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첨벙, 첨벙.
로엔이 욕조에서 나왔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달빛이 티 하나 없이 깨끗한 몸을 감쌌다.
달빛 아래서 머릴 길게 늘어뜨린 채 서 있는 로엔은 아름다웠다.
소녀의 수줍음과 여인의 농염함이 뒤섞여, 눈을 뗄 수 없이 고혹적이었다.
무엇보다 몸속에 흐르는 맹독은 사내를 매혹시키듯 위험한 향을 뿜어내고 있다.
“제가 닦아 드릴게요.”
햇빛에 바짝 말려 뽀송해진 타월로 젖은 몸을 닦자 기분이 좋아졌다.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카락을 말리는 세실의 손길이 분주했다.
로엔은 가만히 서서 세실이 하는 대로 내버려 뒀다.
“세실, 혹시 이런 건 어떤 뜻일까?”
“뭔데요?”
“다른 사람에겐 무서울 정도로 철벽을 치는데, 딱 한 사람에게만 그러지 않는다면 말이야. 그건 어떤 의미야?”
분주하게 움직이던 세실의 손이 멈췄다.
로엔이 의아한 듯 고갤 들자, 거울을 통해 세실과 눈이 마주쳤다.
분명 세실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정말 몰라서 묻느냐는 얼굴이다.
“그거야 당연히 그 한 사람한테 심장을 빼앗긴 남자의 지고지순한 마음이 아닐까요?”
세실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지고지순이란 말에 로엔은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부러지지 않는 검의 현신이자, 전쟁에서 수많은 적들을 죽인 냉혹한 기사인 진 로이슈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였다.
“장난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봐. 그게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가능한 일이야? 한 사람을 향한 지고지순함이.”
“주인님은 다른 건 안 그런데, 꼭 그런 쪽에선 굉장히 순진하신 것 같아요. 사랑은 만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걸 아셔야죠. 한마디로 심장에 꽂히는 느낌이 중요해요. 첫눈에 반한다는 말이 그냥 있는 말이 아니라니까요.”
세실이 우리 주인님, 순진해서 남자랑 연애도 못하면 어쩌냐며 걱정을 한다.
“그러니까 네 말은, 그게 가능할 수도 있다는 거지?”
“당연하죠. 남녀가 눈이 맞는 데 1초면 끝나는 거죠. 불꽃이 아주 그냥…….”
뭔 생각을 하는지 세실의 얼굴이 순간 붉어졌다. 그리곤 뭐가 그리 좋은지 몸을 배배 꼬며 헤실거리기까지 한다.
“그럼 그걸 어떻게 확인해? 그 지고지순함이 내게 향하고 있다는 증거 말이야.”
수줍게 웃던 세실이 고갤 들어 로엔을 본다. 분주하게 머릴 말려 주던 손 역시 그제야 멈췄다.
“로이슈덴 공작님이시죠? 주인님이 말씀하신 그 철벽 치고, 지고지순함까지 내보인 순정남이.”
로엔은 고갤 가로저었다.
“그럴 리 없잖아. 그냥 앞으로 알아야 할 것 같기도 하고. 공작님을 유혹할 생각이니까. 그러니까 미리 알아 둬야 바로 알아차릴 것 같기도 해서. 다른 이유는 없어.”
평소보다 변명이 길어졌다.
세실에게 이런 것까지 시시콜콜 말할 필요도 없었지만, 자꾸 설명이 덧붙여졌다.
“그러지 마시고, 최대한 빨리 랑케의 에스테 님을 집으로 부르세요. 주인님에게 필요한 건 이론이 아니라, 실전에 써 먹을 기술이니까요. 주인님 말대로 로이슈덴 공작님을 손에 넣으셔야 하잖아요.”
그 순간 왜 진에게 거절당하고 모멸감에 얼굴을 붉히던 캐서린의 얼굴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자존심이 상해 수치심에 몸을 떨던 표정도. 그리고 상처받은 듯 침울해하던 것까지.
‘내가 쓸데없이 괜한 말을 한 건가?’
위험하다느니, 페로몬 덩어리라느니. 다른 레이디들은 오해할 수 있으니 절대 그러지 말라고 했던 말들을 다시 주워 담고 싶다.
만약 제가 그에게 그런 충고를 하지 않았더라면, 캐서린에게 그렇게 차갑게 내치지는 않았을 터다.
아니, 잠깐만.
내가 말을 했어도, 그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으면 되었을 일이다.
괜히 그 말을 마음에 담아서는…….
로엔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내색은 하지 못했지만, 진이 싸늘한 태도로 냉정하게 캐서린을 밀어낸 순간 통쾌함보단 심장이 서늘했었다.
그 순간, 진 로이슈덴 공작이 똑같이 차가운 눈빛으로 저를 내치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져서다.
또다시 등골이 오싹했다.
마치 그에게 거절이라도 당한 듯 몸이 잘게 떨리기까지 한다.
“추우세요? 얼른 잠옷을 가져 올게요.”
세실이 욕실을 나가자, 로엔은 당혹스러운 감정을 추슬렀다.
“이러다 큰일 날 것 같아. 만에 하나 내가 그에게 진심이라도 된다면…….”
로엔은 골이 울릴 정도로 세차게 머릴 가로저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진심으로 그에게 홀리는 순간, 모든 게 끝이다.
‘잊지 마. 부모님이 누구 때문에 돌아가셨는지. 그 대가를 꼭 치러야 한다는 것도.’
