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42화 (43/201)

42화

“뭐, 그렇지. 귀족이라면 누구나 파티에 참석할 수 있는 거니까.”

왜 이런 변명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무엇보다 진 로이슈덴 공작은 파티에 참석하는 ‘누구나’가 아니었다.

“어땠어요? 공작님이 춤을 신청하시던가요? 주인님을 혹시 알아보신 건가요? 운명처럼요.”

“실망시켜서 미안한데, 네가 푹 빠져 있는 소설과 현실은 달라. 무엇보다 난 춤도 추지 않았고, 공작님은 날 알아보지도 못했어.”

오히려 처음엔 제가 입은 검은색 일색의 드레스와 베일을 보곤, 상중에도 파티에 오는 문란한 여인이라고 오해까지 했었다.

“그래요? 하지만 얘긴 해 보셨을 것 아니에요. 두 분, 유명한 스캔들의 주인공이니까요.”

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을 연인들의 세기의 스캔들처럼 말하는 세실을 보자 웃겼다.

“얘긴 했지. 공개 구혼과 관련된 이야기 때문은 아니었지만.”

“그럼 무슨 얘길 하셨는데요?”

“사업 얘기? 로이슈덴 공작가에서도 무역 사업을 시작하려나 봐.”

“아, 전쟁이 끝났으니 그럴 수도 있겠네요. 들리는 소문으론 폐하께 엄청난 포상금을 받을 거라고 했거든요.”

“포상금이라고?”

승전에 막대한 기여를 했으니 포상금을 받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황궁의 티룸에서 에드윈을 만났을 때의 태도로 비춰 보건대, 그 포상금이 엄청날 것 같진 않았다.

“제가 들은 얘기론 폐하께서 게르피온의 소금 사막의 일부와 광산을 전리품으로 하사하실 거라던데요?”

그제야 진이 왜 소금 교역에 관심을 보였는지 납득이 됐다.

그러나 과연 에드윈이 광산을, 그것도 호리우스의 눈이 묻혀 있는 광산의 소유권을 진에게 넘길지는 의문이었다.

뭐, 그거야 지켜보면 곧 알게 될 테지.

“조만간 공작님이 저택을 방문하고 싶다고 요청해 왔어. 시간을 정해서…….”

“네? 공작님이 오신다고요?”

세실이 눈을 빛냈다. 잔뜩 흥분한 표정을 보건대, 뭔가 단단히 오해한 것 같았다.

“그런 것 아니야, 세실. 오해하지 마. 이건 사업 때문이야. 다른 뜻은 없다고.”

“주인님도 참. 원래 연애라는 게 다 그렇게 시작되는 거라고요. 사업으로 시작해 사랑이 되는 거죠. 아아, 생각만 해도 낭만적이지 않나요?”

낭만은 무슨!

만에 하나 진이 제 정체를 알게 된다면, 속였다고 화를 내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거기다 거짓말쟁이라며 계약을 파기하고, 더 나아가 이번에야말로 목을 조를 게 분명했다.

아니, 검으로 내 목을 칠지도 모르지.

록스버그의 저주를 풀기 위해 그를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계획까지 알게 될 테니까.

냉기가 뚝뚝 흐르는 은청색의 눈동자가 떠오르자 두려움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세실, 진정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래도.”

“알았어요. 주인님이 뭘 걱정하시는지 대충 알았으니까, 오늘 파티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 보세요. 공작님이랑 춤은 추지 못했지만 눈빛 교환 같은 건 하셨을 것 아니에요. 인사하면서요.”

눈빛 교환이라면, 했다.

눈빛뿐만 아니라 손도 잡았다. 그리고 손등에 입을 맞추기 위해 허릴 굽히던 그의 모습이 눈을 가득 채웠었다.

두근!

예고도 없이 심장이 뛴다.

로엔은 제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술이 닿았던 손등이 불에 덴 듯 뜨거워졌다.

미, 미쳤어!

