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때마침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공작님, 차를 가져왔습니다.”
메리언이었다. 로엔은 안도하며 진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들어와.”
트레이를 밀고 안으로 들어온 메리언이 로엔을 발견하곤 미소를 지었다.
“제레미가 실력 발휘 좀 했답니다. 저녁도 함께 드신다고. 혹시 드시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준비할게요, 시모네타 님.”
능숙하게 티 테이블을 세팅하며 메리언이 저녁 만찬에 대해 얘기했다.
다행히 메리언의 등장으로 두 사람 사이에 감돌던 팽팽한 긴장감이 사라졌다.
“특별히 가리는 건 없다고 전해 주세요. 그리고 메리언. 티룸이 너무 예뻐요.”
로엔의 칭찬에 메리언의 얼굴이 밝아졌다.
“티타임 준비를 너무 오랜만에 하는 거라 실력 발휘가 제대로 되지 않았었는데. 아직 녹슬지 않은 모양이네요. 마음에 오실 땐 제대로 보여 드릴 테니 자주 오셔서 공작님과 함께 차를 드셔 주세요.”
메리언의 시선이 로엔에게, 그리고 다시 진 쪽으로 향했다.
“필요하시면 부르세요.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공작님.”
메리언이 티룸을 나가자, 로엔이 티포트를 들어 올렸다.
그러다 뭔가 재미있는 것이 생각난 듯 진을 응시했다.
“혹시 찻잎점을 본 적 있으세요?”
“찻잎점? 그게 뭐지? 마녀들이 보는 주술인가?”
마녀의 주술이라니. 처음 들어 본 모양이다.
“마녀의 주술이라기보단, 레이디들 사이에선 꽤 인기가 있는 연애 점이라고 할 수 있죠. 찻잎을 이용해 미래를 보거든요.”
“신빙성은 있고?”
“누가 찻잎점을 봐 주느냐에 따라 점괘가 달라지는데, 공작님 앞에 앉아 있는 제가 꽤 잘 보는 편이거든요. 한마디로 공작님은 운이 좋으시다는 뜻이죠. 보시겠어요?”
“별로. 미래를 안다고 해서 좋을 것도 없을 테니까.”
진의 시큰둥한 반응에 로엔이 티포트를 내려놓았다. 그리곤 티포트의 뚜껑을 열고는 거름망을 꺼냈다.
“뭘 하려는 거지?”
“그러지 말고 한번 봐 보세요. 미래를 안다면 바꿀 방법이 생길지도 모르잖아요. 그리고 연애 운은 특히 잘 맞거든요.”
여전히 흥미가 없어 보였지만, 더 이상 거절하진 않았다.
역시나. 대답을 하지 않는 건 긍정인 모양이다.
“좋아. 실력이 좋으면 대가를 치르도록 하지.”
“대가로 뭘 받을 줄 아시고 그런 약속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장난 삼아 웃으며 말하자, 진의 은청색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그의 시선은 티포트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 로엔의 손에 닿아 있었다. 그의 시선에 미세하게 떨렸다.
“뭘 원하는데?”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나른하다.
부드러운 솜털이 심장을 간질이는 느낌에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로엔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유혹이란 건, 여인만 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남자도 작정하면 여인을 충분히 홀릴 수 있다는 걸, 진의 시선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사실 진의 성격상 작정을 하고 저를 꼬시는 건 아닐 테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진에게선 색기가 흘러넘쳤다.
그러고 보니 지금껏 차가운 분위기 때문에 느끼지 못했었는데, 자세히 보니 굉장히 야살스럽게 생긴 얼굴이다.
특히 깊이를 알 수 없는 은청색의 눈동자가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쏘아볼 때면, 몸속의 피가 무섭게 날뛰었다.
“공작님이 원하시는 걸 주세요. 점이 잘 맞는다고 생각하시면. 그게 더 공평한 것 같으니까.”
이번엔 진의 입꼬리가 위로 말려 올라갔다. 그가 웃고 있었다.
“내가 뭘 줄 줄 알고.”
“그게 무엇이든 좋아요.”
대답하고 나니, 뭔가 굉장히 부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왜 또 이렇게 목이 타는지 모르겠다.
로엔은 흠흠, 헛기침을 한 뒤 티포트를 꽉 쥐었다.
“찻잎점을 보는 건 간단해요. 이렇게 차를 찻잔에 따른 다음, 찻잔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세 번 돌려요.”
로엔이 신중한 태도로 찻잔을 세 번 돌렸다.
“그리고 찻잔에 있는 차를 다 따라 버리는 거죠. 한 방울도 남지 않게요.”
로엔은 옆에 놓여 있는 도자기 볼에 찻물을 따라 버렸다.
“마지막으로 찻잔을 잔 받침 위에서 뒤집어 놓으면 돼요. 생각보다 쉽죠? 지금부터 공작님의 찻잔에 차를 따라 드릴 테니, 제가 했던 대로 똑같이 해 보세요.”
로엔이 그의 찻잔에 차를 따라 주자, 그녀의 설명대로 진이 찻잔을 들어 올렸다.
섬세하고 커다란 손이 찻잔을 감싸곤 조심스럽게 돌리는 게 보였다.
찻잔에 담기 물이 넘칠까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그의 행동이 소년처럼 귀여워 로엔은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조금 전까지 여인 수백 명은 잡아먹을 것처럼 색기를 뿜어내더니, 이젠 길들여진 맹수처럼 얌전한 모습이었다.
그 간극이 너무 커, 괜스레 심장 부근이 간지럽다.
“여기에 찻물을 부으세요.”
