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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46화 (47/201)

46화

“왜? 점괘가 나쁘게 나오기라도 했나?”

그 변화를 눈치챈 진이 슬쩍 로엔 쪽으로 몸을 숙여 왔다.

“이런 일이 흔한 건가? 찻잔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 말이야.”

진의 말처럼 찻잔 안에 있어야 할 찻잎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작은 조각 하나 없이, 물로 세척이라도 한 듯 깨끗했다.

“아니요. 저도 이런 적은 처음이라.”

로엔이 어깰 으쓱해 보이곤 찻잔을 바로 했다. 그리곤 당혹감을 감추며 티포트를 들어 잔을 가득 채웠다.

“다시 해 보지 그래?”

“아니요. 미래가 보이지 않을 땐, 그냥 두는 것도 방편이긴 해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로엔이 차를 마시며 진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올라간 입꼬리에 미세하게 경련이 일었다.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찻잔의 손잡이를 잡은 손끝이 떨렸다.

‘미래가 보이지 않아.’

신전이나 점술사의 예언 따위가 아니니 염두에 둘 필요는 없었다.

그저 차를 마시며 재미로 보는 찻잎점일 뿐이었으니까.

그러니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긴장할 건 없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타이밍이 그랬다.

선명할 정도로 확연히 드러난 진의 점괘와 아무것도 없는 제 점괘.

분명 연관되어 있었다.

“대가 말인데, 뭘 주실지 결정하셨나요?”

그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화제를 바꿨다.

“아직 생각 중이다. 네 찻잎점이 나오지 않아 결정을 내리기가 싶지 않군.”

로엔은 고갤 숙이곤 차를 마셨다. 긴장이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그녀는 애써 태연하게 웃으며 고갤 들었다.

“저녁까지 있을 예정이니 천천히 생각하세요. 차를 더 드릴까요?”

어느새 비어 있는 진의 찻잔을 보곤 서둘러 차를 따랐다.

“차가 벌써 식었군. 기다려. 메리언을 부를 테니까.”

진이 유리창 옆에 있는 줄을 잡아당겼다. 이내 평소와 달리 유난히 큰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메리언이 온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뒤를 돌아본 로엔은 눈살을 찌푸렸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메리언이 아니라, 웬 남자였다.

어, 저 사람은……?

랑케에 함께 왔던 세이지였다.

“뭐야, 대장? 내가 방해한 거야?”

황실 근위대 제복을 입은 남자는 문 옆에 삐딱하게 서선, 진과 로엔을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세이지, 무슨 일이지? 근무 시간 아니었나?”

“당연히 근무시간이긴 한데요. 제가 갑자기 복통이 나서, 조퇴했거든요.”

복통이라니.

싱글싱글 웃는 세이지는 아프기는커녕 팔팔할 정도로 건강해 보였다.

“아직 그 버릇 못 고친 모양이군. 꾀병 말이야.”

“꾀병이라니요. 전 아주아주 섬세한 남자라고요.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으면 배가 아파서 흙바닥을 대굴대굴 구를 정도로요. 그러고 보니 사교계의 레이디들도 그런다면서요? 저처럼 예민하고 섬세해서, 툭하면 머리가 아파서 쓰러진다고 라우렐이 그랬어요.”

귀족가의 레이디들도 꾀병을 부리는데, 평민인 제가 꾀병을 부리는 게 뭐가 문제냐는 태도였다.

그리곤 노골적으로 로엔에게 관심을 보이며, 빤히 처다보기까지 한다.

“그런데 대장, 이분은 누구예요? 혹시 대장 애인?”

애인이란 말에 로엔은 진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화를 낼 것 같아서였다.

“뭔가 착각하신 모양이네요. 저는 칼라일의 시가지에서 만물상점을 운영하는 상인입니다. 이름은 시모네타고요.”

로엔이 재빨리 부정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세이지에게 저를 소개했다.

“상인이라고? 레이디가 아니라?”

세이지가 흥미롭다는 듯 진과 로엔을 번갈아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진이 상인인 여인과 집에서 차를 마신다는 게 납득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사실 라우렐에게 어젯밤 후작가의 파티에 진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는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조퇴를 했다.

그리곤 말을 타고 곧장 로이슈덴 공작가로 온 것이다.

파티에 참석한 사실도 놀라운데, 하루 종일 기사단 사이에서 떠돌던 소문이 너무도 황당해서였다.

그래서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왔더니, 진이 여인과 한가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엔 너무 놀라 헛것을 본 줄 알고 손등으로 눈을 비비기까지 했다.

그러나 환영이 아니었다. 여인은 저를 상인이라고 소개하며 예쁘게 웃기까지 했다.

“나는 세이지야. 여인 앞이라 예를 갖춰야 하는데, 난 그런 것 몰라. 기분 나빠도 이해해. 사실 내가 우리 대장 외엔 절대 말을 높이지 않는 싸가지거든.”

솔직한 성격답게 세이지는 로엔에게 격의 없이 말했다.

“하나도 기분 나쁘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히려 유쾌한 분이란 생각이 들었거든요, 세이지 님은.”

“내가 유쾌하다고? 버릇없는 천박한 개새끼가 아니라?”

신기한 말을 들었다는 듯 세이지가 히죽 웃었다.

“세이지! 그 입 좀 다물어. 한 마디도 못하게 꿰매 버리기 전에.”

진이 무례하게 욕설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 내는 세이지를 향해 경고했다.