그땐 갑작스러운 상황에 손에 닿는 감촉 따위 느낄 새도 없었다.

그레이트 홀을 환하게 밝힌 샹들리에의 화려한 불빛과 저에게 쏠려 있던 귀족들의 수많은 눈빛만이 신경 쓰였다.

그런데 한참이나 지난 지금, 그 순간이 떠올랐다.

‘지금 뭐 하는 건지. 그저 장갑 낀 손에 슬쩍 닿았다 떨어진 것뿐이었는데…….’

그런데 입술이 닿았던 때와 마찬가지로 그 감촉이 너무도 생생했다.

따뜻한 숨결이 장갑의 차가운 냉기를 뚫고 태울 듯 어른거린다.

“주인님? 주인님!”

“아, 세실. 뭐라고 했지?”

퍼뜩 정신이 든 로엔이 세실을 보았다. 그리곤 무의식적으로 손등을 옷에 문질렀다.

마치 그의 입술이 닿았던 감촉을 강제로 지우기라도 하려는 듯.

“괜찮으신 거죠? 몇 번이나 불렀는데 대답이 없으셔서 걱정했어요. 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죠? 그러니까 공작님과요.”

평소와 다른 로엔의 표정에 세실은 걱정이 되는지 끈질기게 물어 왔다.

“세실, 나 피곤해. 지쳐서 그래.”

세실의 시선을 외면하며, 두통이 시작된다는 듯 로엔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아, 죄송해요. 약을 가져다 드릴게요.”

“아니야. 약까진 먹을 필요 없고, 쉬어야겠어. 이제 그만 가 봐. 내일부턴 상점에 일찍 나가 봐야 하잖아.”

“목욕은요? 힘드실 테니 오늘은 제가 목욕시중을 들어 드릴게요.”

“혼자 목욕한 게 어디 하루 이틀이야? 내 걱정은 할 것 없어. 오늘은 간단히 씻고 잘 생각이거든.”

로엔이 문제없다는 듯 여상하게 말했다.

“안 돼요. 지난번에도 주인님 혼자 목욕하시게 했다가 얼마나 혼쭐이 났다고요. 제가 얼른 준비할 테니, 들어오세요.”

세실이 말릴세라 재빨리 도망치듯 욕실로 가 버리자, 로엔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10년 전 사고 이후, 로엔은 목욕시중을 거부했다.

제 심장에 새겨진 혈독화를 다른 이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만에 하나 몸에 상처라도 난다면 피에 섞인 맹독 때문에 목욕시중을 들던 이가 위험해져서다.

특히 뜨거운 수증기는 공기 중으로 빠르게 퍼져 나가 막을 새도 없었다.

“어쩔 수 없지.”

로엔은 욕실로 들어가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갔다.

따듯한 물이 몸을 감싸자, 긴장으로 굳어졌던 몸이 이완됐다.

“제가 차도 준비해 두었어요. 파티에 참석하고 돌아오시면 항상 두통 때문에 고생하셨잖아요.”

세실이 찻잔을 건네자 로엔이 물끄러미 잔을 응시했다.

두통이라.

그러고 보니, 세실을 내보내기 위해 두통이라고 핑계를 대긴 했지만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

세실의 말처럼 파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 밤새 팽팽하게 곤두섰던 신경이 결국은 끊어져 두통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오늘은…….

“고마워. 잘 마실게.”

차를 받아 들며 두통이 생기지 않은 이유가 뭔지 생각했다.

딱히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주인님, 혹시 아세요? 요즘 들어 주인님이 약을 찾는 횟수가 줄어드신 걸요. 불면증도 없어지신 것 같고.”

“내가 그랬던가?”

인식하지 못했던 듯 생경한 표정으로 세실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곤 반쯤 마신 찻잔을 세실에게 건넸다.

이내 로엔의 시선이 물에 젖은 투명한 옷감에 비친 가슴에 머물렀다.

