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알렉,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마차에서 내린 로엔이 로이슈덴 공작가의 집사인 알렉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잘 지냈습니다. 시모네타 님도 좋아 보이시는군요.”
“간밤에 공작님께서 캠벨 후작가의 파티에 참석하셨다죠? 그 덕분에 제 상점에 있는 향수와 묘약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어요.”
“시모네타 님의 매출에 도움이 됐다니, 공작님께서도 기뻐하시겠군요.”
알렉의 말에 로엔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것이란 듯 고갤 가로저었다.
“기뻐하지만은 않을 것 같아요. 지금 칼라일에 있는 대부분의 레이디들이 공작님을 노리는 중이거든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어제 파티에서 공작님이 레이디들 앞에서 굉장히 인상적인 모습을 보이신 모양이에요. 냉정하고 차가운 철벽남으로요.”
“죄송합니다, 시모네타 님. 저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렉의 어리둥절한 표정에 로엔이 쿡쿡 웃었다. 그리곤 즐거운 듯 말했다.
“몰라도 돼요, 알렉. 그저 레이디들이 철옹성같이 차갑고 매혹적인 공작님에게 또 반했다는 것만 알아 두세요. 아마 파티며 무도회에 참석해 달라는 초대장이 수북이 쌓일 것이란 것도.”
“아, 그런 의미였군요. 사실 오늘 새벽에 현관 앞에 놓인 초대장을 보고 놀라던 참이었답니다.”
예상대로 로이슈덴 공작가에도 초대장이 쌓인 모양이다.
사실 급작스레 진이 오후의 티타임에 참석할 수 있냐는 전갈을 보내왔을 때, 거절할까 생각했었다.
만물상점에 밀려드는 손님과 주문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였다.
하지만 바쁜 와중에도 그의 초대를 승낙한 건, 그가 참석할 다음 파티가 뭔지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나저나 냉정하시고 잘생긴 우리의 철벽남, 공작님께선 어디에 계시나요? 축하 인사라도 해 드리고 싶은데. 아니, 감사 인사를 해야 하는 건가? 제 주머니를 돈으로 가득 채워 주신 답례품도 가져왔거든요.”
로엔이 장난스럽게 말하며, 옆에 끼고 있던 가죽으로 감싼 책을 들어 보였다.
“티룸에 계십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알렉. 어딘지 알고 있으니 혼자 갈게요. 할 일 하세요.”
로엔이 그럴 필요 없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그럼 혼자 가시겠습니까? 사실 폐하께서 내일 경마 시합에 공작님을 초대하셨습니다.”
로엔의 입꼬리가 즐거운 듯 말려 올라갔다.
진 로이슈덴이 다음으로 참석할 곳은 경마장인 모양이었다.
“경마 시합이요?
로엔은 짐짓 모르는 척 넌지시 물었다. 그러자 알렉은 아무런 의심 없이 술술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한다.
“네. 그래서 준비를 좀 해야 합니다.”
“준비라면, 어떤? 아, 제가 경마장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어서.”
로엔이 꼬치꼬치 캐묻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어깰 으쓱했다.
“원래라면 경마장에 참석해 우승할 말에 배팅을 하는 게 다지만, 이번 시합에선 폐하께서 로이슈덴 공작가의 말을 경마 시합에 참가시켰으면 한다고 전언을 보내셨답니다. 그래서 참가할 말들의 상태를 점검해야 합니다.”
“아, 그랬군요. 그런데 로이슈덴 공작가엔 좋은 말이 많은 모양이네요. 폐하께서 전언을 보내 말을 참가시키게까지 하고.”
“로이슈덴 공작가엔 대대로 이어지는 명마가 있습니다. 폐하께서도 어린 시절 공작가에 오시면 말들을 보시고 욕심을 내셨지요. 하지만 말들이 워낙 예민하고 까다로워 로이슈덴 공작 외엔 주인을 섬기지 않아 데려가지 못하셨답니다. 그래서 가끔 시합에서나마 말들을 보고 싶어 하시거든요.”
“아, 그런 의미였군요. 재미있네요. 황제 폐하가 소유하지 못하는 말이라니. 더 욕심내실 수밖에 없겠네요.”
로엔의 입가가 슬쩍 비틀리는 걸 보며, 알렉은 의아한 표정을 했다.
“이런, 내 정신 좀 봐. 바쁘신 분을 너무 오래 붙잡았네요. 어서 가 보세요.”
로엔이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하며, 순하게 웃었다.
그제야 알렉 역시 잘못 보았다고 생각했는지 고갤 끄덕였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차는 메리언이 가져갈 겁니다. 아, 그러고 보니 저녁도 드시고 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게 무슨……?”
“요리사인 제레미가 티타임에 함께 드실 베이커리는 물론 만찬용 요리까지 준비한 모양이더군요.”
“공작님께서 허락하실까요? 방해가 될 텐데요.”
로엔은 저녁까지 먹고 간다는 게 부담스러워 슬쩍 진의 핑계를 댔다.
“절대 그렇지 않으실 겁니다. 메리언이 슬쩍 여쭈었을 때, 별말씀 없으셨거든요.”
거절하지 않았으니, 승낙했다는 뜻인 듯했다.
믿기지 않았다. 진이 저와 저녁을 먹는 걸 허락하다니.
“그럼 저녁까지 먹고 가야겠네요. 공작님께서 선물로 드릴 ‘라딘의 서’도 가져왔으니, 저녁을 먹으며 이야길 나눠야겠어요.”
로엔이 또다시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두드렸다.
“아마 좋아하실 겁니다. 이야기 상대가 생긴 게 정말 오랜만…….”