“쳇, 알았다고요. 그나저나 나도 마셔도 돼요? 말을 타고 쉬지도 않고 왔더니 목이 마르네요. 배도 좀 고프고.”

그때, 열려 있는 문 사이로 트레이를 밀고 오는 메리언이 보였다.

“새 티포트를 가져……. 어, 세이지 님도 오셨군요. 데칸 백작님은 함께 오지 않으셨나요?”

메리언이 세이지를 알아보곤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오랜만이야, 메리언. 라우렐은 퇴근하고 여기로 올 거야. 나만 먼저 도망쳐 왔거든.”

“그래요? 그럼 저녁을 드셔야겠네요. 공작님, 두 분 것도 함께 준비할까요?”

메리언의 제안에 진이 내키지 않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로엔과 느긋하게 저녁 만찬을 즐길 생각이었는데,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등장에 계획이 어그러지고 있었다.

“세이지, 차만 마시다가 라우렐이 오면…….”

“치사하게 쫓아내는 거예요? 내가 먹는 게 그렇게 아깝나? 오늘은 조금만 먹을 생각까지 했는데…….”

세이지가 잔뜩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불쌍한 척을 한다. 진은 그런 세이지가 어이가 없었다.

진의 단호한 태도에 세이지는 제 불쌍한 척이 먹히지 않는다는 걸 알았는지, 눈치 빠르게 공략 대상을 로엔으로 선회했다.

“시모네타라고 했지?”

“시모네타 님이라고 불러. 깍듯이 예도 갖추고.”

진이 불쾌한 표정으로 경고했다. 그러자 세이지가 조금 놀란 듯 눈이 커지더니, 이내 알았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저기 시모네타 님 생각은 어때? 내가 통밥을 굴려 보니까, 우리 대장이랑 저녁을 먹을 모양인데. 내가 같이 먹으면 싫어? 부담돼?”

“세이지! 예의를 갖추라고 했을 텐데.”

“명령대로 ‘님’ 자 붙였는데요, 대장?”

세이지가 무척이나 억울한 듯 침통한 얼굴을 했다.

“공작님,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저 역시 상인이라 굳이 예의를 갖추는 건 좀……. 세이지 님, 편하게 하세요.”

로엔이 잔뜩 굳어 있는 진의 눈치를 살피며, 두 사람 사이를 중재하고 나섰다.

“대장, 본인이 괜찮다고 하잖아. 너무 화내지 말라고요. 그러다 대장 성격 알고 도망이라도 치면 어쩌려고…….”

“세이지, 그 입 당장 다물어!”

진의 날카로운 시선에 세이지가 꼬릴 내렸다.

그 순간 두 사람을 지켜보던 로엔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못마땅한 눈빛으로 세이지를 쏘아보던 진이 로엔을 보았다.

“왜 웃는 거지?”

“그게, 너무 귀여워서요.”

순간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방 안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던 진의 은청색 눈동자가 눈에 띄게 당혹감으로 흔들렸다.

자세히 보니, 그의 귓불이 조금 붉어진 것도 같았다.

또 열이 나는 건가?

“뭐? 귀……. 귀엽……. 흠, 흠!”

진은 차마 다음 말을 뱉을 수가 없어 헛기침을 했다. 그리곤 눈을 가늘게 뜨곤 로엔을 보았다.

귀엽다니.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처럼 냉정하고 잔혹한 성격이란 비난은 수도 없이 들어 봤다.

하지만 귀엽다니. 어린 시절뿐만 아니라, 제 평생 그런 말은 처음이었다.

“진심이야? 우리 대장을 귀엽다고 한 거?”

세이지가 혹시 미친 것 아니냐는 듯 로엔을 보았다.

“진심이에요. 소년 같잖아요. 투닥거리는 모습이.”

‘귀엽다.’에 이어 소년 같다니.

5년 동안 전쟁터에서 진이 죽인 적들의 수를 듣는다면, 절대 귀엽다거나 소년 같다는 말을 할 수 없을 터였다.

진이 어떤 사람이 모르니 하는 말이 분명했다.

“참 독특한 취향이네. 아니, 강심장인 건가?”

세이지가 고갤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니까 그 말은 우리 대장을 좋아한다는 거지? 귀엽다고 생각할 정도로 말이야.”

순간 웃고 있던 로엔의 입가가 살짝 경련했다.

귀엽다는 말이 갑자기 왜 진 로이슈덴을 좋아한다는 말로 비약이 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다.

그리고 뭔가 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당혹…….

잠깐, 들키긴 뭘 들켰다는 거냐고.

로엔은 재빨리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지웠다.

“어, 그런 게 아니라. 세, 세이지 님이요. 제가 귀엽다고 한 건 세이지 님이었어요. 공작님이 아니라.”

이번에야말로 방 안의 공기가 차갑게 식었다. 진이 내뿜는 냉기에 방 안이 다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나? 우리 대장이 아니라, 나였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반문하던 세이지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슬쩍 진의 눈치를 살핀다.

“그러니까 시모네타 님이 귀엽다고 한 게, 나란 거지?”

맹수의 약을 올리듯 세이지의 목소리가 느른했다.

“네. 맞아요. 세이지 님이세요.”

로엔은 고개까지 끄덕여 가며, 못을 박았다. 제발 그가 오해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로엔은 어색하게 웃으며, 진의 안색을 살폈다.

조금 전까지 귀 끝을 붉게 물들이고 있던 진의 표정이 어느새 차갑게 굳어 있었다.

뭔가 단단히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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