들떴던 마음이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진 로이슈덴은 드래건의 심장을 삼킨 자였고, 가문의 저주를 풀기 위한 희생양이다.
마지막엔 그를, 죽여야 했다.
그러니 더는 흔들려선 안 된다.
로엔은 차갑게 식은 얼굴로 욕실을 나왔다.
달빛이 어둠을 잠식한 듯 서늘한 냉기만이 그녀가 서 있던 자리를 채웠다.
* * *
댕댕댕, 댕댕댕―.
유리엘라 광장에 설치된 종탑의 시계가 6시를 알렸다.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는 광장을 따라 설치된 가스등이 창백한 빛을 요요히 뿜어내며 새벽의 어둠을 밝히고 있다.
“신문이요. 신문!”
간밤에 캠벨 후작가에서 열린 파티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아서인지, 고요하던 도시가 여전히 술렁인다.
그레이트 모먼트의 건물을 빠져나온 신문 배달원들의 발길이 칼라일의 골목골목으로 분주하게 퍼져 나간다.
“신문이요! 5시에 발간되는 그레이트 모먼트의 특별판이 지금 발간됐습니다.”
새벽안개를 뚫고 달리는 배달원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떨린다.
“로이슈덴 공작님과 괴물 공작이 캠벨 후작가의 파티에서 만났답니다. 얼른 읽어 보세요.”
평소와 달리 새벽 공기를 깨우는 배달원의 목소리에 굳게 닫혀 있던 귀족가의 저택에 하나둘 불이 켜졌다.
록스버그 공작저 역시 불이 켜지더니, 현관문이 열리며 집사인 스미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특별판 하나 주겠니?”
스미스가 정돈되지 않은 머릴 추스르며 배달원에게 동전을 건넸다.
“사교계의 꽃인 레이디 캐서린이 로이슈덴 공작에게 거절당했답니다.”
배달원이 특별판을 스미스에게 건네며 넌지시 말했다.
“그게 사실이냐?”
글을 모르는 배달원의 말에 스미스가 진실을 확인하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정 의심스러우시면 마지막 페이지부터 읽어 보세요. 자세히 써 있다고 했거든요.”
배달원은 제 정직함을 의심받아 기분 나쁘다는 듯 팔짝 뛰며, 신문을 배급받을 당시 전해 들었던 말을 그대로 전했다.
“그래, 가 봐.”
배달원이 하나라도 신문을 더 팔기 위해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신문을 든 스미스의 얼굴에 긴장감이 떠올랐다.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려던 스미스의 발에 뭔가 툭 하고 걸렸다.
“이건 또 뭐지?”
구두코에 걸린 봉투들을 보며 스미스가 재빨리 허릴 숙였다.
“초대장? 이게 왜?”
스미스가 믿기지 않은 표정으로 수북이 쌓인 봉투들을 들어 올렸다.
10년 전 전대 공작부처가 마차 사고로 사망한 뒤, 지금껏 록스버그 공작저로 배달되던 귀족들의 파티며 무도회 초대장이 뚝 끊겼었다.
‘저주받은 괴물 공작’이라는 소문이 사교계에 돈 이후, 누구 하나 초대장을 보내오는 이가 없어서였다.
그런데…….
“정말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군. 다시 초대장이 쌓이기 시작하다니.”
초대장이 밀려들기 시작했다는 건, 괴물 공작이란 그간의 소문이 이젠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드리안 제국의 사교계는 유난스러울 정도로 폐쇄적이었다.
그래서 가문의 명성과 평판이 나쁜 귀족들은 배척당했다.
그런데 록스버그 공작가에 다시 초대장이 쌓이기 시작했다는 건, 괴물 공작이란 소문과 그간의 스캔들을 덮을 만한 뭔가가 캠벨 후작가의 파티에서 벌어졌다는 뜻이었다.
기쁘기도 하고, 걱정이 됐다.
“캠벨 후작가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좋은 쪽이면 좋을 텐데.
이젠 어리고 불쌍한 제 주인이 멸시받는 것도 싫었고, 상처받는 것도 싫었다.
“스미스 님, 그건 다 뭐예요?”
“아, 세실. 갑자기 초대장이 와서.”
“초대장이요?”
세실의 갈색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빛났다. 그리곤 한달음에 달려와 스미스의 손에 들린 초대장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 많은 초대장이 우리 주인님께 온 거란 거죠?”
“그래. 그런 것 같구나.”
“어, 이건 황실의 문장이 찍혀 있는데요? 폐하께서 보내신 걸까요?”
초대장을 살피던 세실이 그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세실의 말처럼 봉투엔 황실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주인님껜 제가 가져다 드릴게요. 그리고 이 신문도요.”
“그래, 부탁하마.”
세실은 스미스에게 신문을 받아 들고는 서둘러 2층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주인님! 폐하께서 초대장을 보내셨어요. 그리고 다른 초대장들도 잔뜩 왔고요.”
고요하던 록스버그 저택이 흥분에 찬 세실의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세실, 목소리가 너무…….”
크다고 말하려던 스미스는 입을 다물었다. 이미 계단을 다 올라간 세실이 보이지 않아서다.
스미스는 바닥에 남아 있는 초대장을 마저 집어 들곤 현관문을 닫았다.
아직 확연히 알아챌 수 없었지만, 뭔가 변하고 있었다.
새벽의 여명이 밤의 어둠을 밀어내듯, 록스버그 저택에 드리워진 암울한 어둠 역시 서서히 걷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