“내가 뭘 좋아한다는 거지?”
수다가 길었던 모양이다. 티룸에 있다던 진이 어느새 복도를 걸어오고 있었다.
“저녁 초대에 대해 시모네타 님께 말씀드리는 중이었습니다.”
알렉의 대답에 진의 시선이 로엔에게 향했다.
“그래서 넌, 어떡할 건데?”
알렉에게도 그러겠다고 대답했지만, 진과 눈이 마주치자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질문을 했다.
“공작님은 괜찮으시겠어요? 저와 저녁을 함께 먹는 거요.”
“나야 어차피 혼자 먹나 둘이 먹나 상관은 없으니까.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순간 꼭 다문 입술 새로 픽 하고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삼켰다.
뭐야, 귀엽게.
허락한다는 말을 저렇게 돌려서 말하다니.
그래서인지 묘하게 그를 더 놀려 주고 싶어졌다.
“방해라면 어떤? 사실 제가 귀족가의 만찬에 초대된 게 처음이라 예법 같은 건 잘 모르거든요.”
난처한 듯 웃는 로엔을 진이 물끄러미 응시했다.
“특별히 따지는 건 아니야. 씹는 소릴 낸다든가, 손으로 집어 먹지만 않는다면 난 상관없어.”
기대하고 있는 건가? 나와 저녁을 먹는 것에 대해?
그를 보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식사 내내 수다를 떠는 건요?”
로엔의 물음에 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음식을 물고 말을 하는 건, 식사 예법에 어긋나는 행위였다.
그리고 진은 식사를 하는 동안 시끄럽게 떠드는 건 질색이었다.
“뭐, 상관없어.”
마음과는 다른 대답이 나가자, 정작 그 대답에 놀란 건 집사 알렉이었다.
평소 제 주인이라면 절대 허락하지 않을 일이었다. 그래서 더 믿기지 않았다.
“흠흠. 그럼 제가 제레미에게 두 분의 저녁 만찬을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노련한 집사답게 표정을 갈무리하곤 재빨리 자릴 벗어났다.
“우리도 갈까?”
“네. 아, 그리고 제가 ‘라딘의 서’를 가져왔어요.”
“벌써 구한 모양이군.”
“외전과 번외편 중 외전만 구할 수 있었어요. 고서를 취급하는 이들에게 주문을 넣어 놨으니, 번외편도 곧 구할 수 있을 거예요.”
진이 고갤 끄덕이며 티룸의 문을 열었다. 그리곤 로엔이 들어갈 수 있도록 옆으로 물러섰다.
그의 행동에 로엔이 조금 주춤했다가, 내색하지 않고 가볍게 고갤 숙였다.
“감사합니다, 공작님.”
티룸 안으로 들어서며, 로엔은 피식 웃었다.
그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지금 그가 저를 상인이 아닌, 귀족가의 레이디처럼 대하고 있다는 걸.
“세상에. 이게 다 뭐예요? 혹시 절위해서 다 준비하신 건가요?”
로엔은 티룸의 테이블을 장식한 꽃과 값비싼 도자기를 보며 눈을 빛냈다.
“오전 내내 메리언이 준비하는 것 같더군. 쓸데없이. 그냥 차만 마시면 될 걸.”
진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화려하게 장식된 티룸을 둘러보더니, 이내 티 테이블에 자릴 잡고 앉았다.
“쓸데없긴요. 차를 마시는 즐거움엔 향과 맛뿐만 아니라, 눈으로 보는 즐거움도 있는걸요. 마음에 들어요. 메리언이 오면 인사를 해야겠어요.”
진의 맞은편에 자릴 잡고 앉은 로엔이 기쁜 듯 웃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로엔의 아름다운 얼굴을 후광처럼 감쌌다.
예뻤다. 특히 살짝 호를 그리며 올라간 입술이…….
그래서 자꾸 눈이 갔다.
“뭐, 좋다니. 다행이군.”
진은 평소와 다름없이 차갑게 말했다. 그리곤 슬쩍 시선을 돌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로엔은 진의 귓불이 붉어진 걸 발견하곤, 고갤 갸웃했다.
‘더운 건가? 그럴 리 없는데.’
아드리안 제국은 타란 대륙의 남단에 위치해 1년 내내 청명하고 온화한 날씨였다.
폭염이 극심한 여름도, 살을 에는 겨울도 없다.
그리고 지금은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는 오후라 선선한 바람까지 불어 딱 좋은 날씨였다.
감기라도 걸린 건가?
손을 뻗어 확인을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어디 아프냐고 물어야 하는 것인지 고민하는 사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은 모양이다.
손끝에 뜨거운 귓불이 닿는 순간, 놀란 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갤 휙 하고 돌렸다.
“뭐지?”
“어, 그러니까 귓불이 붉어서. 혹시 열이 있는 건 아닌지, 저도 모르게…….”
진이 재빨리 귓불에 닿아 있는 로엔의 손을 거칠게 밀어냈다.
마음대로 손을 대 화가 난 듯했다.
“죄송합니다. 허락도 없이…….”
난처한 듯 손을 물린 로엔이 사과했다.
“아픈 게 아니야. 그냥 좀 더워서. 열이 많은 체질이기도 하고.”
“아, 네.”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로엔은 저를 삼킬 듯 쏘아보는 진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창문 쪽으로 고갤 돌렸다.
손은 왜 뻗어 가지곤. 괜히 분위기만 어색해졌다.
로엔은 손을 말아 쥐었다.
이상하다. 그의 귓불에 닿았던 손끝이 열이라도 난 듯 간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