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돌아갈까?’
망설여졌다.
지금껏 한 번도 도망친 적 없는 그녀였다. 수차례의 암살 시도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강심장이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망설여진다.
저 안으로 들어가 그를 대면하면 뭔가 바뀌어 버릴 것 같은 묘한 두려움이 발을 묶어 놓은 듯했다.
“록스버그 공작님, 들어가지 않으십니까?”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로엔이 고갤 들었다.
캠벨 후작가의 집사가 의아한 듯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 잠깐 생각 좀 하느라. 후작님은 어디 계시지?”
“그레이트 홀에서 로이슈덴 공작님과 함께 계십니다. 그렇지 않아도 후작님께서 공작님을 찾으셔서 모시러 나오던 참이었습니다.”
“후작님이?”
“네, 어서 들어가 보십시오.”
집사가 제 볼일이 끝났다는 듯 서둘러 자릴 떴다.
돌아가려 했는데, 이젠 어쩔 수 없이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천천히 숨을 고른 로엔은 허릴 곧게 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그림자처럼 숨어드는 것엔 이골이 나 있었다.
로이슈덴 공작과 함께 있다는 캠벨 후작이 그녀를 찾는 목적은 뻔했다.
황제의 명령대로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할 생각인 듯했다.
우선은 조용히 들어갔다가, 나중에 기회를 봐 후작에게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지금은 귀족들의 이목을 끌고 싶지 않…….
“록스버그 공작님! 드디어 오셨군요.”
하지만 그레이트 홀 안으로 들어선 순간, 로엔의 희망은 그녀를 부르는 캠벨 후작의 목소리에 무참히 깨어졌다.
“…….”
못 들은 척 가 버릴까?
아주 잠깐이지만, 돌아서 갈까 고민했다. 하지만 로엔은 언제나 그렇듯 돌파하기로 결정했다.
고갤 들자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꽂혀 들었다.
그 시선 안엔 진 로이슈덴 공작도 있었다.
화려한 샹들리에 불빛 아래 서 있는 그는 현혹될 만큼 아름다웠다.
푸른빛이 감도는 검은 머리카락은 잘 정돈되어 있었고, 서늘한 은청색의 눈동자는 깊고도 짙었다.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그의 얼굴은 예술 조각품처럼 완벽했다.
잔혹하고 아름다운 냉미남.
그는 수많은 무리들 속에서 고고하게 빛나는 단 하나의 포식자였다.
‘서커스 무대 위의 광대가 된 기분이네.’
로엔이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캠벨 후작이 다시 그녀를 불렀다.
“록스버그 공작님, 이쪽입니다.”
캠벨 후작은 그녀의 마음도 모르는 채 제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다.
“저와 함께 가시겠어요, 공작님?”
언제 왔는지 로엔의 옆에 그리젤라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뇌물의 효과가 너무 좋은 모양이다.
저를 절대 돕지 않겠다던 그리젤라가 마치 친한 친구라도 만난 듯 팔을 잡아끌기까지 한 것이다.
“레이디 그리젤라.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로엔이 그리젤라만 들을 수 있도록 낮게 속삭였다.
“파우더 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었어요.”
벌써 소문이 퍼졌다고? 그 짧은 시간에?
로엔은 총알보다 빠르게 퍼진 소문에 고갤 절레절레 흔들었다.
“파우더 룸 안으로 들어가려던 제 친우가 우연히 안에서 벌어졌던 일을 목격하고 전해 주었거든요.”
“아.”
로엔은 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납득했다.
“오늘부로 캐서린 캔싱턴과 적이 되셨네요. 앞으로 골치 아파지실 거예요.”
그리젤라의 손에 이끌려 그레이트 홀을 가로지르는 동안 두 사람은 계속 소곤거렸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사교계엔 대부분 적들뿐이라.”
여상한 목소리로 말하는 로엔을 그리젤라가 묘한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유감이지만, 전 친구는 되어 드릴 수 없어요.”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 쓰실 필요 없답니다, 레이디 그리젤라.”
“하지만 적은 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걸론 안 될까요?”
그리젤라의 말에 로엔이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그리젤라 역시 따라 멈춰 섰다.
“충분합니다. 분에 넘칠 정도로.”
로엔의 대답에 그리젤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갈까요? 제가 공작님을 로이슈덴 공작님 곁까지 에스코트하는 역할을 맡았거든요.”
그리젤라가 로엔의 팔을 붙잡곤 걷길 재촉했다.
“감사합니다, 레이디 그리젤라. 큰 힘이 되는군요.”
의미 없이 뱉은 말이었지만, 로엔은 그 말을 입 밖으로 낸 순간 사실이란 걸 깨달았다.
‘이런 작은 호의에 감동할 만큼, 지쳐 있었던 건가?’
로엔은 헛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아버지, 록스버그 공작님을 모셔왔습니다.”
“그래. 고맙구나, 그리젤라.”
캠벨 후작이 로엔을 향해 고갤 돌렸다.
“그렇지 않아도 공작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저를요?”
로엔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캠벨 후작 옆에 서 있는 진과 또 다른 귀족들을 차례로 응시했다.
그의 옆엔 전에 한 번 본 적 있는 라우렐 데칸과 루빈 제라르 백작, 그리고 에런 홈볼트가 서 있었다.
‘특이한 조합이야.’
로엔은 일행인 듯한 네 사람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라우렐 데칸과 루빈 제라르 백작, 그리고 에런 홈볼트가 같은 아카데미 출신이란 사실을 떠올렸다.