시키는 대로 진이 찻물을 버렸다. 그리곤 로엔이 그랬던 것처럼 잔 받침 위에 찻잔을 뒤집어 올려놓았다.
“이제 다 된 건가?”
“네. 이제 봐 드릴게요.”
로엔이 진 앞에 놓여 있는 찻잔을 들었다. 그리곤 신중한 태도로 새하얀 찻잔 안을 들여다보았다.
“뭐가 보이나?”
“찻잔 손잡이를 기준으로 왼쪽에 있는 찻잎은 과거를 의미해요.”
찻잔 안이 잘 보이도록 진 쪽으로 기울였다.
“뭣처럼 보이세요?”
찻잔 안을 살피던 진의 미간이 설핏 찌푸려졌다.
“일부러 만든 건 아닐 테지?”
“아시잖아요. 제가 찻잔을 들어 올리기 전까지 만진 적이 없다는 걸요. 그러지 점괘를 조작할 수도 없죠.”
당연히 알고 있다.
그래서 더 의문이 들었다. 찻잔에 나타난 문양이 너무도 뭔가를 닮아 있어서.
“드래건이네요. 그리고 그 심장을 쥔 작은 아이도 보이고요.”
진과는 달리 로엔은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 담담했다.
“왼쪽이 과거라고 했으니, 오른쪽은 앞으로 일어날 내 미래겠군.”
로엔은 말없이 고갤 끄덕여 보이곤, 찻잔 안을 응시했다.
“두 명의 여인이 있네요. 한 명의 손에 단검이 그리고 또 한 명의 손에는 왕관이 들려 있어요.”
“무슨 뜻이지? 내 적이 여인이란 건가?”
진의 입가가 냉소로 비틀렸다.
“보이는 그대로 해석하자면, 공작님에겐 앞으로 두 명의 여인이 나타날 거예요. 그중 하나는 공작님을 단검으로 죽이려 들 테고, 또 한 명은 왕관을 씌워 줄 사람인 거죠.”
“…….”
“두 명의 여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순간이 올지도 모르겠네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로엔을 쏘아보던 진이 물었다.
“그럼 보이는 것 말고, 숨어 있는 뜻은 뭐지?”
“여기, 여인들의 손에 주목하세요. 단검은 오른쪽, 왕관은 왼쪽 손에 들려 있네요. 만약 여인들을 이렇게 하나로 겹친다면…….”
로엔이 여인 형태의 찻잎을 겹쳤다. 그러자…….
“한 사람이군.”
“네. 양날의 검인 거죠. 그리고 바닥에 놓여 있는 십자가와 하늘을 나는 새. 이 새는 공작새처럼 보이네요.”
로엔이 새의 머리와 꼬리를 가리켰다. 공작새의 깃털과 맞아 떨어졌다.
“혹시 이 여인이 너일 확률은?”
로엔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서 머뭇거렸다간 상황이 미묘해질 것 같았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제 생각엔 아닌 것 같아요. 왕관을 장식한 고리가 반지처럼 보이거든요. 그렇다는 건, 공작님의 반려라는 뜻도 되니 저는 해당 사항이 없는 거죠.”
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캠벨 후작가의 파티에 참석하셨다고 들었어요. 혹시 아름다운 레이디를 만나신 건 아닌가요?”
“아니.”
“하지만 새벽에 발간된 그레이트 모먼트의 특별판엔 공작님이 록스버그 공작님께 기사의 도를 행하셨다고 하더군요. 거기다 사교계의 꽃인 레이디 캐서린의 마음을 훔치셨다는 내용도 있었고요.”
“쓸데없는 얘기까지 신문에 실린 모양이군. 쳇, 귀족들이란 정말 한심하게 짝이 없다니까.”
“워낙 유명한 스캔들이었잖아요. 유명 신문에 공개 구혼을 하셨으니까요. 정말 관심 없으세요?”
로엔이 빼 놓았던 거름망을 티포트에 넣고는 새 찻잔을 진 앞에 놓았다.
그리곤 차를 따라 주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저 딱 한 번 장단을 맞춰 준 것뿐이야. 귀족들 사이에서 웃음거리가 되게 둘 순 없었거든.”
로엔의 입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공작님이 그렇게 사려 깊으신 분인 줄 몰랐네요. 소문에는 공작님이 록스버그 공작님에게 결투를 신청하든지, 아니면 목을 칠 것이라고 했거든요.”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깨고, 진은 스캔들을 일으킨 괴물 공작에게 예를 갖췄다.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거든.”
“록스버그 공작님을 만나신 적이 있다고요?”
로엔이 재빨리 기억을 더듬었다.
진과 만난 적이 있는지를.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게 없다. 아니, 정말 없었다.
유리엘라 광장을 지나던 승전 기념 퍼레이드에서 그를 스치듯 본 게 다였고, 정식으로 그를 본 건 은둔자의 숲에서다.
그리고 두 곳 모두, 록스버그 공작이 아닌 시모네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로엔 록스버그 공작의 모습으로 진 로이슈덴 공작을 만난 건, 어젯밤 캠벨 후작가에서가 처음이었다.
“아주 예전에. 아마 록스버그 공작은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로엔은 더 꼬치꼬치 캐묻고 싶은 걸 억지로 참았다.
“그랬군요.”
“이제 쓸데없는 소린 그만하고, 네 찻잔을 뒤집어 봐. 네 점이 맞게 나온다면, 대가로 뭘 줄지 결정할 생각이니까.”
그제야 로엔은 제 찻잔이 여전히 뒤집혀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러고 보니 제 점괘를 확인하지 못했네요.”
로엔이 제 앞에 놓여 있는 찻잔을 뒤집었다. 그리곤 안을 살폈다.
“어?”
로엔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