건가요?”
문을 나서자마자, 복도에서 딱 하고 마주친 알렉을 보며 로엔이 애써 침착한 척 말을 건넸다. 그 기색이 이상했는지, 알렉의 눈이 가늘어진다.
하지만 눈치 빠른 집사답게 서둘러 표정을 갈무리하는 게 보였다.
“네, 시모네타 님. 그런데 어딜 급히 가시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아직 저녁 만찬이 시작되려면 시간이 좀 남은 것 같아서요.”
“어, 그게…….”
대답하는 대신, 티룸 안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진이 흘긋댔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에요. 갑자기 약속이 있었던 게 생각나서 저녁 만찬은 다음에 해야 할 것 같다고, 공작님께도 말씀드렸어요.”
알렉의 시선이 티룸 안의 진 쪽으로 향했다.
“그러셨군요. 공작님, 시모네타 님을 보내 드려도 되겠습니까?”
알렉이 진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로엔은 초조했다. 그가 허락하지 않으면 갈 수 없을 것 같은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래, 보내 줘. 이미 허락한 일이야.”
걱정과는 달리 진의 대답은 선선했다. 로엔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모네타 님,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선 알렉이 허릴 숙여 예를 갖췄다. 로엔은 서둘러 고갤 끄덕이곤, 도망치듯 자릴 떴다.
“혹시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로엔에게 했던 질문을 진에게도 똑같이 했다.
“왜?”
“도착했을 때만 해도 만찬에 초대돼 굉장히 들뜨신 모습이었습니다.”
그사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지 않고선, 갑작스레 저녁 만찬을 취소할 이유가 없어서였다.
알렉이 제 주인의 표정을 살폈다. 모든 일에 무감한 주인이었지만, 티룸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다.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서늘한 분위기는 여전했지만, 뭔가 심기가 뒤틀린 듯 보였다.
‘싸우셨나? 아님 시모네타 님을 협박이라도 한 건가?’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선약이 있었다며 돌아가던 로엔 역시도 화난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진의 눈치를 보던 로엔의 표정엔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게다가 빈 찻잔을 연신 들어 올리는 진의 태도 역시, 조금 넋이 나가 있다고 할까?
싸워서 화가 났다기보단, 좀 더 몽글몽글한…….
“별로. 특별한 건…….”
거기다, 평소와 달리 제 주인은 말끝까지 흐린다.
알렉은 심각한 표정으로 복도에서 마주쳤던 로엔을 떠올렸다.
그녀에게서 답을 찾는 게 더 빠를 것 같아서다.
그러고 보니 풍성한 황금빛 머리카락에 가려졌던 그녀의 새하얗던 귓불이 붉어져 있었던 것도 같았다.
깊고 투명한 에메랄드빛 눈동자 역시 열기로 젖어 있었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사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하기 짝이 없는 제 주인은 로엔이 처음 저택에 방문했을 때부터, 조금 다른 반응을 보였었다.
20년 넘게 굳게 닫혀 있던 로이슈덴 공작가의 문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두드린 방문객이 여자인 것도 의아했지만, 더 놀라운 일은 진이 순순히 그녀의 방문을 허락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진이 로이슈덴이 공작이 된 후 처음으로 오후의 티타임을 비롯해 저녁 만찬에 초대한 사람 역시 로엔이었다.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유독 상인이란 저 여인에게만 쉬웠다.
마치, 특별한…….
‘혹시 시모네타 님을 마음에 두신 건가?’라고 생각한 순간, 얌전히 차를 마시던 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제길!”
거기다 욕설까지 뱉어 내더니, 빠른 걸음으로 티룸을 나오는 게 아닌가?
“공작님, 무슨……?”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제 주인을 불렀다.
하지만 진은 멀뚱히 서 있는 알렉을 그대로 지나쳐 복도를 빠져나갔다.
“대체 무슨 일인 건지?”
알렉은 멍청하게 텅 빈 복도를 바라보며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