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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41화 (42/201)

41화

“록스버그 공작님, 정신 차리세요. 딱 한 번 친절하게 행동했다고 해서 그걸 관심이나 애정이라고 착각하신 모양인데, 장담컨대 아드리안 제국에서 진심으로 공작님을 여인으로 대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협박이란 무기가 없다면요.”

캐서린의 비난에 로엔은 천천히 검은 베일을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을 가로막던 검은 장막이 사라지자, 온전히 서로를 바라볼 수 있었다.

캐서린의 시선이 가면을 쓴 얼굴에 닿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지독한 경멸이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로엔은 그녀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았다.

“레이디 캐서린. 여인이 아니라, 사업 파트너라면 어떨까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침착한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순간 캐서린은 움찔했다.

얼굴의 반을 가죽으로 가리고 있었지만, 로엔 록스버그에게선 숨길 수 없는 위엄과 고귀함이 느껴졌다.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당당하고 아름다웠다.

그래서 화가 났다. 처음 느껴 보는 패배감과 질투가 들불처럼 일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레이디 캐서린도 귀족가의 영애이니 잘 아시겠죠. 귀족들의 정략혼은 애정 따위가 아니라 사업이란 걸. 그럼, 전 이만. 로이슈덴 공작님과 수일 내에 다시 만날 약속을 잡으려면 서둘러야 해서.”

로엔이 베일을 내려 얼굴을 가린 후, 미련 없이 자릴 떴다.

뒤에서 레이디라면 절대 해선 안 되는 나직한 욕설이 들린 듯도 했지만, 로엔은 무시했다.

복도를 따라 걷는 동안 캐서린에게 동정심이 생겼다.

딱히 캐서린에게 나쁜 감정을 갖고 있는 건 아니었다.

정확이 말해서, 그리젤라 캠벨을 제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희생자로 캐서린 캔싱턴을 선택한 것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죄책감을 느끼냐면, 그건 아니었다.

사교계란 원래 그런 곳이었으니까.

“지금 돌아가시는 겁니까, 공작님?”

현관을 나서려는데 캠벨 후작가의 집사가 말을 건넸다.

“오랜만에 참석한 파티라 쉽게 지치는군.”

“제가 마차는 불러들이겠습니다. 잠시 계단의 벤치에 앉아 쉬고 계십시오.”

“고마워.”

집사가 현관문을 열어 주자, 로엔이 밖으로 나갔다.

집사가 말한 벤치를 찾아 붉은 카펫이 깔린 계단을 내려가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작님, 너무 심하셨습니다. 그래도 레이디인데.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차갑게 대하시다니.”

“뭐가 심하다는 건지 모르겠군. 나는 평소대로 행동했을 뿐인데.”

진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함께 들려온 이는 라우렐 데칸이 분명했다.

로엔은 본능적으로 계단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곤 제 행동을 깨닫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내가 뭘 하는 거지?’

이건 마치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기로 작정한 꼴이었다.

이러다 들키기라도 하는 날엔…….

“선을 그어야 한다고 하더군.”

진의 목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로엔이 다시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곤 귀를 쫑긋 세웠다.

“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신데요?”

“그러니까, 나 같은 얼굴은 그 자체가 범죄라고 했거든. 그러니까 오해하지 않게 확실히 선을 긋는 게 좋다고 하더군.”

지금 뭐라는 거야? 내가 대체 뭘 들은 거지?

순간 로엔은 제 귀를 의심했다.

진이 무심하게 뱉어 내는 말들은 모두 제가 그에게 했던 말이었다.

“대체 누가요?”

“있어. 자신은 절대 오해하지 않는다면서, 나보곤 페로몬을 함부로 내뿜고 다니지 말라고 경고까지 한 고양이가.”

고양이? 지금 나보고 고양이라 거야?

순간 로엔은 제가 왜 고양이냐고 따져 물으려다, 제 상황을 깨닫곤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계단 옆에 숨어서 두 사람의 대화를 몰래 엿듣고 있는 이는 만물상점을 운영하는 시모네타가 아니라, 록스버그 공작이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고양이를 키우신 겁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고양이가 말을 한다는 겁니까?”

라우렐이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나도 몰랐는데 있더라고. 말하는 고양이가.”

착각일까?

그의 목소리에 담긴 감정이 귓불이 붉어질 만큼 간지러웠다.

그가 미소 짓고 있다는 상상을 불러일으킬 만큼.

“라우렐, 랑케에서 보도록 하지.”

그들 앞에 마차가 멈춰 서는 소리가 들렸다. 진의 마차가 도착한 모양이다.

잠시 후 마차가 떠났는지, 주위는 다시 고요해졌다.

계단 옆에서 웅크리고 있던 로엔이 몸을 펴곤 밖으로 나왔다.

“어? 록스버그 공작님?”

이런, 망했다.

마차 소리가 나서 두 사람 모두 갔다고 생각했었는데, 진만 간 모양이다.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숨어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은 걸 라우렐 데칸 역시 눈치챈 것 같았다.

“어, 그러니까 지금 이건…… 여기에 있던 건, 숨어 있었던 게 아니라 손수건을 떨어뜨려서.”

로엔이 재빨리 손수건을 라우렐의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아, 손수건 말입니까?”