혈독화의 꽃이 뜨거운 물에 젖어 유난히 붉다.

방금 막 개화라도 한 듯이.

“확실해요. 제가 한 달 동안 드실 두통약과 수면 향을 준비해 놓았는데, 이번 달에 반밖에 줄지 않았거든요.”

그랬나? 한 번도 의식한 적 없었는데.

“다행이네.”

“이건 좋은 징조인 것 같아요. 이렇게만 하다 보면 약을 드시지 않는 날이 올 거잖아요.”

키…….

“……스 때문인가?”

“네?”

“아니야. 아무것도.”

금방이라도 제 저주가 사라질 듯 말하는 세실을 보며, 로엔은 침묵을 택했다.

로엔은 두통약 대신 효과가 더 좋은 특효약을 먹었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드래건의 심장을 삼킨 자의 체액, 그와의 키스가…….

정말 효과가 있었다.

믿기지 않지만 고질적인 두통과 불면증이 완화됐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뛸 듯이 기뻐야 하는데, 자꾸만 답답하다. 무거운 돌이 심장을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세실, 곧 라이칸이 돌아올 거야.”

“라이칸 님이요?”

“응, 당분간 계속 저택에 머물 테니까 별채를 치워 둬. 편하게 지낼 수 있게.”

“드디어 그놈들의 꼬리를 찾아낸 건가요?”

세실의 갈색 눈동자가 평소와 달리 날카로웠다. 분노가 치미는 듯이.

“그런 것 같아. 게르피온에서 암살에 사용한 독의 출처를 잡은 모양이야. 그러니 더는 칼라일을 떠날 일은 없을 거야.”

“그럼 이제 안심해도 되겠네요. 그동안 라이칸 님이 자릴 비워서 불안했거든요. 오늘도 주인님 혼자 파티에 참석하시는 것도 걱정이 돼서, 똥줄이 타는 줄 알았어요. 유리엘라 광장에서처럼 그런 일이 또 일어날까 봐요.”

세실이 지금껏 참고 있던 불안감을 토로했다.

로엔은 지금껏 한 번도 암살자를 무서워한 적이 없었다.

암살을 염두에 두고 록스버그 공작의 모습으로 외출할 땐, 표적이 되지 않기 위해 사람들 틈에 있었다.

검은 드레스와 검은 베일을 고수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숨는 것보단, 오히려 눈에 띄어 사람들의 이목을 주목시키는 것.

암살자들 역시 그들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걸 꺼렸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그녀의 계획은 굉장히 성공적이었다.

대부분의 암살은 그녀가 혼자 있을 때 이뤄졌던 걸 보면.

“한두 번도 아닌데. 이젠 익숙해져서 두렵지도 않아.”

그래,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저를 죽이려는 암살자를 용서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곧 그들의 숨통을 죄고, 서서히 죽일 생각이었으니까.

라이칸이 돌아오는 즉시.

“그러니 너도 걱정할 것 없어.”

세실이 아닌 스스로에게 한 주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엔 정말 위험했잖아요. 광장에서 주인님을 공격하다니. 자칫했다간 비밀이…….”

세실이 두려운 듯 말끝을 흐렸다.

“죄송해요. 제가 쓸데없는 말을 해서 주인님의 마음을 상하게 해 드렸네요.”

로엔은 풀이 죽어 고갤 숙이고 있는 세실의 손을 잡았다.

“세실, 빈말이 아니라 사실이야. 라이칸이 돌아오면, 암살을 시도한 자들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거야.”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에요.”

“지금껏 참아 왔지만, 더는 그럴 필요도 없어졌고.”

록스버그의 저주를 풀 열쇠도 이제 제 손에 들어왔다.

거기다 로이슈덴 공작과 계약까지 한 상태니, 위험한 순간 그를 이용할 수도 있었다.

숨죽이고 참고 인내하는 시간은 끝났다는 뜻이다.

받은 대로, 아니 그보다 더 지독하게 갚아 줄 생각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