아, 그렇게 된 건가?
로엔이 납득하는 사이, 캠벨 후작이 다시 말을 꺼냈다.
“로이슈덴 공작님과 게르피온의 소금 사막에 관한 이야길 하고 있었거든요. 록스버그 공작가의 말레 상단이 소금 사막의 교역권을 갖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아닙니까?”
“맞아요. 타란 대륙에서 거래되는 소금과 후추는 저의 가문의 말레 상단을 통해서만 가능하거든요.”
“그래서 찾고 있었답니다. 로이슈덴 공작님이 소금 사막에 관심이 있으시다는군요. 로이슈덴 공작님, 이분이 조금 전 제가 말씀드렸던 록스버그 공작이십니다.”
로엔은 그제야 진이 있는 쪽으로 몸을 틀었다.
마치 이제야 진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걸 눈치챘다는 듯이.
이내 검은 베일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조금 전 복도에서 부딪힌 사람이 저란 걸 알았는지, 은청색의 눈동자가 날카로워졌다.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서로를 경계하는 맹수처럼 눈을 떼지 않았다.
주위 역시 쥐죽은 듯 고요했다.
몇 주간 사교계를 뒤흔들었던 스캔들의 주인공이 공식적으로 처음 만나는 자리였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귀족들의 눈빛은 호기심으로 빛났다.
“진 로이슈덴입니다.”
먼저 침묵을 깬 건 진이었다.
“로엔 록스버그입니다.”
로엔이 검은 장갑을 낀 손을 진에게 내밀었다. 그리곤 그가 어떻게 나올지 지켜봤다.
“이제 드디어 미친 모양이네요. 로이슈덴 공작님에게 손을 내밀다니.”
“명문가면 뭐 하겠어요. 이젠 남자 때문에 염치도 자존심도 버린 거죠.”
진보다, 두 사람을 지켜보는 귀족들의 반응이 더 빨랐다.
로엔의 행동을 비웃듯 악의적인 비난이 들려온 것이다.
로엔은 손을 거두는 대신 진을 응시했다.
계속 무시하려나? 아니면, 언제나처럼 목을 조를지도…….
“헙!”
하지만 다음 순간 로엔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진이 고갤 숙이더니, 그에게 내밀어진 손등에 입을 맞추며 경의를 표한 것이다.
마치 기사가 아름다운 레이디에게 하듯이.
믿을 수가 없었다. 진의 성격상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예를 갖출 것 같지 않아서였다.
그럼 대체 왜?
“무릎을 꿇지 않는 건, 기사의 예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기사의 예라고?
생각해 보니 공작 신분인 진이 기사의 예를 갖출 수 있는 사람은 황후밖엔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같은 신분인 로엔에게 예를 갖춘 건,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아, 네. 흠, 흠!”
괜스레 헛기침을 하며 진을 응시했다. 여상한 태도로 서 있는 그는 평소처럼 냉정한 모습이었다.
“소금 사막에 관심이 있다고요? 혹시 공작님께선 무역 사업을 시작할 생각이십니까?”
다행히 목소리는 평소처럼 들렸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관심은 있습니다. 연이 된다면 상단을 운영해 볼 생각이고요.”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제 생각엔 소금 사업보단 호리우스 눈의 채굴권과 교역권을 확보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폐하께서 건국기념일이 지난 뒤에 곧 광산 채굴권과 교역권을 놓고 우선 협상자를 선정할 것이라고 들었거든요.”
로엔이 슬쩍 제가 알고 있는 정보를 흘렸다.
“공작님께선 우선 협상자 선정의 기준에 대해서도 알고 계십니까?”
“네, 알고는 있지만 이런 곳에서 말씀드릴 내용은 아닌 것 같군요.”
진 역시 동의하듯 고갤 끄덕였다. 그리곤 뜻밖의 말을 건넸다.
“혹시 제가 방문 요청을 드린다면,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로엔은 조금 놀랐다.
사실 여기서 말씀드릴 내용이 아니라는 말을 했을 때, 그가 장소를 옮겨 얘기하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해 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사람이 없는 곳에서 사업적인 제안을 할 생각이었고.
그런데 그는 번거롭게 다음 약속을 잡는 걸로 대신했다.
‘굳이 사람들 앞에서 저택을 방문하겠다고 한 의도가 뭘까? 그리고 기사의 예를 표한 이유…….’
순간, 로엔은 진이 평소와 달리 행동한 이유를 알아차렸다.
‘소문을 만들 생각인 거야. 황제와 나를 갈라놓을 그런 소문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분명 사업은 핑계일 뿐이었다. 그녀가 심어 놓은 정보원에게선 진이 사업에 관심이 있다는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교역 사업에 관심을 갖다니.
캠벨 후작가의 초대장을 받은 순간, 황제인 에드윈의 속내가 뭔지 꿰뚫어 본 로엔이었다.
로엔이 알아본 의도를 진이 알아보지 못할 리 없다.
그는 에드윈과 제가 모종의 계약을 했고, 그 의도가 뭔지 알아낼 생각이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에드윈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을 할 게 뻔했다.
어느 정도 그의 의도가 읽히자, 로엔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이 정해지면 공작저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록스버그 공작님.”
두 사람의 대화가 끝이 나자, 캠벨 후작이 기다렸다는 듯 악사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제 사업 얘긴 대충 마무리된 것 같으니 파티를 즐기는 게 좋겠군요. 혹시 두 분, 춤은?”
캠벨 후작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마치 두 사람이 춤을 추는 게 어떻겠냐는 듯이.