“그래, 손수건. 그러니까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데칸 백작.”

타이밍 좋게 록스버그 공작가의 마차가 도착했다.

로엔은 그에게 붙잡힐세라, 재빨리 마차에 올랐다.

“어, 공작님, 조심히 가…….”

인사를 끝마치기도 전에 마차의 문이 닫혔다. 그리곤 도망이라도 치듯 마차가 멀어졌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라우렐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더 수상하다는 걸 모르시는 건가?”

그나저나 왜 숨어서 엿들으신 거지? 정말 공개 청혼이 진심이셨던 건가?

이젠 보이지 않는 록스버그 공작가의 마차를 바라보는 라우렐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오늘은 낯설고, 이상한 일투성이였다.

진이 파티에 참석한 것도 그랬지만, 더더욱 놀랄 만한 점은 스캔들의 주인공인 록스버그 공작에게 손등에 입을 맞춘 것이었다.

순간, 진이 미쳐 버린 건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가 아는 진 로이슈덴 공작은 절대 이런 일을 벌일 사람이 아니었다.

평소의 진이라면, 조금 전 캐서린 캔싱턴에게 했던 것처럼 차갑고 냉정하게 끊어 냈어야 옳았다.

‘다른 목적이 있으신 건가? 공개 청혼을 받아들…….’

라우렐이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갤 가로저었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그런데 말하는 고양이는 대체 뭐지?”

라우렐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너무도 복잡해 골이 지끈거렸다. 술이 필요했다.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군.”

라우렐은 그를 기다리고 있을 두 친구들을 찾아 파티장으로 향했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질문을 쏟아 낼 에런 홈볼트가 걱정이긴 했지만,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라우렐은 진탕 취할 생각에 잔뜩 들떠서는 서둘러 계단을 올라갔다.

* * *

“주인님, 파티에서 기분 좋은 일 있으셨어요?”

세실의 도움을 받으며 드레스를 벗던 로엔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갤 들었다.

“아니. 오히려 피곤한 일투성이였어.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거야?”

“계속 웃고 계셨잖아요.”

“내가?”

로엔은 생경한 말이라도 들은 듯 거울 쪽으로 고갤 돌렸다.

파티 내내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던 가면을 벗어 놓은 터라, 흠 하나 없이 완벽한 얼굴이 거울에 비쳤다.

당연히 미간을 찡그리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세실의 말처럼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내내 미소를 짓고 있었던 모양이다.

“무슨 일인데요? 혹시 파티장에서 멋진 기사에게 구애라도 받으신 거예요?”

세실의 농담에 로엔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말려 올라갔다.

구애까진 아니어도, 그런 비슷한 일이 있긴 했다.

그러고 보니 대체 무슨 마음으로 제 손에 입을 맞추는 행동까지 했는지 궁금했다.

귀족들이 하는 방식대로 악수만 하면 그만인데.

혹시 내가 여인이라 악수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건가?

문득 든 생각에 로엔은 속으로 웃었다. 만약 그렇다면, 그의 행동이 너무 귀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니.”

로엔은 서둘러 부정했다.

“그럼 주인님의 흉을 보고 다니는 레이디들에게 한 방 먹이신 거예요?”

드레스의 단추를 풀던 로엔이 움직임을 멈추곤, 조금 놀란 표정으로 세실을 보았다.

‘설마 투명 망토라도 두르고 파티장에 왔던 건가?’

세실은 파티장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본 것처럼 콕 집어 말하고 있었다.

“그건 맞아.”

“어쩐지. 그래서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으신 거였군요.”

세실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갤 주억거리며 드레스를 정리했다.

로엔은 세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만약 세실의 말처럼 웃고 있었다면, 얄미운 레이디들에게 한 방 먹인 일 때문은 아니었다.

캠벨 후작가의 계단 뒤에 숨어서 들었던, 진의 말이 자꾸만 생각나서다.

“세실, 내가 고양이와 닮았어?”

“고양이요? 아니요. 전혀요.”

세실은 제 주인이 고양이보단 오히려 펨부르크 호수에 산다는 전설의 엘프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내가 고양이를 닮았다니. 말도 안 되지.”

로엔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깰 으쓱했다.

“왜요? 누가 주인님더러 고양이를 닮았대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냥 갑자기 궁금해져서.”

세실이 묘한 눈빛으로 로엔을 보았다.

생각해 보니 가끔 사내들이 마음에 드는 여인에게 고양이 같다거나 강아지 같다는 말을 했던 게 떠올라서다. 그리고 며칠 전 마구간지기 톰이 그녀를 보고 망아지 같다고 했었다.

예쁘고 귀여운 동물들도 많은데, 하필 망아지 같다는 말이 불쾌해 그를 노려보곤 마구간을 나왔더랬다.

“주인님, 혹시 남자 생기셨어요? 누가 주인님이 좋대요?”

“뭐? 절대 아니야.”

펄쩍 뛰며 부정하는 모습이 더 수상했다. 거기다 지금껏 한 번도 당황한 적 없는 제 주인이 시선까지 피하며 난처해하고 있었다.

“주인님! 공작님도 오신 거죠? 그, 로이슈덴 공작님이요.”

뭔가 중요한 것을 발견한 듯 세실의 갈색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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